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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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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19절-25절: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22절: 사람이 집을 떠나서 바다로 간다거나 산으로 간다고 할 때는 항상 준비가 필요하다. 그냥 나갔다가는 큰 피해를 입게 되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 산으로나 바다로 갈 때는 항상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이 준비성이 있어야 한다.
제자들이 처음 출항할 때에는 기분이 좋다. 가다가 뱃전에서 손으로 바닷물을 적셔도 보고, 바람에 맞춰서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나간다. 배를 타고 가는 이것이 마치 한 인생의 항해와 같다. 한 인생이 출생을 해서 목적지로 가다가 바람을 만날 수 있고 큰 파도를 만날 수 있고 멀미도 하고 토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끼리 고향얘기나 바다얘기 고기얘기 날씨얘기를 웃으면서 재미있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배를 타고 가면서 아무 소리도 않고 그냥 가지를 않는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을 가르쳤던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다. 예수님께 천국에 관한 얘기를 묻기도 하고 그랬으면 좋을 텐데.
예수님께서 배에서 주무셨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전도를 하시느라 얼마나 피곤했으면 배에서 주무셨을까’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예수님을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성경은 계시이므로 이 장면을 글자 그대로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면 안 된다.
피곤한 것도 여러 가지 상태가 있다. 어떤 사람은 쉬지 않고 항시 말을 한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굉장히 피곤하다. 그것도 피곤하지만 말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것도 참 피곤하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피곤했다고 하는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겠느냐? 제자들과 대화가 없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 관한 소식을 자꾸 물으면 될 텐데 대화가 없으니까 잠이 들어버렸다.
제자들이 바다 위로 가는 동안 산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이 바다 위로 스치니 물결이 일어난다. 갈릴리 바다 북쪽에는 헐몬산이 있는데 거기에서 찬바람이 내려온다. 눈이 덮여 있으면 찬바람은 아래로 내려온다. 제자들이 앞으로 갈수록 바람이 점점 세게 분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니 눈을 뜰 수가 없다. 특히 바닷물의 물보라는 눈을 잘 못 뜬다. 눈에 바닷물이 들어가면 소금물이므로 눈알이 금방 빨개진다. 물보라가 일어나면 옷이 흠뻑 젖는다. 바람이 세게 부니까 돛은 찢어지고 바닷물이 배 안에 차기 시작한다. 교대로 물을 퍼내도 소용이 없다.
‘이러다가 죽어서 물귀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소문이 나기를 엊그제도 할머니가 영감을 따라서 물에 빠져 죽었다던데 그 시체가 우리 배 밑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름이 끼친다. 세상에 물난리가 났는데도 예수님은 세상천지를 모르고 주무시고 있다. 파도가 치고 있는데 배에서 잠을 자면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자는 사람을 막 때린다. 그러면 웬만하면 일어나게 되는 건데 예수님은 그냥 주무신 모양이다. 그리고 배가 흔들리는데 따라서 몸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건데 어떻게 그렇게 주무셨을까?
제자들이 ‘우리만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선생도 죽어서 물귀신이 된다. 큰일 났다. 이럴 것이 아니라 깨우자’ 해서 예수님을 깨웠다. ‘지금 우리가 죽게 생겼습니다. 빨리 일어나십시오. 무슨 잠을 그렇게 주무십니까?’ 하고 막 흔들어 깨웠다.
이걸 24절, 25절을 참고해서 보면 살려달라고 깨운 것이 아니라 예수 당신도 죽게 생겼으니 우리와 같이 살아보자고 깨운 것이다. 잠자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깨운 것이다. 사실 글자 그대로 보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계시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이 된 것이다.
배에 물이 가득 찰 정도로 파도가 쳤으면 온 배에 물이 고이고 사람의 옷이 흠뻑 젖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얼굴도 옷도 다 젖었을 텐데 그래도 주무셨을까? 귀는 다 듣고 있으면서 거짓말로 자고 있었을까?
예수님은 주무시지만 사실은 예수님 자신은 자체적으로 광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파도와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베드로나 안드레나 요한처럼 물에 빠졌으면 예수님도 ‘어푸어푸’ 하면서 수영을 할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는 거지만 신앙의 계시가 있기 때문에 바람과 파도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시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헤엄을 치느냐, 못 치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걸 다 만들었느냐? 당신이 만들어 놓고 예를 들면 예수님이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시면서 사자를 만들었다. 그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오셔서 사자를 만나면 예수님도 ‘엄마야’ 하고 도망을 갈까? 상관이 없을까? 우리가 사자 앞에 가면 사자가 ‘어흥’ 하는 건 잡아먹는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사자 앞에 가면 사자가 ‘어흥’ 하는 것은 인사이다. ‘창조주님, 어디 가십니까? 어흥’ 하는 것이다. 만화 같은 얘기지만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주무시지만 예수 당신은 자체적으로 광풍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이시다. 바다 위로 걷는 분이시고 불속에서도 왔다 갔다 하는 분이시다. 배가 물속으로 가라앉아도 예수님은 안 빠지는 거지만 빠졌다고 해도 예수님은 바다 속에서 걸어 다닐까, 고기와 얘기를 하실까?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인지 확실하게 모른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말하자면 ‘내 말을 듣고 깨달았다면 믿음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 보라’는 것이다.
19절로 보면 누가 내 부모형제냐? 당신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당신의 부모형제라고 했다. 그래놓고 배를 타고 건너가자고 했다.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해서 배를 타고 가고 있는 것이니까 그 배에 탄 사람들은 주님의 식구들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 배에 탔다고 한다면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걱정 근심할 일이 아니다.
무엇을 깨닫고 믿었느냐? 무엇이 믿음이냐? 믿는 게 믿음이고 안 믿으면 믿음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느냐? 믿음도 믿음이 아닌 믿음이 있고 믿음이 되는 믿음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첫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믿는 것. 과거적으로 해 놓은 일, 현재적으로 하시는 일, 미래적으로 하실 일이 그대로 될 줄을 믿는 것. 그러니까 자타에게 즉, 성도와 이방세상에게, 거짓된 교회들에게 한 말씀, 우리에게 하신 말씀. 과거적으로 주님이 하신 일, 현재적으로 하시는 일, 미래적으로 하실 일을 우리는 믿는다. 믿는다고 해도 문제가 들어있고 안 믿는다고 해도 문제가 들어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오느냐? 유구무언이어늘. 그러면 쫓아내라고 했다.
두 번째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는 것. 교회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하는 건데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는 것. 세상 사람들이 과거적으로 한 말과 미래적으로 한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믿는 것. 그러니까 이건 임시성에 속한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것인데 이게 모두 그대로 된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은 참 믿음인데, 그런데 믿음이 안 되는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한 말을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믿는 것이다. 사실 이건 믿음도 안 되는 거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그러니까 제자들은 자기들을 제자 삼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을 만드신 창조자시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고, 세상역사의 진행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진행이 되고, 바람과 물도 당신이 지으셨으니 예수님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지음을 받았으면 지으신 분의 명령을 듣는 거다. 세상은 마귀의 말을 듣는 게 아니다. 이걸 잘 알아야 하겠는데 마귀가 자꾸 자기를 해코자 하니까 마귀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있다.
신령계와 물질계의 모든 존재들은 창조자의 명령에 움직인다. 바람과 파도가 마귀의 말에 순종하느냐? 계: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한다는 게 기도하다가 뜨겁고 한 그 불이다.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갯불이 아니다.
해도 달도 넘어가지 않았던 일, 해가 10도나 앞으로 간 일, 배를 높은 곳에 얹어놓는 것, 배고픈 사자들이 다니엘을 먹지 않은 일, 곰이 나와서 아이들을 찢은 일, 갈멜산에서 벼락불이 내린 일, 빵을 물고 온 까마귀, 감람나무 잎을 물고 온 비둘기, 땅이 입을 벌려서 반역자를 삼킨 일,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일 동안 삼키고 후에 토해낸 일 등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연법칙을 어겨서라도 역사를 하신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고 주님 믿는 일을 자기 발 사이의 때만큼도 못 여기느냐? 네가 그런 생각을 가졌느냐?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그렇게 여기실 날이 오게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각종 여러 가지의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보았고, 죽은 자를 살리심도 보았고, 많은 이적을 행하심도 보았고, 하늘나라의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도 예수님을 잘 몰랐다. 오늘날 우리들을 그만큼 교육을 시켰으면 제자들보다 더 잘 알까? 아니다. 더 못했으면 못했지.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신 분이 제자들의 죽고 사는 문제는 책임을 지고 있다. 바람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을 당신이 아신다. 안다는 것은 당신이 일으켰다는 것이다. 당신의 명령에 의해서 다 움직이는 거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을 지고 있으니 안 죽고 도착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배가 뒤집어져도, 배에 물이 가득 차도 제자들은 안 죽고 도착한다는 것은 전제가 돼 있는 것인데 제자들은 이걸 모르고 있다. 물에 빠져도 안 죽고 도착한다는 것, 배가 파선이 돼도 안 죽고 도착한다는 것, 물속에서 걸어가더라도 안 죽고 도착한다는 것. 그러니까 안 죽는 것은 보장이 돼 있는 거다. 이게 믿어지느냐?
그런데 왜 두려워하고 왜 벌벌 떠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안 믿는 신앙이거나 자기 마음대로 했거나이다.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앞으로 나가는데 죽게 생겼다고 호들갑을 떤 자신들이 부끄러울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을 경험을 했으니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이제는 두렵지 않다고 다짐을 할까? 그리고 바람도 안 불고 파도도 안 일어나고 평안하게 조용하게 갈 것을 믿으면 안 될까?
그러면 그 풍랑 파도가 일어난 것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일어난 것이냐? 믿음이 있든 없던 그 일을 일어나게 돼 있다. 그러나 안 죽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해서 나가는 것이니 이는 당신의 말씀을 붙잡고 본토 일가친척 집을 떠나서 가는 아브라함과 같은 거다. 그런데 그게 안 믿어지니 문제다. 안 믿어지니 주일도 빼먹고 돌아다니고 하는 거다.
예수 잘 믿으면 편안하게 간다는 사고방식은 버려라. 반드시 여기에는 시련 연단의 사건 환경이 있는 것이다. 왜 그러냐? 일학년에서 이학년으로 올려주려면 시험이 있어야 한다. 자꾸 어려운 시험을 겪으면서 올라가야 한다. 또 하나는 시험이 있어야 공부를 하듯이 준비시켜 주려고 시험이 있는 거다. 그래서 평소에 시험이 있는 것을 아는 학생은 시험 친 그 뒷날부터 또 준비를 하는 거다. 공부를 잘하면 ‘시험아, 오너라’ 하게 된다. 주님에게는 우리를 위해서 처음부터 훈련과 시련과 연단의 목적의 프로그램이 각자 앞에 짜여져 있다. 그러니까 어떤 프로그램의 시험이 오더라도 그걸 이길 수 있는 준비를 자기가 해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참 아쉬운 것은 출발을 하면서 도착할 때까지 왜 예수님과 대화가 한 마디도 없었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인생을 출생해서 죽음의 선에 도달할 때까지 천국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을 텐데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죽어라고 고생만 하다가 죽음의 선을 넘을 수 있을까? 이 사실을 모르면 닥치는 환난을 겪으면서 살려달라고 졸라대다가 세상을 허무하게 살다가 죽는 거다.
배를 타고 가면서 재미있게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간다면 폭풍이 오던 태풍이 오던 파도가 일던 상관이 없는 거다. 안 죽는 것은 보장이 돼 있다. 예수님이 거기에 타고 있으니까! 그런데 오늘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갈 때 예수님과 같이 가는 걸 자기가 아느냐? 집에 가면 자기 집에 예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신지 자기가 아느냐?
이룰구원 면에서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과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거는 주님과 동행이다. 그런 정신 사상 인격 속성 면도 모른 채 자기 느낌에서 예수님과 손을 잡고 걷는다고 하면서 사람의 손을 잡듯이 하고 걸으면 예수님이 잡혀서 가는 것이냐? 어떤 분은 아침 밥상에 예수님 밥을 한 그릇 더 떠 놓는다고? 그 얼마나 미신 덩어리냐?
진리의 말씀의 재미를 잠재우면 세상 것이 가득 차게 된다. 예수님을 모르면 모르느니만큼 세상풍파에 동요될 수밖에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 아니고도 세상의 유혹과 미혹 모든 환난 풍파 근신 걱정을 이길 수 있느냐? 없다. 그러니까 다급할 때 부르지 말고 평소에 믿음준비를 잘 하자 그 말이다. 말씀을 바로 깨닫고 말씀의 사람으로 자기 속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바로 고쳐라. 이게 믿음의 사람이다.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적으로 수수관계를 가지다 보면 세상 환난 풍파는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금방 지나가 버린다. 예수님이 배에 타고 몇 마디 하더니 육지에 도착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언제 풍파가 있었더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그걸 모를 정도로 가버렸다. 있었지만 못 느낀다 그 말이다. 믿음이 좋다 그 말이다.
이제 물 밖의 육지로 나와서 바다를 건너오면서 겪은 일들을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 준다. 이것도 복음이다. 이 때 잔잔한 바다의 얘기를 해주는 것이 스릴이 있겠는지, 풍랑이 일어나서 아우성을 치고, 파도에 쓸려가는 사람을 건져내고, 옷이 젖고, 물을 먹고, 미끄러져 죽느냐 사느냐 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스릴이 있겠느냐? 그런데 제자들 중에 믿음 없는 소리를 한 제자도 있다. 그건 자기의 수치이기 때문에 자기의 그 말은 잘 안 하고 다른 사람이 실수한 것만을 말할 것이다. 가룟유다는 그 난리 통에 무엇을 붙잡고 있었을까? 돈 통을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다 놓쳐도 이것만큼은’ 하면서. ‘다 죽으면 난 이것을 가지고 간다’ 하는 생각으로.
제자들은 미래적으로 사도가 될 자들이다. 그런데 남들이 이들을 볼 때는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나온 그들이니 믿음이 있다고 보여질까, 없다고 보여질까? 바다 가운데에서 된 일은 말을 안 하고 죽을 뻔 했는데 살아왔다고 하면 믿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 사실 믿음은 개뿔도 없는 거다.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그 뜻을 지금도 그 때 그 제자들은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 열두 사도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니까 ‘아, 우리를 이런 자리로, 이런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고 우리를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겪게 했구나’ 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 즉 출생해서 천국으로 건너가자’ 하는 뜻이다. 이 순종에는 말씀을 붙잡고 가는 것인데, 가다가 옆으로 싹싹 빠지면 풍랑 파도를 안 겪을 것 같으냐? 예수님이 안 계시는데? 그 사상이 보이느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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