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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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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1절-13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을 따라서 높은 산으로 올라왔더니 능력적으로 즉, 주님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여주신다. 주님을 따라서 높은 산으로 올라왔더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여주시는구나.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차원도 주님을 따라서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일반이치로도 높은 산으로 올라갈수록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많이 보여진다. 높은 산꼭대기에 서면 사방이 다 보인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도 질적으로 깨달음의 수준이 높이 올라갈수록 세상 것은 다 보여지기 마련이다. 안 올라가면 안 올라간 만큼 안 보여지고 올라가면 올라간 만큼 보여진다. 보여지면 기분이 좋고 상쾌하고 즐겁고, 안 보이면 답답하고 슬프고 숨이 막힌다. 일반적으로도 낮은 곳의 공기는 오염돼 있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선선한 바람이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주님이 변형되어서 보여주시는데 변형되어 보여주시는 이게 실상이냐, 현상이냐, 가상이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뭘 보거나 음성을 듣고 하늘나라를 봤다고 하는데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 지금 교인들이 그렇게 눈으로 보는 것과,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돌려서 깨닫게 해주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에 있는 것을 영적으로 깨달으려고는 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이 다인 것처럼 말하게 되면 그건 선악과이다. 눈으로 보는 것을 자꾸 신앙의 기준 잣대로 삼으면 그건 선악과다. 이건 마귀에게 그냥 넘어간다. 이처럼 마귀의 꾀임을 받아 넘어가고서도 자기가 성령을 받은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
그러면 변화산상에서 보여주신 그 주님과, 나중에 부활되신 그 주님과 질이 같으냐, 다르냐? 같다. 그렇다면 변화산상에서 보여주신 것은 실상적인 예수가 환상으로 변한 거냐? 아니다.
3절: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났는데 이것은 우리를 위한 거룩운동을 말하는 거다. ‘빨래하는 자가’ 그랬는데 빨래는 옷이 더러우면 빠는 건데,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광채가 났다고 하니까 이것은 우리를 깨끗케 하는 거룩운동을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 표현은 뭔가를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 주님의 33년 동안의 살으심의 언행심사가 흠과 티가 없이 정결하고 거룩하다는 것이다. 왜? 나를 구원해 내려고 내 대신 그렇게 사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 사니 내 대신 주님이 그렇게 사신 것이다.
그 주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말씀을 나눈다.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이 시간으로는 시대적 연대적 차이가 엄청나다. 역사적으로 보면 엘리야는 예수님 오시기 900년 전에 먼저 왔다. 모세는 예수님 오시기 1600년 전에 먼저 왔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약 700년의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이렇게 시대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알아봤을까? 셋이 나타나서 통성명을 했느냐? 그 장면이 통성명이라기보다도 척 보니 대화가 척척 돼 나가는 거다. 그렇다면 이들이 생전 몰랐던 사람들인가, 알았던 사람들인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처음 만났는데도 대화를 하다 보니 수년을 사귄 친구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마음이 맞고 대화가 맞으니 짧은 시간에 몇 년을 사귄 사람처럼 가까워진다. 기독교인도 예수님과 그래야 하겠는데, 한 집에 내외간으로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대화를 하면 톡톡 튀는 경우도 있다. 참 힘들겠다.
그렇게 연대적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만나자마자 쉽게 알아볼 수가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신령천국에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시면서 그들을 구약시대 때 미리 보낸 것이다. 주님이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천국에서 모세도 보냈고 엘리야도 보냈다.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6개월 먼저 보낸 것처럼 주님이 나중에 오셔서 할 일을 당신의 백성들이 미리 알게 하려고 구약 때 먼저 모세를 보내시고 한참 후에 엘리야를 보내셨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시던 당신이 메시아로 올 때 당신의 백성들이 대립 없이 잘 영접이 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미리 보여주심은 첫째로 모세로 통해서 어린양의 피로 죄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여주었고, 두 번째는 시내산의 말씀으로 광야생활에서 영능의 실력을 닦는 것을 보여주었고, 세 번째는 엘리야로 통해서 구원 얻은 백성이 스스로 죄악에 감염되니 하나님의 재앙과 형벌을 받는 것을 보여주었고, 네 번째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체화 시키고 부활 승천으로 천국에 살게 하시려는 인간창조의 근본목적을 보여줬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 이 두 선지자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타협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일은 하지 않았고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산 자들이다.
이 두 선지자가 예수님과 대화를 한다. 무슨 대화를 하느냐? 그들은 구약시대에 살았지만 예수님께서 예수로 오시기 전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시는 그 분과 늘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대화를 가지셨다. 그러니까 지금 변화산상에서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는 것 역시 이스라엘로 통한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에 관한 대화를 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서는 구원의 성질이나 내용에서는 시간초월 장소초월이다. 언제나 실상적 대화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세계다. 믿음의 세계다. 구원의 내용 면으로 들어가서는 천지창조로 올라갔다 마지막 때로 내려갔다가, 구약시대로 갔다가 신약시대로 갔다가 하며 실상적인 그 정신 사상이 번개보다 빨리 움직인다. 실상적인 믿음은 참 빠르다. 그런데 실상적인 믿음이 아니고 세상 육에 속한 물질개념으로 된 것은 올라가지도 못하고 빠르지도 못한다. 둔하다.
마귀도 영물인데 인간이 그 마귀의 활동을 어떻게 따라잡겠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운동이 마귀의 운동보다 빠르냐, 느리냐? 차원이 높고 더 빠른 거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믿음이 있고 신앙이 있다고 하면 영적으로 굉장히 빨라야 하는데 이방신관을 가지고 믿는 건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민첩하지 못하고 이건 신앙 믿음이 아니다. 성경은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 하는 그걸 붙잡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인격화로 실상화로 되는 이걸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 온전의 성품에 관한 것이다. 이게 빠르고 정확하다.
신령천국은 실상세계요, 이걸 인격과 성품으로 말할 때는 실상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얘기를 할 때 그 쪽의 정신 소원 목적 사상 이런 걸 깨달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신령천국에서 볼 때 신령천국에 있는 존재들은 실상적인 존재들이고, 그곳에서 현재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를 볼 때는 우리는 현상적인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런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돼서 공중에 떠다니는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런 생각을 집어치워라. 이건 이방 우상을 섬기는 신관에서 나오는 마귀 짓이요 귀신장난이다.
신령천국 쪽에서 볼 때 우리는 현재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상적인 존재인데, 그 면만 가지고 생각을 하면 현재 우리는 마치 고국을 떠나 외국생활을 하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신령천국을 주격으로 놓고 보지를 않고 현상적인 존재를 주격으로 생각을 하고, 그 주격에서 하늘나라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치 그들을 유령처럼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것처럼 변화산상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셨는데 주님이 말씀을 한 그게 진짜냐. 아니면 우리가 주님을 유령처럼 생각하는 그게 진짜냐? 오늘날 기독자들이 변화산상에서 나타난 그 세 분을 어떻게 보느냐?
어떤 분은 이걸 환상을 본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니까 마치 유령이나 도깨비처럼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봐야 되는지, 아니면 주님의 그 말씀하심이 실상적인 것으로 말씀을 하심인지? 어느 쪽을 믿을 거냐? 어느 쪽이 타당하게 들리느냐?
모세와 엘리야가 구약 때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그 분과의 영감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계속 대화를 하면서 선지자의 일을 한 것이다.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5절: 이 세 분이 말씀하고 계실 때 베드로가 불쑥 하는 말이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 장면을 보는 것이 아주 황홀하거든. 그래서 ‘초막 셋을 지읍시다. 하나는 주를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베드로는 심히 무서워서 자기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주라고 했는지 선생이라고 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태다.
그럴 때 구름이 그들을 싹 덮었다. 연기가 아니라 구름인데, ‘이 구름이 무슨 뜻이냐’ 하고 그 쪽으로 생각을 말고 ‘왜 구름을 동원시켜서 가려버리느냐’ 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라. 가릴 때는 왜 가리느냐? 보지 말라는 것이다.
구름이 덮이면서 구름 속에서 하는 말씀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러니까 이 의미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그 장면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너희는 예수님의 말을 들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때 본 그것이 오늘날 신비주의자들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이냐? 아니다. 신접한 무당 아줌마가 선지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린 게 진짜 사무엘의 영이냐? 아니다. 사무엘이 살아생전에 무당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일을 했느냐? 만일 그렇다면 혹 사무엘의 영일지도 모르나 그러나 사무엘은 무당의 말을 듣고 한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한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이 하는 짓이 하나님의 일, 자타의 구원운동의 일이냐? 하나님의 속성적 성품을 닮게 하는 일이냐? 아니다. 그러니까 미친 짓이다 그 말이다. ‘뭘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 하며 이상한 말을 하며 ‘이게 성령 받은 증거다’라고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통해서 실상적인 하나님의 뜻, 실상적인 세계, 실상적인 생각을 가지면 이게 빠를 텐데 그게 없으니 물질적 눈에 보이는 면에 자극을 받아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게 전부는 귀신의 장난들이고 마귀운동들이다. 교회 안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으냐?
우리 집에 다른 교회에서 전도지 넣는 걸 보면 거의가 그런 식이다. 전부는 귀신운동 마귀운동이다. 무당 점쟁이 같은 사람이 목사가 돼서 교회나 아니면 기도원에서 그런 짓을 하면서 교인들을 얼마나 홀리는지? 거기에 홀리는 교인들은 얼마나 바보고 둔팅이인지? 그 사고방식이 얼마나 힘이 드느냐?
그 분들의 정신은 초막이다. 초막이 무슨 뜻이냐? 초막은 일종의 텐트인데, 텐트를 쳐놓으면 영원히 가느냐? 바람 불면 날아간다. 바람에 날려가는 건 다 초막이다. 햇볕에 쬐이고 바람 불면 삭아서 찢어지는 게 초막이다. 그런 초막만이 아니라 비 맞고 시간 지나면 무너지고 불에 타지고 썩어지는 것을 둘러쓰고 앉아있는 것 전부는 초막이다. 변질되고 찢어지고 무너지고 하는 건 다 초막이다.
오늘날 믿는 사람이 진동되고 요동되고 썩고 불타고 바람에 날아갈 것에 마음을 쓰고 정신을 쓰고 삶의 목적이 거기에 들어가 있다면 그 믿음은 초막이다. 그 믿음은 언젠가는 변질되고 그 사람은 어느 순간에 날아가고 안 보인다. 그건 초막이다.
8절: 구름 속에서 나는 음성을 듣고 보니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하나님의 인정도 못 받을 자들이 하나님의 참 종인 것처럼 흉내를 내고 싶어서 신비스러운 것을 체험하려고 자기 몸을 자학하는 자들이 많은데 이제는 그런 자들을 따라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듣기는 듣는데 어떤 것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이치의 말씀을 들어야 사람이 속성적으로 아름다워지고 고상해지고 차원이 높고 슬기로워지고 지혜롭고 총명해진다. 이게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되는 거다.
개도 훈련을 잘 받은 개는 사람보다 낫다. 소경을 인도해 간다. 아내가 영감에게 시장 좀 봐 오라고 하면 사람 되지 못한 사람은 술집으로 가는데 훈련을 잘 시킨 개는 시장을 잘 봐 온다. 그런 개도 있는데 개보다 못한 사람도 있고, 개와 동등적인 사람도 있다. ‘어찌 네가 개 같으냐’ 하는 건 개와 동등적인 사람이라는 말이다.
인격이 진리로 하나님 말씀으로 실상화 되지 않고는 그 어떤 일을 세상에 이뤄놨어도 그 사람은 주님 앞에 설 때 아무 의미가 없다. 왜? 초막이니까 다 불나면 타지고 바람 불면 날아가고 하니까. 그러니 눈으로 보는 것을 따르지 말고, 그런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교훈으로 들어가서 자기 앞에 주님의 인격이 보여져야 한다. 신앙의 높은 차원은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가 아니라 말씀 속에서 주님과 자기만 있는 것이다. 그 분의 인격 대 나. 참 멋있다.
9절-13절: 산에서 내려올 때 제자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까? 산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면 사람들이 신기해서 귀담아 들을 텐데 왜 말하지 말라고 하실까? 첫째, 예수 당신을 위해서일까? 두 번째, 제자들을 위해서인가? 세 번째, 사람들을 위해서일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말을 하면 내가 빨리 죽는다’ 그 말인지? 말을 해놓으면 ‘어느 산에서 봤느냐’ 하고 그곳으로 달려 갈까봐?
그런데 세 제자도 직접 보기는 봤지만 얼떨떨해서 헛소리를 하고 내려오는 판인데 산 밑에 있는 아홉 제자들에게 그 말을 하면 이 제자들이 믿을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했는데 아담과 하와가 먹으면 죽는다고 한 그게 어떤 건지 알았을까? 사람 죽는 걸 한 번도 못 본 상태이니 사람이 죽는다고 한 하나님의 그 말씀이 뭔지 알아질까? 그게 믿어질까? 죽는다는 게 믿어졌겠느냐? 그러면 이들이 사람이 죽는다는 게 뭔지를 뭘 보고 알았을까? 그 후에 자식 중에 형이 동생을 죽였는데 작은 아들 아벨이 죽은 것을 보고 ‘죽는 게 뭐로구나’ 하고 알았을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했는데 우리는 죽는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 대개는 육신 죽는 것만 안다. 이건 비유적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데 당시에 아담 하와가 그 말을 듣고도 죽는 게 뭔지를 잘 알지 못했듯이 예수 믿는 사람이 영적 면이 죽는 게 뭔지를 어떻게 알까? 어떻게 생각을 할까? 신앙 믿음이 죽는다는 걸 어떻게 알까? 믿음이 죽는 것과 사람이 죽는 거는 질이 다른 것이다.
사람이 배우지를 못하고, 알지를 못하고, 아는 것이 자라지 못한 것을 세상에서 많이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 믿으면서도 신앙의 깨달음에서 이치적인 면에서 고차원적으로 자라지 못한 사람들이 한두 명이냐? 나이는 먹었어도 신앙의 자람성이 아기 같은 사람이 많다. 아기일수록 자기 탐이 많듯이 이런 사람은 예수를 오래 믿었어도 육적으로 감각성이 빨라서 사람이 있는 데서 원망도 나오고 한다. 그게 어린 것이다. 신앙이 성장됐으면 그게 안 나온다.
세 제자는 산에 올라가서 높은 신앙의 차원을 보고 내려왔는데 산 아래의 아홉 제자들은 올라가서 그걸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이 낮은 차원이니 세 제자가 아홉 제자에게 높은 신앙의 차원을 말을 하면 그들이 이걸 알아듣겠느냐? 못 알아듣는다. 낮은 신앙의 차원에서는 높은 신앙의 차원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 영적 세계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아홉 제자도 모른다.
세 제자는 높은 산에서 보여주는 걸 보기는 봤으나 그 실상이 왜 그렇게 되는 건지를 구체적으로 잘 모른다. 멍한 거다. 예수님께서 부활체로 살아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창세 이후로 변화 부활체로 신령체로 살아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모른다.
신체가 죽었다가 죽기 전의 상태로 살아난 자는 간혹 있다. 성경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됐는데 예수님이 살리셨다. 그러나 신령체로 살아난 것을 본 사람은 이 높은 산에서 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중에 죽었다가 부활할 때는 다 본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에서 살아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그 때 가서야 밝혀지고 믿어질 일인데, 그런데도 세 제자는 그것이 아직 안 왔기 때문에 몹시 궁금한 것이다. 변화된 주님을 보기는 봤지만 주님의 변화 부활체를 만져봐야 하는데 그거는 미래적이니까 참 궁금하다 그 말이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게 무엇일까’ 그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현재 변화 부활체를 못 봤고, 그 날에 확실하게 볼 것이다.
후에 예수님께서 변화 부활체로 살아나서 마리아를 만났다. 마리아가 그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만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안 올라갔다’ 라고 하셨다. 그러면 올라가면 만지라는 말이냐? 그렇다면 주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 버리면 어떻게 만지느냐?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가령 부활한 예수님을 만졌다고 하면 마리아의 입장에서 변화 부활체를 만지는 그 느낌이 어떨까? 그림자를 만지려고 하면 만져지지를 않는 것처럼 그런 건지? 아니면 변화 부활체를 만지면 어린아이의 살결을 만지는 것과 같은 건지? 어떤 느낌이 들까?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그걸 모르는 거다.
만일 만질 때 그림자를 만지는 것 같다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변화 부활체가 유령이라고 할 것이고, 그림자를 만지는 것 같다면 ‘내가 변화 부활체를 만져보니 그림자를 만지는 것 같더라’고 할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말하건 저렇게 말하건 물질성을 초월하지는 못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지지 말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만지지 말라는 것이냐? 마리아가 만지면 예수님이 팍 꺼져버리기 때문이냐? 마리아를 위해서 만지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모든 성도를 위해서 만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을 하게 되면 쓸데없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 하며 쓸데없는 귀신소리들을 많이 하는데 ‘가서 너희가 본 것을 부지런히 전하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에게는 실상이 아니면 안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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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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