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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2: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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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13절-17절: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서 시험을 건다. 누가 예수님을 KO 시키라고 이들을 보냈느냐?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보냈다. 이들은 예수님께 연속적으로 시험을 걸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만 그렇게 한다고 보지 말고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 된 자기에게 사단 마귀 악령류들의 운동이 자기 주위에서 얼마든지 시험을 거는 거다. 자기가 이걸 느끼지를 못하면 누가 자기에게 ‘이것을 해 봐라. 저것을 해 봐라’ 할 때 실력이 없으면 자기에게는 이것도 시험이다. 걸린다.
회사에서 ‘시험이다’ 하고 광고를 하며 와서 시험을 보라는 것은 올리려는 시험이고, 마귀의 시험은 사람을 떨어뜨리려 하는 거고, 짓밟고 꼬집고 훼방하는 시험이다. 주님이 주시는 시험은 올리려는 거다. 대학의 시험은 입학할 숫자가 정해져 있으므로 몇 명은 올리고 몇 명은 떨어뜨리려는 시험이다. ‘다른 대학에서 떨어진 자는 우리 대학으로 오너라’ 하는 곳에는 시험이 없다. 종교인들을 보내서 종교적으로 오는 시험은 훼방하고 짓밟고 일을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시험이다.
시험을 하는 자가 시험을 걸라고 사람을 보낼 때는 영리하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보내지 미련하고 둔탁한 사람을 보내지는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똑똑한 자들이요 율법에 능통한 자들이요, 헤롯 당원들은 정치적으로 똑똑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무엇과 무엇이 결탁이 돼 있느냐? 교권과 세권이 합쳐져 있다.
눈이 밝은 사람은 교회를 볼 때 ‘아, 이건 교권과 세권이 합세됐구나’ 하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제일 정확한 것은 그 교회 인도자의 설교의 성질을 보면 알 수 있다. ‘아, 이건 질적인 면에서 본질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어떤 성질과 어떤 성질이 합쳐져 있구나. 연합되어 있구나. 결탁되어 있구나’ 이게 나온다. 지금 그걸 보라고 본문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예수님께 교권과 세권, 종교권과 정치권이 결탁해서 온 것이다. 교회에 이게 많이 있다. 예수님께 시험을 걸러 온 이 자들은 세상지식이 있고 아주 교활한 자들이다. 교회에 이런 자들이 들어오면 교회가 그들의 종이 되기 쉽다. 이용당하기 쉽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하는 말인즉 ‘선생님, 우리가 당신을 잘 압니다’ 라고 했는데, 아는 것도 세상적인 지식과 신체적 체험적 지식으로 아는 것이 있고 즉, 보고 듣고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있고, 성령으로 영적으로 아는 것이 있다.
‘내가 당신을 잘 압니다’ 할 때 그 안다고 하는 것을 잘 봐라. 경험에서 아는 건지, 누구에게 듣고 안다는 그 말인지? 경험으로 아는 것에도 자기의 신비로운 어떤 체험을 근거로 하고 안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순전히 위로부터 받은 성문계시 속에, 성경 문자 속에 들어있는 영적인 그 흐름의 깨달음을 두고 그 지식이 자기의 원 지식이 돼서 안다고 하는 건지 그걸 잘 분별 구별해야 한다. 육적으로 아는 게 있고, 영적으로 아는 게 있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각 기독교 종파가 안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이방세상에서 믿는다고 하는 미신적인 신관으로 안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 종교도 없이 안다는 것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또 우리교회에서는 이룰구원에 대한 중점적인 지식으로 무엇을 가지고 안다고 하는 건지를 빨라야 한다.
세상에는 세상의 육적으로 아는 온 세상의 지식은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과,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려고 진리말씀을 깨닫고 사는 참 생명 길을 가는 성도가 아는 생명과를 먹은 지식 두 가지 지식밖에 없다.
세상적으로 흐르는 기독교는 선악과 따먹은 지식에서 예수모자와 예수 옷을 입고 나타난 세상과 질이 같은 지식이다. ‘예수 믿어 세상에서 부자 되자’ 하는 건 세상과 똑같은 거다. 그건 선악과 먹은 지식 그대로다. 교회는 생명과 먹는 거다. 예수님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시길 ‘교회는 내 살과 내 피를 먹어라. 그래야 너희가 산다’고 하셨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어느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던 ‘영생과를 먹고 나오는 지식의 교훈인지,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세상과 똑같은 개념으로 나오는 가르침인지’ 하는 지식분석이 빨라야 한다. 먼저는 ‘세상에는 두 가지 지식밖에 없다’ 그렇게 나누어 놓고, 그 다음에 뭘 둘러쓰고 기독교라고 하는 건지 그걸 봐라. 이리가 양가죽을 둘러쓰고 ‘양입네’ 하는 건 아닌지?
기독교라고 하는 그 종교에서 나온 제도는 성경에서 나온 건 아니다. 기독교 인도자들의 세계에서 ‘이렇게 하는 게 좋다’ 하고 신학교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니고 하는 종교적인 제도는 인간에서 나온 거다.
인간이 만든 그런 제도를 타고 목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오직 주님자랑 진리자랑 하나님의 말씀 자랑만 있다면 그 사람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 신앙이라고 하는 그 주격적 지식은 바로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닌 기독교라는 제도를 타고 나와야 목사가 될 수 있고, 그래야만이 주님이 알아준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기준이 어디에 가 있는 거냐?
자기가 어디를 거쳐 나왔던 자기가 주장할 것은 주님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주장하고, 본질을 연구하고, 본질로 가기 위해서 그런 학교에 들어가는 거지 종교적 제도를 거친 것을 주장하라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건 외식이다. 외식은 천국에 가지고 들어가지 못할 것을 믿음처럼 자랑하고 하나님처럼 자랑하는 것이다. 그건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다. 선악과 먹은 지식은 그렇게 나가게 돼 있다. 아니다가 아니라 질이 그렇게 되는 거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소화를 시켰으니까 솔잎 똥을 싼다. 진리를 먹으면 진리의 언행심사가 나오고, 세상성을 먹으면 세상에 속한 게 나온다. 먹은 대로 나오는 것이다.
신학을 나와야 만이 목사가 되고, 그래야 믿음이 좋은 거라면 평신도는 그런 데 안 나왔으니까 믿음이 없는 거냐? 하나님 앞에 그런 건 없다.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준이 되고 질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다. 그런데 왜 세상 것을 갖다가 기준을 세우느냐? 그것부터가 틀린 거다. 성경이 기준인데 왜 세상 다른 것을 갖다가 기준을 만드는 거냐? 마귀가 하는 짓이 그렇다.
그래서 아무리 예수를 오랫동안 믿었다고 해도, 수 년 수십 년을 믿었다고 해도 자기 속에 신앙이 없다고 하는 증거는 바로 그런 면을 기준 삼아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이 얼마나 죄인지? 죄를 죄인 줄을 모르고 있는 상태로 산 자기의 인격이 얼마나 수치스런 일이냐?
‘우리가 선생을 압니다’ 라고 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고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안다는 것이다. 안 듣고 안 보고 안다는 게 아니라 말씀을 듣기도 하고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안다고 하는 그 앎이 인격적인 변화에서 온 것이냐, 보고 듣고 느낀 데서 온 것이냐? 후자다.
‘당신은 참되시고 마음속에 숨김없이 아무에게도 꺼리게 만드는 일이 없이 솔직히 말씀하십니다.’ 이들의 예수님께 대한 말인즉 ‘당신은 마음속에 숨김이 없고, 안팎이 솔직하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걸그작거리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라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내가 하는 말은 영이니라’ 하니까 육으로 알아들은 무리들은 다 도망을 간 적도 있는데, 그런 장면을 염두에 두고 지금 이들이 예수님께 하는 이 말을 들어보면 어떻게든 예수님의 마음을 자기들 식으로 녹여버리려는 것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칭찬을 하면 예수 믿는 자기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서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 말을 듣는 자기가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 건지?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칭찬을 해주니 ‘내 편이다’ 하고 그만 같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는 사람이 많다. 참 속도 없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칭찬을 한다고 해서 그들과 같이 놀고 있으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자기의 레별로 올라왔다는 말이냐, 믿는 자기가 선악과 따먹은 차원으로 내려갔다는 말이냐? 내려간 거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외모란 외모적 표면적 인물이나 재산이나 직책이나, 사람 같으면 얼굴 예쁜 거나 키나 체력 등을 보는 것이다. 그건 영모는 아니다. 주님은 그런 것으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성령의 눈으로 진리를 잡고 가는 그 사람의 양심을 보신다. 일반양심은 진리를 안 잡았다.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십니다’ 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 그들의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말은 맞는데 속에 들어있는 그 중심은 예수님을 넘어뜨릴 작정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거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준다고 할 때 사람이 넘어지기 쉽다. 보통 자기를 추켜올려 세우면 그만 마귀의 호응적 태도에 넘어가기 마련이다. 마귀가 사람을 통해서 호응적으로 와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게 호응적 대립이다. 그런데 여기에 거의 넘어진다. 그러나 대립적으로 오는 마귀의 수법에는 덜 속는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속셈을 다 아신다. 사람은 자기의 속에 들어있는 것이 말로써 나오게 돼 있다. 그래서 신앙수준이 높은 사람은 그걸 알아차리고 그런 낮은 차원에 있는 사람을 높이 올려야 한다. 이게 복음이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다.
그런데 또 어떤 게 있는가 하니 이성적 철학적 개념으로 사람을 이용해 먹는 종도 있다. 그런 게 상당히 많다. 그런데 본인들은 그걸 모른다. 그러나 적으나마 성경이 눈이 뜨여서 영적 면의 이치가 보인다면 이 사람은 세상 철학자들의 마음이 훤하게 보이는 거다. 세상 철학자들은 사람이 올라 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될 수 있는 반석이 없다. 허공이다. 구멍 뚫린 시루처럼 바닥이 없다. 그걸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철학은 하늘로부터 된 하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 우리가 세상 철학적인 것을 듣고 어떻게 천국으로 들어가겠느냐? 이건 주님의 철학과는 질이 다른 것이요, 썩고 불타질 것이요, 주님 앞에 심판을 당할 것이요, 부활 때 다 빠질 것인데 뭘 그런 걸 듣느냐?
창:부터 보면 물질을 만드신 거, 물질세상이 진행되는 역사, 예수님께서 오셔서 영육을 볼 수 있게 하는 게 복합적으로 들어있다. 계:에는 영의 활동을 전부 기록해 놨다. 그 영의 활동이 창:에 가서 보면 다 보인다. 눈으로 보이는 그 활동이나 역사가 무슨 영감의 감화로 무슨 영을 받고 그렇게 움직이는지 그게 다 나온다. 계:에서 특히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목사나 교인들 속에 어떤 영이 움직이는지를 알도록 다 기록해 놨다. 그래도 모르겠느냐 그 말이다.
광야의 여자가 깔고 앉은 게 뭐냐? 물질이요 교만이요 본능이다. 오늘날 세상에 속한 교회는 그걸 피할 수가 없다. 이 성질을 가지고 교인들을 개체적으로 보면 교인들 속이 다 보이는 거다. 세상에서 유명하다? 세권과 교권이 합쳐지면 유명해지는 거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다 아신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예수님에게는 해당이 안 되지만 믿음 없는 우리들에게는 한 편 일리가 있다. 그들의 말이 진리라는 말이 아니라 일리가 있다는 말이다.
왜냐?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려면 첫째는 사람이 참돼야 한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인격으로 되는, 속 성품으로 되는, 하나님의 온전으로 되는 그 기준에서 참돼야 한다. 일반사회의 윤리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놓고 그 속성에 참돼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같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니 그들의 말에 우리가 부끄러운 거다.
두 번째는 아무에게고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가 왜 먼저 하나님과 막힘이 되고 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힘이 많은가? 그러니까 그들의 소리를 들을 때 부끄러운 거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지만 그 말을 듣는 우리의 양심이 부끄럽다. 그러니까 그 면에서 일리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에게 무엇이 그렇게 막히느냐? 사람과 막혔으면 그 사람은 흔히 하나님과도 막혀져 있다. 주님은 사람과 막힌 건 없다. 사람이 주님과 막힘이 된 것은 주님이 막아서가 아니라 인간 자기 스스로가 주님과 막힘이 있어서이다. 우리는 막힘이 없어야 하는데 막힘이 되니 얼마나 신경이 쓰이고 걱정 근심 대립 마찰 충돌이 일어나느냐?
인인 간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뭘 몰라서 멍청하게 있어서 막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있어서 사람을 영생 쪽으로 생명 쪽으로 인도하는 그 면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혜로워야 하고 명철해야 한다.
세 번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을 우리가 듣고 깨달을 것은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세상조건이 말하는 대로 사람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기준의 조건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의 중심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왜 그렇게 외형 외모의 조건이 그렇게 많은지? 말이야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람을 외모 외형, 세상에 속한 것으로 많이 본다. 우리는 신앙에 속한 것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다른 해석도 있는 거지만 사람이 실수를 해서 다른 사람을 죽인 경우 도피성으로 가서 뿔을 잡으면 살 수가 있다. 그런데 고살한 자는 도피성에 가서 뿔을 잡아도 끄집어내서 죽인다. 그러니까 상태나 상황을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여기에(궁극교회에) 온 것은 좋지만 오게 된 이유가 올 데 갈 데가 없어서 온 것이냐? 딴 데 가봐야 자기를 안 알아주니까 여기에 온 거냐? 다른 교회에 가면 봉투작전이 많아서 여기로 온 거냐?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반면에 신앙기준을 놓고 참작을 해야 한다.
네 번째는 우리는 일반사회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신적 도덕성이 기준으로 돼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적 도덕성으로 보는 게 아니라 종교적 외식적 기준으로 말하는 거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속 중심은 아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속으면서 똑똑한 것처럼 예수님에게 시험을 거는 것이다. 자기가 바로 서 있지 못하고 남을 훈계하면 스스로 속는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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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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