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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3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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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8.10.8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밑 소리’, 믿(밑)음(音)에 관하여
막5:35-36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막 5:35-36)
성경본문을 5:21-43까지 다 읽으려고 했지만 시간관계상 생략하고 5:35-36만 읽었습니다. 5:21-43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이야기는 혈루병 걸린 여인을 치유하는 이야기입니다. 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이렇습니다.
야이로의 딸 살리는 이야기(막 5:21-24)로 시작해서-혈루병 여인 이야기(막 5:25-34)가 중간에 나오고-다시 야이로의 딸 살리는 이야기(막 5:35-43)가 결론이 되죠.
회당장이라는 직업은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예배순서 전반을 관장합니다. 제사장이 넘버원이라면 회당장은 넘버2라 할 수 있죠. 회당의 실질적 실무를 관리하는 사람이 바로 회당장입니다. 종교가 삶이었고, 삶이 종교였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회당장은 유대사회의 유력한 지도자 그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회당장은 세습을 많이 했다고 해요. 명성교회가 김삼환 목사에서 아들인 김하나 목사로 세습한 것 때문에 요즘 시끄러운데, 그런 성직에 대한 세습전통이 예수 당시에도 있었다며 우길까 염려됩니다요.) 그런 막강한 힘과 권력을 지니고 있던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자 마자 그 발아래 엎드려 간곡히 청합니다 (막 5, 22). 이건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볼 때 굉장한 스캔들입니다. 유대사회 유력인사가 떠돌이 대중선동가, 히피, 사이비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예수의 발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누군가의 발아래 엎드리는 경우는 신하가 왕에게 나설 때 취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이 대목에서 저는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 주십시오”라는 구절이 눈에 와 닿았습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안수기도를 해달라는 거겠죠. 안수기도의 전통은 당시 유대사회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고칠 때 손을 얹고 기도했다는 기록이 여럿 있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어린 딸을 살려내실 때에도 예수님은 어린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막 5,41). 고향 회당에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에도 예수님은 ‘손을 얹어서 고쳐주셨고’(막 6,5).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실 때에도, ‘그에게 손을 얹으셨습니다.’(막 8,23-25). 이러한 안수기도의 전통은 초대교회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의 손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사도행전에는 적혀 있습니다(행 11,21).
안수기도를 해달라는 회당장 야이로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예수님이 그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좀 전에 유대사회의 지도자격인 회당장이 예수에게 무릎 꿇고 청을 한 사건이 스캔들이라고 했죠. 많은 사람들과 독자들이 과연 예수가 그 아이를 살릴 것인가 하는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예수님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때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님을 밀어댔다고 합니다(막 5,24). 호기심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정말 예수님이 병들어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살리실 것인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치유 받는 사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회당장의 어린 외동딸을 살려내신 치유 이야기 안에, 본래 독립된 전승이었을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유하는 이야기가 삽입된 데에는 복음서 편집자의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의도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하고 계시는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 하겠습니까?’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회당장에게 ‘걱정 마, 내가 살려 주겠다’, 라고 말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인간에게는 기본감정이 있죠.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어떤 사람의 얼굴표정과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우리는 파악이 가능합니다. 인간의 기본감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동양전통에서는 맹자 이래로 인간본성을 ‘희노애락’ 으로 표현합니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이 4가지를 인간의 기본감정으로 꼽습니다.
진화심리학자인 (영국 바스 대학의) 딜런 에번스(하룻밤 만에 읽는 진화심리학)는 ‘기쁨, 고통, 분노, 놀람, 혐오와 함께 공포’, 곧 두려움을 인간의 기본감정의 하나로 지목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지금껏 진화해 온 감정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발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어두움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면 불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에게 고통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면 각종 마취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죠. 그 죽음을 피하고자 진시왕은 불로초를 찾아 천하를 뒤졌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인간 게놈프로젝트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포스트휴먼을 둘러싼 논의들은 어쩌면 인류가 지녀왔던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인 죽음에 대한 극복사의 끝자락에 위치라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성聖 스러움의 의미’에서 ‘두려움과 떨림’이 신의 임재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첫 번째 반응이라 합니다. 인간이 성聖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신의 임재를 느낄 때 두려움에 빠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은 두려워서 숨었다고 합니다(창 3,10). 호렙 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습니다’(출 3,6).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죠.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신이 이제 너희들 앞에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즉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는 하느님의 역사가 이제 너희 눈 앞에서 펼쳐질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믿기만 하여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믿음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은 아이의 죽음 앞에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죽은 상태를 자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만국 공통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동서양 공히 죽는 것을 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듣고 봐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례식장에 가면 “영면하소서”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를 비웃었다고 성경을 적고 있습니다(막 5, 40).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라는 뜻입니다).
‘달리다굼’, 이 아람어는 당시 부모들이 아이들을 깨울 때 쓰는 일상적인 말입니다. 아침에 늦잠을 자는 자녀들을 깨우는 것이 부모의 주된 일과 중 하나잖아요. 여러분은 어떻게 늦잠 자는 아이들을 깨웁니까? (문 열고, 불 키고, 이불을 걷어치우며, “야, 일어나”... 이렇게 말하지 않나요) 이와 같이 ‘달리다굼’은 당시 이스라엘 부모가 잠든 자녀들을 깨우기 위해 했던 매우 평범한 말입니다. 그런데 번역과정에서 ‘내가 네게 말한다’가 첨가되었습니다. 저는 ‘소녀야, 일어 나거라’는 말보다 중간에 들어온 ‘내가 네게 말한다’ 에 더 눈이 갑니다. 아마도 이 부분을 번역해 집어넣은 의도는 예수님이 한 말씀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느님은 존재가 사건이 되는 분이고, 말과 사건, 말과 행위간의 간극이 없는 신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무엇으로 창조하십니까. 말씀으로 하시잖아요.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창공이 있으라” 하시니 창공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말씀이 사건이 되는 신에 대한 기억이 예수에게도 투영되고 전승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저는 두 개의 치유기적 이야기(혈루병을 앓는 여인, 죽은 야이로의 딸)를 읽으면서 문득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미셀 푸코가 생각났습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광기의 역사’ 그 후에 출판한 ‘임상의학의 탄생’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은 어떤 절대적 진리와 도그마와 법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와 세계와 우주가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작품들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뭘까요,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기준, 미친 사람과 멀쩡한 사람의 기준, 정상적인 性과 비정상적인 性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그것들 사이에 뚜렷하고 엄격한 구별 없이 다함께 어울려 적당히 요령껏 되는대로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을 향한 낙인과 격리와 배제의 강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는 시기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근대입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울 때 근대는 이성과 진보의 시대로 기록되지만, 자본주의 성장에 저해되는, 즉 노동생산력이 떨어지는 요소들을 제거하며 그것들을 향해 감시와 처벌과 훈육과 격리를 감행하면서 이룩한 문명이 바로 근대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로부터,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존재가 바로 타자입니다. 결국 근대란 주체에 의한 타자의 배제 역사, 라고 푸코는 꼬집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푸코가 말하는 문제의식을 너무나도 잘 인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기준을 허무는 행위를 하십니다. 치유기사는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이 출중하다, 라는 사실을 보이는 기사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사회를 짓누르고 있었던 기준들, 그것은 종교적으로는 모세율법이고, 뿌리 깊은 가부장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기사에서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예수께서 치유하고 살려내신 사람들이 혈루병 앓는 여인, 그리고 죽은 소녀라는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과의 접촉은 모세율법에 의하면 부정을 타는 것으로(레위기 15,25) 금기시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시체를 만진다는 것은 더욱 부정을 타는 행위였습니다 (민수기 31,19). 예수님은 그런 금기와 관습을 넘어 상대방의 간절한 필요와 고통과 절망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거리낌 없이 두 여성을 고치고 살려내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육체적 고통을 치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이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고통도 치유하셨고, 동시에 그들을 차별하는 사회적 구조를 향해 철퇴를 날리신 것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교롭게도 둘 다 여성이었습니다. 얼마나 이것이 해방적인 메시지이고, 얼마나 이것이 당시로서는 위험한 메시지였겠습니까.
오늘 주제는 믿음입니다. 혈루병을 앓은 여인의 치유 기사를 보면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님을 밀어댔다(막 5,24)는 보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막 5,31)라고 답을 합니다. 예수님에게 손을 댄 사람이 혈루증 앓는 여인 한 사람만이 아니었겠죠. 그런데 그 많은 예수님의 옷깃을 잡고 몸에 손을 대고 손을 잡고 했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이 여인만이 치유를 받았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어떻게 나았을까요?
예수는 그것이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그녀에게 말해줍니다.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라는 믿음 말입니다. 예수님은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치유가 누군가가 지닌 초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시고,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십니다(시편 22,24)’ 라는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됨을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반대말이 뭘까요? 대부분 ‘불신’, ‘의심’, ‘회의’, ‘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이로에게 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믿음의 반대말은 ‘두려움/공포’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되겠죠.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두 가지 실존적 두려움이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자신이 되고 싶어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필사적으로 내가 피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두려움은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딸 없이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자신으로부터, 혹은 희망이 사라진 세상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죽은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가 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는 불가능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맹신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쫄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 담대함, 그것이 믿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석 유영모는 우리말 ‘믿음’을 ‘밑 소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존재의 바닥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이죠. 내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여러분 자신의 ‘밑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가?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하고, 귀도 닫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오롯이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신 앞에서 단독자가 될 때 나오는 소리가 아닐까도 합니다. 저도 저의 ‘밑 소리’, 믿음이 뭘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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