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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4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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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41절-56절: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41절-42절: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1. 애타게 간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셨다? 2. 당신이 알아서 성도들을 위한 구원의 설계대로 스스로 오셨다? 간구해서 왔다? 아니면 스스로 왔다? 어느 것이 맞느냐? 스스로 왔다.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느냐? 우리교회의 신앙 정신 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강하게 믿고 들어가는 것이다. ‘누가 먼저냐’ 할 때 하나님이 먼저다. 인간이 먼저가 돼버리면,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 그 기준성이 인간의 것이 먼저 돼버리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은 아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을 성경으로 통해서 알고, 아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주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교회에 다니는 것뿐이지 똑같다. 그러니까 그건 교회에 다니는 것은 네 신앙 네 마음대로 네 주관대로 다니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과는 멀다 그 말이다. 그걸 빨리 빨리 고쳐라.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그것부터 고쳐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간다. 이걸 예수님이 알까, 모를까? 아신다. 자기의 사정을 예수님이 알까, 모를까? 안다. 그럼 왜 기도를 하느냐? 자기의 사정을 주님이 몰랐을 때 ‘주님, 내 사정은 이렇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거지 주님이 빤히 아시는데 아시는 것을 가지고 내가 기도한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느냐? 왜 기도를 하느냐? 주님이 아시는 것을 가지고 왜 기도를 하느냐?
주님이 다 아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다 아신다면 내가 죽고 사는 문제는 주님에게 달린 것이냐, 나에게 달린 것이냐? 주님이다. 그런데 왜 기도를 하느냐? 주님이 인간 자기를 만드신 고로 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신다. 나의 오각의 오감성을 만드신고로 너무나도 잘 아신다. 그런데 왜 기도를 하느냐?
기도를 해야 할 이유는, 즉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느냐? 인격자이신 주님께서 나도 인격자로 만드셨으니 그 인격자로서,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것을 찾지 못하는 그 면에 대해 마음속에서 회개를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그 외의 것은 다 아시니까. 그러면 그것마저도 당신이 알아서 채워주면 안 되느냐? 안 된다. 그 이유는 이룰구원 영능의 실력 면에서 차등성 격차성이 있기 때문에 그 면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면은 주님이 직접 해 주시는 게 아니라 내가 ‘주님, 이것이 뭡니까’ 하고 알려고 할 때 주님이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주님은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도 내가 다른 것을 붙잡고 재미있다고 늘어지고 있다면 가르쳐 주시겠느냐? 이게 인격자의 세계다. 인간에게는 억지가 안 된다. 억지로 될 것 같으면 우리의 주관성을 다 꺾어버리고 하늘나라에 올려놓으면 된다.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주님이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해하실까?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주님의 뜻, 말씀의 이치를 아는 면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서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어줄 것은 열어주고 닫을 것은 닫아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보면 세상 사는 면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생각지 못하고 무조건 자기의 소원대로 해달라고 하니 이게 이치에 맞느냐? 이치에 맞지를 않는다. 우리가 세상부모도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을 자녀들에게 골고루 준다. 내가 달란다고 해도 자식에게 다 주지를 않는다.
안 믿는 사람들은 구별하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불에 타고 썩어질 것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그건 세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리하고 똑똑해서 영원히 가고, 오래 가고, 썩지 않는 최고의 고차원적인 것을 달라고 해야 옳은 건데 예수를 믿으면서 썩는 걸 크게 많이 달라고만 하니 깨닫지를 못한 그게 어린아이의 수준과 같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거짓 종들에게 그냥 속아 넘어간다. 속기만 하나? 더 나아가 귀신을 받아 야단법석이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된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으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간다. 딸의 아버지로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오셔서 딸을 살려주기를 호소할 때 얼마나 눈물이 흐를까? 아들이 죽어간다고 하면 어떤 해석이 나올까? 아버지로서의 희망이 죽어가는 것이다. 아들이 죽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 무슨 살맛이 있겠느냐? 그러면 딸이 죽어간다고 할 때는? 딸은 사랑스럽다. 그 사랑이 죽어간다.
죽어가는 딸을 보고 아버지가 뛰어왔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막 에워쌌다. 42절에 뭐라고 하느냐? ‘무리가 옹위하더라.’ 무리가 예수님의 주위를 둘러싸 버렸다. 무리가 에워싸니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얼른 얼른 갈 수가 없다. 이 때 아버지의 심정은 무리들이 얼른 길을 티어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빨리 가서 우리 딸을 살리실 텐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모를까? 예수 당신이 늦게 가면 딸이 죽는 것을 안다. 당신은 만능의 능력자로서 확 솟아서 빨리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안 그런다.
43절-56절: 죽어가는 딸의 아버지가 나중의 딸의 결과를 안다면 아무 걱정이 안 될 것인데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 그래서 ‘우리 딸이 죽는다’ 하는 그 생각밖에 없는 거다. 무리가 옹위하는데다가 그 도중에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나타났다.
혈루는 아래로 피를 쏟는 것인데, 피가 자꾸 흐르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러니까 피는 생명의 대명사인데 피가 자꾸 빠진다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자꾸 단축된다는 의미이다. 피가 안 멈추면 얼굴이 하얘지면서 기운이 없어지고 숨쉬기도 힘들어진다. 그러니까 피를 자꾸 빼면 안 된다. 나쁜 피는 뽑아내야 된다? 말은 맞는 것 같은데 나쁜 피를 뽑아낸 것만큼 좋은 피가 들어가야 되지 않느냐? 나쁜 피를 다 뽑아내고 좋은 피가 없다고 하면 펌푸질이 되는 거냐?
해미에서 개척할 때 한 십리 되는 거리에서 한 학생이 나왔는데, 한 번 코피를 흘리면 멈추지를 않았다. 심방 가서 보니까 얼굴이 하얀데 콧구멍을 쑥으로 막아놓고 있었다. 주기도문에 대해 진지하게 두 시간 넘게 풀어서 설교를 했는데, 그의 형은 이미 믿고 있었는데 그 형이 믿는 게 못마땅해서 교회에 안 나가고 있었다. 피가 멈추지 않으니까 얼굴이 하얀데, ‘아, 이거 생명이 빠져나가는구나.’ 성경에서 깨닫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성경에 보면 혈루증 병든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았다.
무슨 생명이 빠져나가는 거냐? 물론 피가 다 빠져나가면 육신의 생명은 죽는다. 그 눈에 보이는 것은 일반계시를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그걸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서 ‘아, 이 청년이 예수를 믿으면 영의 생명이 살아나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육신이 죽어가니 육신이 죽으면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서 영의 생명을 살려보자 그 말이다. 예수님 앞으로 가자 그 말이다. 그냥 ‘교회 나가자’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어야 예수님이 계시는 거고, 하나님이 계시는 거고, 성령님이 계시는 거다. 말씀의 이치를 깨달아야 예수를 만난바가 되는 거다. 아무 교회나 가서 ‘고쳐주십시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지 말아라.
물론 급하면 교회에 뛰어갈 테지. 사형선고를 받으면 교회로 뛰어 들어갈 테지. 그 자체는 옳지만 교회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나가느냐’ 하는 면이 문제다. 왜 그런가 하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했으니까. 믿음이 들어가면 생산이 되고 사는 거다. 그 청년이 영 중생은 언제 되었는지 모르나 그러나 내가 볼 때 ‘이거 큰일났구나.’
그래, 그 청년이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왔는데, 교회에 나오면 당장 고쳐지느냐 이게 또 문제다. 물론 주님이 못하실 것은 없다. 그러나 이룰구원의 차원의 이치를 가지고 보면 이룰구원은 점차성이 들어있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던 그 정신 사상이 얼마나 단단하게 굳어졌는지 예수님은 받아들였지만 그동안 가지고 있던 그 사고방식을 바꾸기는 시일이 가는 거다. 생각을 해 봐라. 잘못된 길을 그만큼 갔으면 되돌아 나와야 하는데, 되돌아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거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아무 교회나 나갔다가 집사직분 받고 하면 그만큼 믿음이 있느냐? 아니다. 과거의 그걸 다 뽑아내야 할 경우가 있다. 그걸 뽑아내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안 나오고 대립이 되고.
그래, 몇 달이나 흘렀을까? 그동안 코피가 자주 나왔는데 어느 새 그게 서서히 멈춰지면서 이제는 잘 안 나오는 식으로 들어간다. 그러더니 완전히 고쳐졌다. 이유는 없다. 예수 믿고 나서 고쳤으니까 그걸 ‘목사가 고쳤다’ 그게 아니라 어쨌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고쳤다. 지금은 건강하고 장가가서 아기 낳고 잘 살고 있다.
그대로 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대로 죽는 거다. 이제는 믿음의 눈으로 믿음의 정신으로 보고 하나님 앞에 감사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된다. 은혜를 받았으니까 확신을 가지고. 그런데 대부분 보면 잘 모르더라. 잊어버린다는 게 참 불행이다.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불행이다.
피를 흘리면 사람이 죽는다. 지금 자기의 노력봉사, 시간 투자성 등 모든 면이 신앙 면에서 믿음이 자라는 게 아니라 딴 쪽으로 자꾸 빠져나간다면 이건 신앙 믿음이 성장이 아니다. 그러니 자기의 인격 자체가 진리 사상화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믿음생활이 되는 거지 그게 아니면 세상으로 빠져버린다. 세월과 함께 자기의 건강 시간 노력투자 한 것이 좀이 먹는다. 생김새는 콩으로 생겼지만 좀이 콩의 속을 다 파먹으니 가볍듯이 사람이 신앙 면에 좀을 먹으면 얼마나 가볍겠느냐? 영의 눈을 가지고 그 점을 잘 알아야 한다.
자기의 일생을 잘 생각해 봐라. 좀먹은 일생은 없느냐? 기가 막힌 것이다. 예수 믿은 것도 이상한데 가서 믿고, 귀신이나 받고, 사기꾼들에게 사기나 맞고 하면서 직분을 가지고 자랑을 하느냐? 어리석다. 미련하다.
피가 계속 빠진다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자꾸 단축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병을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동안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그만큼 돌아다녔다는 말이다. 그만큼 많은 시간, 많은 노력, 많은 물질을 투자를 한 것이니 그만큼 일생이 낭비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런 점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잘 봐라. 그냥 교회 다니고 그렇게 생각을 말고 제발 예수 믿는 거 어리석게 믿지 말아라. 그게 똑똑한 게 아니다. 미련한 거다. 그것이 나중에 자기에게로 다 돌아간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낫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인생이 그렇게 낭비가 되었는데도 낫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지만 이 여자의 속 타는 그 심정을 누가 알겠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자기 생애 동안의 시간 노력 물질을 투자하며 돈 벌고 밥 먹고 한 것이 이루어진 구원이 없이 다 빠져나가게 산다면 헛 산 인생이 되는 것이니, 인생의 가치를 그런 것에 두고 살 바에야 돼지가 훨씬 편하고 낫지 않느냐? 돼지가 돈을 버느냐?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생의 값어치를 따진다면 짐승들이 훨씬 낫다.
오늘날 안 믿는 사람은 주로 그런 걸 많이 따진다. 자녀를 결혼시킬 때도 그런 걸 많이 따진다. 기독교 안에서도 깨우침을 받지 못한 부모들은 여전히 그들과 똑같다. 결혼은 재산하고 하는 거냐, 사람하고 사는 거냐? 사람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문제다. 그런데 재산을 보고, 허우대를 보고, 학력을 보고 하다가 피를 본 사람이 많다. 부모가 그렇게 경험을 했으면 자녀들에게는 바로 가르쳐야 하는데 여전히 똑같이 내려가고 있다. 스스로 당하고 있으면서도 자녀들에게 똑같이 들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미련한 것이냐? 이건 망해야 한다. 그래놓고 누구에게 한을 할 거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결혼할 때 뭐가 있었느냐? 서로 결혼하는데 끼워주고 채워주고 한 게 있느냐? 물질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가난했으면 둘이서 벗고 했겠느냐? 물질 욕심적으로 말을 하려니 그렇다는 거다.
벗고 했다는 게 여러 가지 뜻이 있는 거다. 부부는 그야말로 가린 게 없구나. 그게 부부다. 그런데 지금은 부부사이에 가린 게 많다. 그러니 시험을 앉고 있는 거다. 그게 세상이다. 가려놓으면 자꾸 속이려고 하게 된다. 속이고 속이고 이게 누적이 되면 어찌 되겠느냐?
이 여자의 속 타는 심정을 누가 알겠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이제 영의 눈으로 보면 자기의 시간 노력 물질투자 자기의 생애 육신의 생명 면에서도 구원이 없이 빠져나가는 식으로 예수를 믿지 말아라. 참 안타까운 거다. 인생 헛 사는 것으로 예수 믿지 말아라. 목사님들은 이런 면에 뼈아프게 느껴야 한다. 교인들이 예수를 믿어도 헛 믿게 하고,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고도 심판 받게 만드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이 있는 것인데, 영의 눈을 가지고 볼 때 육신의 젊음 물질 건강 등 주님께서 주신 것을 구원으로 영생으로 통과되게 살지를 않고 세상에 다 빼앗기며 살았다면 이건 인생을 헛 산 것이다. 그러면 그런 인생을 헛 사는 삶을 세상 어디에 가서 고침을 받겠느냐? 정신병원? 세상에는 그런 병을 고치는 곳이 있을 수가 없다. 아무도 못 고친다.
인생 헛 사는 것은 생명이 다 빠져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가 예수 믿고 바른 깨우침을 받지 못하면 헛 사는 것이다. 이걸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아, 이 사람이 예수 헛 믿고 있구나’ 할 때 인생을 헛 사는 그것을 어디로 가서 고침을 받겠느냐? 아무 교회나 나가면 되느냐? 누구 마음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있는 곳이라야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거다. 고칠 수 있는 그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거다. 주님 앞으로 나와야 만이 자기 인생 헛 사는 것을 이제 하나님 앞에 건설적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적 인본주의의 가르침이나 이단자의 가르침이나 신비주의의 가르침이나 구복주의자의 가르침에서 인격적인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느냐? 만날 수 없다. 그런 곳에서는 세상부자를 원하지 주님과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곳에는 ‘지옥 간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이룰구원이 없다.
당시 때에 바리새인들의 교훈이나 사두개파나 헤롯당파의 가르침이 없었더냐? 있었다. 그러니 이 여자가 그런 곳에 안 간 거냐? 다 갔었다. 다 가 보았어도 낫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계시를 못 깨달으면 신앙 면에서도 자기 인생을 아무 데나 맡긴다는 말이 된다. 자기 일생을 어디에 맡기느냐? 성경대로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분명한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이 있는 건데 그 자기 인생을 어디 누구에게 맡기느냐?
자기가 세상에 사는 게 진리기준을 붙잡고 가는 게 맞는 건데 그게 아닌 세상을 붙잡고 사는 것은 미련한 인간아, 네 인생을 세상에 맡겼구나. 자기 인생을 세상에 맡기면 세상이 자기 몸을 다 이용해 먹는다. 그리고 끝 날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들어간다.
자기 일생을 아무 데나 맡길 수는 없다. 왜 그러냐? 그렇게 되면 자기의 영적 면에 생명단축인줄을 알아라. 육신과 함께 네가 죽어 들어간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로 붙잡고 진리 사상화 인격화로 들어가면 ‘육신은 후패할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게 들어있다.
속사람도 생명적으로 다 빠져나가서 죽고, 육신의 생명도 다 늙어빠져서 죽고. 기독교는 그게 아니다. 성경은 그게 아니다. 나이를 먹어서 육신은 늙어가지만 속사람은 자꾸 젊어서 나와야 한다. 그 속사람이 신령천국에서 멋있게 사는 것이다. 식물은 비가 오면 겉잎사귀는 떨어지면서 속잎이 막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 성장이 되고 꽃도 피고 하는 거다.
생명단축, 이것을 아는 성도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가 자기에게 무슨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 믿고 말씀 듣고 성경 보고 하는 걸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라.
어제 밤에 한국이 축구시합을 했는데, 딴 때는 그 시간에 성경을 봤는데 그 거 보느라고 성경을 못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날마다 볼 수 있는데 그거는 날마다 볼 수 없으니까 그 기회를 안 놓치려고 본 것이냐? 그런데 그 시간에 성경을 봤다면 뭔가를 깨달을 것인데 축구를 보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깨달을 것을 영원히 못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못 깨달았으니까 무슨 이익이 어떻게 날아간 건지를 자기는 모르는 거다. 알 리가 없다. 영의 세계는 육의 생각을 가지고는 알 리가 없는 거다. 잡혀줘도 모르는 거다.
성경에 친구가 A B C 셋이 있는데, 밤에 A 친구가 B 친구 집에 찾아가서 떡 좀 달라고 하니까 B 친구가 떡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B 친구가 C 친구 집에 떡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C 친구 집에 가서 떡 좀 달라고 하라고 하니까 A 친구가 C 친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떡 좀 달라고 하니까 안에서 ‘아이, 애 데리고 다 누웠는데’ 했지만 어쨌든 떡을 받게 되었다.
떡을 받으려면 문을 열어야 하는 건데 안에서 떡 세 덩이를 가지고 나올 때에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떡을 나도 좀 주시오’ 하면 주겠느냐, 안 주겠느냐? 준다? 누구 마음대로 주느냐? 문을 두드린 사람을 위해서 떡 세 덩이를 줘서 받아가려고 하는데 ‘아, 나도 배가 고픕니다. 나에게도 주십시오’ 하고 헐레벌떡하고 온다면 주겠느냐, 안 주겠느냐? 준다? 준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고, 신앙의 세계는 그 안의 사람과 밖의 사람과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남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말을 해도 이질이기 때문에 통하지를 않는 것이다.
떡은 그렇다고 하자. 내가 ‘돈 좀 빌려주십시오’ 하니까 상대가 나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하는데 다른 어떤 사람이 ‘나도 좀 빌려주십시오’ 한다면 빌려주겠느냐? 돈은 안 빌려준다고 하면서 떡은 빌려준다? 이치적으로 보면 그거나 그거나 같은 거다. 제 삼자가 그에게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당신 누구요?’ 안 그러겠느냐? ‘누군데 빌려달라고 하느냐’ 하게 된다. 이치가 같은 거다.
‘떡은 먹는 거니까 빌려줄 수도 있지’ 하고 생각을 하겠지만 신앙의 세계는 이치를 가지고 생각을 하는 거다. 세상사람 같으면 이치가 아닌 인간의 인정으로 생각을 하겠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인정으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인정도 아가페를 바탕에 둔 이 인정이 나와야지 아가페가 바탕이 안 된 인정은 상대에게 끌려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고 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 이치를 잘 생각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저, 목사님 인심이 고약하다’ 하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성경은 이치를 가지고 하는 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가 자기에게 무슨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지 자기가 아느냐? 이치의 말씀을 많이 들으면 그 이치가 많이 들어가서 그 살이 올라서 그 생각이 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지만 어쨌든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르다 보면 그 맛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딴 데서 비진리적인 교훈을 듣게 되면 ‘아, 이게 아닌데’ 하고 판단이 들어간다. 그런 판단이 들어가는 것은 그만큼 정신 생각에 진리이치의 살이 올랐다 그 말이다. 그 역사가 되는 걸 네가 알겠느냐? 한참 배고프고 기진맥진 했을 때 찬물에 꿀을 한 숫가락 타서 먹으면 눈이 확 뜨인다. 그런데 배부를 때 먹으면 그걸 별로 못 느낀다.
그런 욕심이나 생각이 없이 그냥 예배에 참석해서 시게를 쳐다보면서 창문을 쳐다보면서 ‘예배 끝나면 누굴 만나야 되겠는데 언제 끝나나’ 하고 있다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저 목사님은 맨 날 구원 구원 저 소리만 하네’ 하게 되면 그만 잠이 오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러 와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깨달으면 영적인 면에 고침의 역사가 있을 터인데 이런 사람은 그런 건 없다.
생각을 고친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 신비로운 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처럼 고쳐 들어가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을 고치는 게 어디에 있느냐? 이방종교에 있느냐? 밥을 많이 먹으면 생각이 고쳐지느냐? 세상을 많이 가지면 생각이 고쳐지느냐?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주님 앞에서 고쳐진다. 선악과 따먹은 그 생각으로는 무엇이 고치겠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만이 고치신다.
자기의 생각의 차원이 낮고 늘 물질로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의 차원은 아주 낮다. 생각도 좁아지고 이해타산이 늘 물질로만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은 못 쓴다. 생각이 늘 물질에 들어가 있으면 이것도 병이다. 육신의 병만 생각지 말아라. 그게 병이다. 오늘부터 기도할 때는 병이 안 들고 정말 깨끗하고 거룩하고 수준이 높은 고상한 하나님의 생각으로 자기를 고쳐달라고 하라. 몸 고치는 것보다 그것부터 빨리 고쳐 달라고 하라. 그건 주님의 역사가 있는 거다.
교인들 중에는 ‘장로기도가 있나, 없나? 찬양대가 있나, 없나? 예배당에 십자가가 있나, 없나? 생일축하를 해주나, 안 해주나? 새 신자에게 금반지를 해 주나, 안 해 주나? 점심을 주나, 안 주나? 목사가 목사처럼 생겼느냐?’ 하고 따지는 사람이 많다. 예배 때 기도로 시작을 하던, 찬송가로 시작을 하던, 막바로 설교로 들어가던, 주기도문으로 시작하고 축도로 끝나던 아니던 그 예배를 통하여 인간 자기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다.
간혹 우리교회에 한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교인도 있기는 한데 이런 사람들 대부분 보면 틀려먹었다. 교회 올 때 성경도 안 가지고 오지, 일찍 일어났으면 서울이나 자기 교회에 갈 텐데 늦게 일어났으니 갈 수도 없고, 그래서 헐레벌떡 달려온다는 게 우리교회로 왔으니 설교가 바로 들리겠느냐?
사람이 깨달으려고 생각을 해야 하고, 자기의 문제를 생각을 해야 되고, 모르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할 텐데 ‘예수 믿어 복 받읍시다’ 하면 ‘아멘’ 하는 그게 믿음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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