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2:35-44 |
---|---|
설교자 : | 김기성 목사 |
참고 : | 말씀의 숲 교회 |
‘위선’과 ‘최선’ 사이
(막12:35-44)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어요. 1348년 중세시대에, 유럽전체 인구가 9천만 명인데, 3년이라는 기간 동안, 4천만 명이라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역병이 있었어요. 인구의 절반정도가 죽어나가는, 어마무시한 병이 전 유럽에 퍼져 나갔지요. 그 유명한 흑사병이죠.
지금도 몇 백 년이 흘렀는데도,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영향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유럽 사람들, 특히 영국 사람들은 혹시 옆에 사람이 재채기를 하거나, 기침을 하면 늘 하는 소리가 있어요. 블레스 유 (갓 블레스 유)!! 항상 이야기하지요.
기침하고, 재채기만 해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라는 뜻으로 블렛스유! (갓블레스유)하지요. 그래서 저도 영국에 살 때, 참 많이 했던 말 중에 하나예요. ‘블레스 유’ (‘갓 블레스 유’)예요.
그런데, 그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 동정의 의미와 걱정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관용어구가 되어버린 것이죠. 한마디로 마음에도 없으면서, 괜히 위로하는 척 하는 것이죠. 마음에도 없으면서, 굉장히 가까운 척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닌 것이죠. 좀 더 심하면, 겉으로는 굉장히 위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는 것이죠.
저는 영국에 살아봐도 영국 사람의 속마음을 모르겠어요. 그런데, 영국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의 속마음을 더 모른대요. 겉으로는 웃는데, 속으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요. 항상 웃어요. 항상 하이!, 항상 헬로우! 하면서도, 그 속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영국사람 일본 사람들에게만 이런 모습이 있을까요?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 있어요. 우리에게도 다 이중적인 모습들이 다 있어요. 이것을 우리는 ‘위선’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신앙적인 부분에는 없을까요? 물론 있지요.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쉽게 빠질 수 있는 부분과 위험이 있어요.
1.
위선? 여러분, 무엇이 ‘위선’일까요? 오늘 그 위선을 예수님이 잘 가르쳐 주시는 것 같아요. 오늘 예수님이 대표적인 위선의 모습을 서기관들을 예를 들어 말씀하세요.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너희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니?’ 라고 물어 보시는 것이죠. ‘네 안에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위선적인 모습이 있단다!’ 우리 내면에, 깊숙이 잠자고 있는 것을 들쳐 내시는 것이죠. 자, 38-39절의 말씀을 한번 보시지요.(시작)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은, 그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굉장히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고, 율법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죠.
예수님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서기관들에 대해서 정말 신랄하게 비판을 하세요. 오늘 본문의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있는데, 이들을 향해서 ‘화있을진저’, ‘화있을진저’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 몰라요. ‘겉 다르고, 속 다른 자처럼 신앙의 모습 보이지 마라!’ 예수님의 눈에 볼 때는, 이 사람들의 겉과 속이 너무 달랐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올바로 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은 위선적이 행동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아주 특징적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 특징이 바로,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거에요. 사실 종교계에 있어서, 그 당시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제사장, 대제사장이에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긴 옷을 입지요. 그런데 제사장처럼, 긴 옷을 즐겨 입고 다녔다는 것이죠.
그 당시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위엄, 거룩을 상징해요. 본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거룩한 것처럼 그런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이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존재를 과시하고 싶다는 것이죠.
믿음 생활하면서 자기의 솔직한 모습, 정말 순수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예비하는 순수한 신앙이, 변하여, 경건한 척, 신실한 척, 믿음이 있는 척, 하기가 쉽다는 것이죠.
또 하나는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한대요. 이 서기관들의 특징은, 그 긴 옷을 입고 시장에 나가요. 사람들이 많은 곳이죠. 그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목사인 저를 포함해서 교회 안에서는, 인사 받고, 인정받는 것이 더 쉬운 것 같아요.
왜요? 교회라는 곳이, 사랑으로 격려하고 위로하기 때문에, 사실 그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아요. 잘한다 하고, 은혜롭다 하고요. 그래서 자기가 인사 받는 것을 즐겨하는 습성이,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있어요. 물론 격려차원에서 할 수도 있지만, 교회하면 나쁜 말 보다, 좋은 말로 포장할 때가 더 많이 있지요. 그래서 착각해요.
저는 처음에 설교를 잘하는 줄 알았어요. 전도사 시절, 그리고 목사시절, 많은 분들이 와서 저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아이고, 전도사님 은혜 많이 받았어요.” “아이고~ 목사님 참 말씀에 도전을 받았어요” 저는 이 말씀이 참 말인 줄 알았어요. 예배가 끝나고 저에게 와서 그렇게 말씀해 주니까, 정말 설교 잘하는 줄 알았어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것이 그냥 ‘인사’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괜히 예배 끝나고 제 앞에서 뭐 딱히 할 말이 없으니까,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열심히 하라는 말씀으로 새겨듣지요. 그래서 저는 설교를 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주신 능력과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오늘도 노력해요. 그게 편해요.
어려워서 이해 안 되면, 쉽게 그리고 아주 쉽게 만들어서 주는 것이 훌륭한 설교가라 생각해요. 그것을 위해서 노력해요. 그래서 한편의 설교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질문을 해요. ‘최선을 다했는가?’ 그리고 ‘어디에 갖다 놓아도 부끄럼 없는 설교를 했는가?’ 를 늘 질문하게 되지요.
그래서 혹 저의 설교가 어렵거나, 이해가 힘들면 한번이라도 더 볼 수 있도록, 저는 모든 설교 문을, 그대로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놓게 되었어요. (저는 제일 무서운 것이 있어요) ‘목사님, 설교를 듣고 이해가 안 돼서, 홈페이지에 올려놓으신 설교를 아무리 읽어도 그래도 이해가 안 돼요?’ (저는 이것이 제일 무서워요)
그런데 아직까지 저를 찾아와서, ‘목사님~~ 아무리 설교 문을 몇 번이고 읽어보고, 유튜브로 들어봐도, 도저히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다’ 는 분이 없으니까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직은 다행이지요.
“괜히 설교가지고, 인사 받는 그런 인생 살지 말자!” 그저 최선을 다해 어려우면 또 읽어 보고, 듣기 힘들면 또 들어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이 주신대로 열심히 전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저의 끊임없는 노력이지요.
여러분은 예외인가요? 대표기도 끝나고,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은혜 받았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내가 서기관처럼 되지 않으려면, ‘아~~ 더 잘하라는 거구나!’ 로 들으면 됩니다. 찬양하고 나서 ‘너무 좋아요’ ‘은혜 받았어요!’ 라고 하면 ‘아~~ 더 잘하라는 거구나!’ 로 들으면, 서기관 안 될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 모두다 서기관처럼 시장에서 문안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다 있다는 거예요. 서기관의 마음이 있어요. 그것을 지금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감춰있는 것을 꺼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또 한가지는, 40절 보시면, 더 심각한 부분을 이야기 하지요. ‘외식으로 길게 뭐요? 기도하는 자니’ 이것은 영적인 부분을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해요. 영적인 심각성을 말해주지요.
영적인 위선이에요. 기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요. 영적으로 신령하지 않지만, 신령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 줄 때, 무엇이 가장 위험할까요? ‘내가 기도해 보았더니, 이렇더라!’ 사실 이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어요.
하나님이 분명 그렇게 말씀 하실 수 있어요. 그리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조심할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당신 조심해야 해!’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영적 교만에 빠질 수 있어요. 여러분, 목사인 저도, 알면서도 직접 말하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스스로 깨달을 때 까지, 기도하며 기다릴 때도 있어요. 조심하는 것이죠. 잘못하면, 서기관처럼 영적인 위선과 교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대표적인 세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우리의 신앙 연수가 오래되면 될수록, 우리 안에 서기관의 특징들이 더 있을 수 있어요. 거룩한 척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영적인 가식에 빠질 수 있어요. 이것이 위선이에요.
이것이 서기관들에게 보이는 상징적인 ‘위선’의 모습 이예요. 그 위선이 서기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죠.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만 위선적인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위선적인 모습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어요.
2.
그렇다면 이 ‘위선’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 그것이 바로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보면, 우리는 ‘위선’과 그리고 ‘최선’ 사이에 있다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위선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최선’이라는 거예요.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데 겉과 속이 다르게 외식하는 서기관과 그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려는, 한 과부의 모습을 비교 해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서기관과 과부의 이야기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과부가 드리는 헌금을 가지고, 외식하는 서기관과 비교를 해 주세요.
(제가 헌금 이야기 하면, 알레르기 반응하시는 분 있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어요. 예수님이 과부가 드린 헌금을 가지고, 오늘 서기관의 위선을 비교하세요)
여러분, 왜? 헌금에 대한 민감한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위선’을 벗어난 과부의 ‘최선’을 말씀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헌금! 돈이 가장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너의 삶에 민감하다고 하는 것에, 너의 최선은 어디 있는가를 물어 보시는 거예요.
(저희 교회 헌금 봉투에도 적혀 있어요. 두렙돈의 은혜) 오늘 과부가 두렙 돈의 헌금을 드렸어요.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000원도 안 되는 돈의 가치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놀랍게도 이런 말씀을 하세요. 부자는 이 여인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을 텐데, 천원도 안 되는 헌금을 하는 이 여인을 예수님이 칭찬을 하시는 거지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예수님의 평가예요.
왜요? 예수님은 액수로 평가하신 것이 아니고, 그 연인의 소유에서의 ‘최선’을 보신 것이죠.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많이 드리는 것이 평가가 아니라, 얼 만큼 최선을 다했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민감하다고 하는 헌금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람의 최선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가장 민감한 부분인 헌금에서, 위선을 제하고, 최선을 보실 수 있다는 것이죠.
가만히 보면, 저의 성도님들 참 헌금 잘하세요. 헌금에 최선을 다해 드리는 분이 많아요. 목회자인 저의 눈에도, 어떻게 보면, 없는 것 뻔히 아는데, 최선을 다해 헌금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액수는 얼마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여줘요.(코로나로 온라인 헌금 광고 안했는데, 헌금 하시는 분)
어떤 집사님은 분명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십일조가 올라와요. 그러면 덜컹 어이쿠 해요. “하나님~ 직장이 없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까요?” 마음이 아파요. 그리고 ‘하나님 좋은 직장 주세요’. ‘벌이가 없는 가운데 그래도 한 달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십일조 예물 드리자나요’ ‘하나님, 이 예물이 과부가 드리는 두렙돈 되게 하셔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최선‘이 되어, 축복하여 주세요!!’ 여러분, 목사는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에, 왜? 최선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줄 아세요? 그것은 내가 수고하고 땀 흘려 번 돈이지만 이 모든 소유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구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한 주, 한 달을 살았다는 최소한의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는 거구요. 그리고 그 헌금에는 분명 정성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은 그 과부를 통해서, 그 최선을 보신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위선’의 삶에서 언제 해방될까요? 위선의 생활에서 우리가 언제 해방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사람의 시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집중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외식하지 않습니다.
오늘 과부는 헌금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본 거에요. 하나님만 본거에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았다면, 창피해서 거기 가서 헌금 못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내 마음 아시잖아요’ ‘저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때 위선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내 안에 저 밑에 있는 숨겨진 ‘위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하게, 우리는 오늘도 ‘위선’과 ‘최선’ 사이에 있어요. 어떻게 보면 위선의 모습이 있구요. 그 위선을 벗어버리기 위해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죠.
혹, 여러분의 신앙은 경건한 척 연기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 안에는 분명 서기관 같은 위선적인 마음과 행동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기 위해, 너는 어떤 최선을 보여 주고 있는가? 예수님이 오늘 묻고 계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겉과 속까지도 다 보세요. 우리 안에 있는 위선과 그리고 최선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조금이나마 ‘위선’을 벗어 버리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