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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4:1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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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19362 |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부활절 셋째 주일, 2020년 4월26일
우스갯소리로,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을, 또는 지금의 아내를 배우자로 선택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상당수 사람이 ‘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똑같은 사람과의 삶을 반복하기 싫다는 뜻일 겁니다. 이 질문을 바꿔보십시오. 한평생의 삶을 끝내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고 싶습니까? 예상외로 원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인간으로 사는 삶이 재미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인생이라도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질문으로 바꿔볼까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도 비슷할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 신앙이 핵심으로 삼는 부활은 지금과 같은 방식의 삶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아니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한 붙들고 있어야 할 주제입니다. 오늘 설교 후에 이에 관해서 가족과 대화해보십시오.
엠메오 도상에서
예수 부활을 다루는 오늘 설교 본문인 눅 24:13-35절은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사흘이 지난 어느 오후에 예수를 따르면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입니다. 그들은 지난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서 이상한 이야기가 제자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 구절인 눅 24:1-12절에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힌 날은 금요일입니다. 안식일 규정으로 인하여 시신 수습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기에 절차를 마저 마치려고 안식일 후 첫날 이른 시간에 평소 예수를 가깝게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다가 예수의 시체는 못 보고 대신 천사들을 만나서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여자들은 자신들의 목격담을 열한 사도와 다른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베드로가 무덤 안을 살펴보니 여자들의 말대로 예수의 시체는 없고 시체를 쌌던 수의만 보였습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던 이 두 제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부활의 예수입니다. 두 제자는 지난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로 인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탓인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수와 이들 두 제자 사이에 대화가 이어집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빈 무덤에 관한 소문을 이야기하고, 예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선지자들의 견해를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눅 24:25, 26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예수는 이어서 모세와 여러 선지자의 글과 성경의 여러 내용을 근거로 부활의 확실성을 두 제자에게 설명했습니다. 서로 대화하면서 걷다가 목적지인 엠마오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는 길을 더 갈 듯한 낌새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여기서 하룻밤 함께 묵고 다음 날 길을 떠나는 게 좋겠다면서 예수를 붙들었습니다. 이들은 숙식이 가능한 주막집에 들어갔겠지요. 거기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입니다. 30, 31절입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깜짝 놀란 두 제자는 오던 길을 되돌아서 열한 제자와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의 한 장소로 갔습니다.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은 예수가 살아나셨으며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경험담을 전했습니다.
부활의 실체?
두 제자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 답을 저는 확실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예수가 부활하여 그들에게 나타났다는 게 대답 아니냐, 또는 대답을 모르면서 어떻게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냐, 당신에게 믿음이 부족한 거 같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이 사건의 실체를 제가 확실하게 아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예수 부활 자체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이 말하는 실증적인 방식으로는 예수 부활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화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가 이것을 치우지 않는 한 이 화분은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겁니다. 이런 논리가 실증적인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 부활은 이런 방식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궁극적인 데까지 열지 않으면 예수 부활은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에게나 받아들여질 웃기는 이야기가 됩니다.
앞에서 제가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30절과 31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31절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를 알아보는 순간에 예수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알아본 시점과 예수가 보이지 않게 된 시점 사이에 어느 정도 시차가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시차가 길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야기의 앞으로 돌아가면, 제자들은 어느 낯선 사람이 자기들과 동행하던 순간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떡을 받자 알아보게 되었고, 곧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술사의 어떤 속임수처럼 보입니다. 예수 부활이 어떤 현상인지 여러분은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본다.”라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31절은 제자의 눈이 밝아져서 부활의 예수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보려면 눈이 밝아야 합니다. 이는 1.0이나 1.2로 표기하는 시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궁극적인 대상을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꽃이 담긴 화분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화분의 존재론적 깊이를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선만으로 윤곽을 그린 그림을 보고 어른은 밀짚모자라 하지만 아이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라고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선생이 엑스트라로 출연합니다. 그는 교양강좌의 시 쓰기 강사입니다. 사과라는 주제로 시를 쓰려면 사과의 보이지 않는 깊이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학생에게 설명합니다. 벌과 햇살과 비와 안개와 벌레가 눈에 보여야만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사과의 겉모양과 맛만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엠마오를 향하던 이 두 사람은 다행히 눈이 밝아져서 부활의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순식간에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는 단순히 우리에게 보인다거나 보이지 않는다는 차원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우리가 인식할 수도 있고, 또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리학 박사라고 하더라도 영혼이 말라버린 사람은 바람과 무관하게 살지만, 일자무식 촌부라고 하더라도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바람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삽니다.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부활의 예수는 우리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하기도 합니다. 보이는 데서만 확실성을 찾으려는 사람은, 그리고 보이지 않은 건 확실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활의 예수를 볼 수 없습니다. 경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거냐, 아니라는 거냐, 딱 부러지게 말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예수 부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도 역시 아무도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인 표현으로 우리는 세계 안에서만 존재하기에 세상과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마주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느 철학자가 이런 화두를 던졌다고 합니다. “물고기들에게 물이 보일까요?” 저는 부활의 예수에게 가까이 갈 뿐이지 그 부활 현상을 여러분에게 꽃이 핀 화분을 설명하듯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어떤 위대한 신학자와 영성가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이 확실하지 않다거나 제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 전통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듯이 예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창조의 비밀과 부활의 비밀은 종말이 와야 다 나타난다고 생각하기에 인간은 살아있는 한 그것의 모든 실체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도 이미 고전 13:12절에서 지금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지만, 종말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서 보고,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알지만, 종말이 오면 온전히 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종말론적 인식을 전제하고 우리는 이제 예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의 진술에 기대서 부활의 확실성을 말하면 됩니다. 그 제자들의 진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설교자로서 최선의 태도라 생각하기에 저는 주일마다 성경 본문을 붙들고 여러분에게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저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실 줄로 믿습니다.
떡을 떼심과 예수 현현
엠마오 두 제자 이야기를 전하는 누가복음 시대는 예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이 이미 죽었을 때입니다. 아무도 부활의 예수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수 부활 경험을 자신들의 언어로 진술해야만 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 포함되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눈이 밝아져서 예수를 알아보게 된 계기는 예수가 그들에게 “떡을 축사하고 떼어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한 사도와 다른 무리에게 전할 때도 그 장면을 그대로 짚었습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더라.”
“떡을 가지사 축사하고 떼어주었다.”라는 표현은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옵니다. 네 복음서에 다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이 그 하나입니다. 마 14:19절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누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유월절 만찬을 다루는 고전 11:23, 24절을 따르면 예수는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유월절 만찬의 원래 사건을 보도하는 마 26:26절에도 똑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 ” 예수의 유월절 만찬과 초기 기독교의 성찬 예식이 예수 부활을 전하는 엠마오 제자들 이야기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들은 성찬 예식에서 부활의 예수를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인 생명 경험이 성찬 예식에서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성찬 예식은 예배와 같은 의미입니다.
성찬 예식과 예배에 평생 참여했지만, 예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해서 뭔가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거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눈이 밝아졌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눈이 어두우면 처음 장면의 엠마오 두 제자처럼 예수가 옆에서 동행하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눈이 밝아지면 후반 장면의 두 제자처럼 예수를 알아봅니다. 눈이 밝아지려면 성찬 예식과 관련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수직적인 차원으로서 “내 몸이다.”라는 문장입니다. 교회는 성찬 예식을 통해서 예수와 하나 된다고, 즉 예수가 그 자리에 함께하신다고 믿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우리는 예수의 몸과 피로 받아들입니다. “내 몸이다.”라는 말과 빵이라는 사물은 근본적인 생명의 실재(reality)를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과를 먹으면서 어떤 사람이 “나는 햇빛을 먹는다.”라고 말했다 합시다.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하면 생명의 신비에 대한 이해가 크게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몸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와 운명을 참된 구원의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그가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살아있지 않는다면 우리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찬 예식에서 예수의 임재를 느끼십니까? 거룩하다는 느낌으로 마음이 뜨겁지 않습니까? 아무런 느낌도 없고, 냉랭합니까? 여러분은 일상의 어디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며, 삶의 신비와 능력을 볼 줄 아는 눈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하나는 수평적 차원으로서 교인 상호 간의 친교입니다. 성찬에 참여한 이들은 같은 빵을 나눠서 먹고, 같은 포도주를 나눠서 마십니다. 더 많이 먹는 사람도 없고 더 적게 먹는 사람도 없이 모두 똑같이 나눠서 먹고 마십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와 자매임을 확인합니다.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격도 다르고 사회적인 위치도 다릅니다. 왠지 마음에 안 드는 ‘밉상’도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예수의 성찬에 진정한 마음으로 참여한다면 그런 차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차이가 극복되고 참된 친교가 깊어지는 자리에 부활의 예수가 함께하십니다. 그걸 알아보는 것이 바로 눈이 밝아지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함께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서,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여러분의 눈은 밝아지고 있습니까? 오히려 눈이 어두워지지는 않습니까? 젊은 교우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긴 인생길에서 영혼의 눈이 더 밝아지는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거기에 아무 관심이 없으신가요?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다른 것은 밝게 보지 못해도 부활의 예수만은 정말 밝은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밝은 눈으로,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런 삶의 길에서 저와 여러분은 도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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