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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4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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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49절-56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49절에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셨다.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 회당장이 자기 딸이 살아날 것이 정말 믿어졌을까? 사람을 살게 하는 것도 죽기 전의 얘기지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살릴 수 있겠느냐? 병이 들었을 때는 죽기 전이니까 병을 고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겠으나 완전히 죽었는데 살아날 것이 과연 믿어졌을까? 문제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로 알고 믿었을까? 모르면 못 믿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에 일차적으로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었다. 하나님의 형상이나 예수님의 형상이나 그 인격 성품을 입을 수 있는 영과 육의 결합체로 지었다. 이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도록 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이것은 영원 전서부터 그 계획 설정이 들어있는 것이지 타락된 후에 다시 된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회당장이 자기 딸이 살아날 것을 그냥 믿는 것보다 인간을 지으신 원인 동기 목적을 깔고 예수님께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를 가지셨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딸이 살아날 것을 믿었다면 정말 깊이를 가진 옳은 믿음이다. 그냥 ‘우리 딸이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하는 단순히 일반사람들의 사고방식보다도 우리 입장에서는 더 깊이 있는 그걸 깔고 믿는 것.
회당장의 딸이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리는 건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살리는 건지? 그 깊이는 다른 거다. 그래야 여기서 바로 보는 것이다. 깊이를 알 때는 그만큼 성령님의 감화가 진하고 얕으면 얕게 온다. 이룰구원 차원에서는 그렇다.
51절-56절까지 다시 한 번 읽고.
부모가 놀라는 걸 보면 안 믿은 게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든다. 앞뒤로 보면 ‘살아날 것을 믿어라’ 했는데 그런데 56절에 보면 그 부모가 살아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이게 믿은 건가, 안 믿은 건가?
그러면 아이의 부모가 안 믿었다면 예수님이 그 아이를 안 살렸을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걸 알아야 한다. 아이의 부모가 안 믿었다면 ‘믿지도 않는데 내가 왜 살려줘’ 이렇게 해서 안 살렸을까, 그래도 살렸을까? 어느 쪽이냐? 그래도 살리신다. 가령 ‘부모가 안 믿어서 에이, 안 살려준다’ 하게 되면 생명운동의 주격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아이의 부모 즉,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그런데 설령 안 믿었다고 해도 예수님이 살리셨다는 것은 ‘구원운동에 있어서 누가 주격이냐’ 하는 게 들어있는 것이다. 이게 믿어지느냐? 내일 안 믿어질지라도 그 이치는 옳은 거냐?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부모를 데리고 죽은 딸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왜 아홉 제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까? 이 아홉 제자는 주님의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변화산상에 올라갈 때도 세 제자와 같이 올라갔고, 아홉 제자는? 우리가 아홉 제자 중에 하나라면 섭섭하지 않을까? 그런 건 그렇다고 하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 ‘너희들은 여기 있어라’ 하면 섭섭하지 않을까?
아홉 제자를 허락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1. 제자들을 위해서인가? 말하자면 제자들이 슬퍼서 울 것이기 때문에 그 심정을 알고 ‘너희들은 여기 있어라’ 한 것인가? 2. 통곡하는 자들을 위해서인가? 왜 그러냐 하면 방 안에 통곡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아홉 제자들이 들어오면 통곡하는 자들을 밖으로 쫓아내느라고 그들과 충돌이 일어날까봐? 3. 방이 너무 작아서 들어설 수가 없어서? 4. 평소에 아홉 제자가 예수님에게 어떻게 보였기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까? 그러니까 평소에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중요하다. 5. 죽은 자를 데려와서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할까봐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제자들을 위해서일까, 방 안에서 우는 사람들을 위해서일까, 부모를 위해서일까, 예수님을 위해서일까, 세 제를 위해서일까, 무리를 위해서일까, 우리로 깨닫게 하려는 것일까? 우리로 깨닫게 하려고. 그러면 우리는 뭘 깨달았느냐?
어쨌든 들어가서 보니까 아이를 위해서 모두가 애곡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라고 애곡을 했을까? 우는 내용 면에서 무엇이라고 애곡을 했을까? ‘나이도 창창한데 무슨 병이 들어서 죽었느냐?’ 자식이 먼저 죽으면 어머니 입장에서 ‘이 불효자식아’ 한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으니 불효가 아니냐? 산 사람들이 생각을 할 때 그렇게 생각을 한다.
또 ‘젊음이 아깝다. 그렇게 빨리 죽을 바에야 왜 태어났느냐?’ 그런 내용도 있을 수 있고, 또 ‘계속 먹어대더니 병들어 죽었느냐?’ 또 ‘아침마다 그렇게 깨워도 안 일어나더니 영영 못 일어나는구나.’ 또 ‘실연으로 죽었느냐, 약 먹고 죽었느냐?’ 또 ‘주님이나 만나보고 죽든지 말든지 하지.’
만일에 자기가 죽었다면 사람들이 울 때 무슨 생각을 하며 울어줄까? 1. ‘죽어서는 안 되는데 참 아까운 인물이다’ 그렇게 울어 주겠는지? 2. ‘잘 죽었다. 사람에게 그렇게 애먹이고 부모를 못살게 굴더니 잘 죽었다’ 하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도 ‘암, 참 잘 죽었다’ 할까?
그런데 본문은 아이를 위해서 모두 애곡을 하고 있었지만 살리는 일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함인가? 1. 울어주는 것? 2. 아니면 밤새도록 화투치고 술 먹고 웃고 떠들며 그 날을 새는 것이냐? 3. 묻어주는 것? 묻어주는 게 위하는 거다.
우리 인간들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가 있겠느냐? 위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죽어서 숨이 떨어지면 잘 썩는 곳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주는 것뿐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아이를 위하려면 울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다.
모두 애곡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니까 저희가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었다.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고, 방 안에서 애곡하는 사람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고 했는데 만일 예수님께서 아홉 제자를 데리고 방에 들어왔다면 이 아홉 제자가 어느 편을 들까? 예수님 편일까, 사람들 편일까?
또 만일 의심 많은 도마가 있었다면 죽은 딸의 코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숨을 안 쉬니까 ‘아이가 죽었는데요’ 할 것이다. 또 맥을 짚어보면서 ‘맥박도 안 뛰는데요.’ 눈을 까뒤집으면서 ‘동공도 안 움직이니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이 있을까봐 아홉 제자를 안 데리고 간 것일까? 그런 면을 생각하면 혹시 내가 예수님의 하시는 구원운동에 방해가 된 일을 없었는가?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숨을 안 쉬면 죽은 것이고 숨을 쉬면 산 것이다. 그런데 비웃은 자들이 딸을 볼 때는 죽었다. 사실 우리들이 봐도 죽은 것이고, 예수님이 봤을 때도 죽은 게 틀림이 없다. 그 증거가 뭐냐? 예수님께서 ‘죽은 게 아니라 잔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영이 떠났다가 돌아왔으니까 죽은 게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잔다고 했을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인간이 토를 달 수가 없다. 인간의 생각에는 분명히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들어가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인간이 토를 달 수가 없다. 이유를 물을 수가 없다. 당신이 알아서 하시니까. 주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의 범주 안에 들지를 않는다.
무슨 뜻으로 잔다고 했을까? 여기에는 생명의 주인이신 그 아이의 영을 만드신 예수님께서 아이의 영이 떠난 것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쉽게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들어있다. 죽은 자도 잠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쉽게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일에는 인간의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들이 자꾸 자기의 범주 안에 계획 안에 주님을 끌어들여서 신앙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 네 생각대로 들지를 않는다. 네 생각 안에 들어서 된다면 네가 계획하고 한 일이지 그건 주님이 한 게 아니다. 가령 집을 산다든지 뭘 한다든지 하는 건 안 믿는 사람도 다 인간의 계획으로 할 수 있는 거다. 물론 특별히 하나님이 뒤집어 놓으면 어쩔 수가 없는 거다. 그러나 구원운동은 오직 주님이 하시는데, 주님이 하시는 그 역사에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해 나갈 때에 주님께서 앞길을 열기도 하시고 가로막기도 하신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 면에 실력을 쌓게 하는 면으로 다 들어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주님을 위한답시고 자꾸 자기 계획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면 자기 계획으로 해서 되면 된 것이냐? 그건 네가 한 일이지 주님의 구원운동과는 관계가 없다. 아무리 사역을 크게 해도 관계가 없다. 구원의 성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 아이가 살아나서 일어나니까 그들이 놀라면서 순간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1. 방안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 봤나? 분명히 죽었다고 방에 있는 사람들이 확인했는데’ 할 것이다. 어쨌든 믿던 안 믿던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안 믿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느냐? 첫 번째는 혈루증 여자에게서 생명이 사망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두 번째는 아이를 살리는 그 면에서 부활 때 죽은 자들을 깨워서 일으키시는 것을 현재에서 미래를 끌어다 보았고, 세 번째는 현재적으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이치가 그 안에 또 들어있고, 네 번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인격적으로 접촉만 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이 되는 것을 우리는 그 장면서 보는 것이다.
이것을 다 보여주었는데도 예수 믿는 자가 이방인들처럼 요행이나 믿고 있고, ‘세상살이가 잘 됐으면’ 하며 사는 목적을 그렇게 가진다면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참 한심한 것이다. 예수님을 비웃은 그들이나, 보지 못한 아홉 제자나, 오늘날 성경을 가지고도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이나 다 마찬가지다. 결과는 사망성공이다.
멸망당할 자들은 보고도 안 믿고, 만져보고도 안 믿고, 또 예수 믿으면서 성경을 가지고도 안 믿는다. 그 사건의 장면에서 자기가 보화를 캤다면 현재에서 그건 믿어져 들어가는 거다. 자기가 수입을 본다 그 말이다. 그러나 캘 줄을 모르면 수입을 못 본다. 이를테면 산이 있다고 할 때 그 산세나 흙이 무엇으로 되어 있고, 돌이 무엇으로 되어 있고 한 것을 모르면 그 산속에 보화가 들어있다면 그걸 캐서 자기의 유익을 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경 속에 자기 수입이 들어있는 건데, 세상에 살면서도 자기 수입이 있는 건데 그걸 모르고 있고 못 캐내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천국복음 하늘나라의 복음의 일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공부만 잘 하면 할 수 있는 일이고 돈만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이냐? 사명감만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이냐? 기도해서 병만 나으면 할 수 있는 일이냐? 할 수 없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더냐? 그리고 오셔서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흔해 빠진 일을 하다가 가신 분이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일을 하고 가신 분이다. 그래서 첫째는 우리가 그 효력을 입어야 하고, 두 번째는 우리가 그 분의 일에 수종을 들어야 한다. 이게 아닌 세상에서 부자 되기만을 바라면서 예수이름으로 ‘복 복’ 하는 것은 속에 세상이 들어있는 것이지 천국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 세상축복을 가르치더냐?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시더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자기의 온전이 없다면 이는 저주의 사람이 되고 예수 믿은 효력이 없다. 예수를 믿어도 효력이 있게 믿어야지 ‘복 복’ 하면 그 복이 불에 안 타더냐? 안 뺏기는 거냐? ‘복 복’ 한다고 해서 복이 오는 거냐? ‘복 복’ 안 하면 복이 안 오는 거냐? 안 해도 그 복을 받는 거고 해도 그 복을 받는 건데,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복을 주시건 안 주시건 그 사건 그 환경에서 당신의 성품을 입어가는 이것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고 이게 기독교다. 언젠가 이 땅에서 다 떠날 것이 아니냐?
잠잔다고 할 때 밤에 다 잠을 잔다. 또 부활 때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죽은 것을 부활 때까지 잠잔다고 표현을 한다. 잠잔다고 할 때는 일어날 것을 전제를 하고 하는 말이다. 그게 항상 앞에 있는 거다. 그리고 현재 신앙 면에서 구원을 이루고 있지 못한다면 신앙이 잠잔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잠을 자는 것, 부활 때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잠을 자는 거, 현재 신앙이 활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잠잔다고 한다.
하루 일을 끝내고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고 이래야 하는 건데 밤에 잠을 자고서 일어날 시간에 안 일어난다거나 깨워도 안 일어나면 울게 되더라.
여기서 아이는 성장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아이를 예수님께서 살렸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아이에게 먹을 것을 안 주면 또 죽는다. 자라나는 신앙생명이 멈추면 그 신앙은 죽는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못 먹으면 죽는다.
죽는 것이 불쌍하냐? 몰라서 그대로 둘 것이냐? 이 상태를 못 보고 충성봉사만 시키면 되는 것이냐? 세상에서 부자만 되라고 하면 되는 것이냐?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신앙생명이 죽어가고 있고 죽은 것인데 눈으로 보이는 물질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무조건 충성봉사를 시키면 되는 것이냐? 살릴 줄은 모르고?
지금 이 장면에서 영의 눈을 뜨고 보면 자식들의 신앙이 죽어가는 건지 죽는 건지 볼 줄 알게 된다. 주일학교 교사도 그걸 알아야 하고 목사도 그걸 알아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주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될 것이 아니냐?
아이에게 예수님의 정신으로 예수님의 숨결로 숨을 쉬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아이에게 영이 돌아오듯이 예수님의 정신이 아이에게로 돌아와 예수님의 맥박으로 뛰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게 신앙 믿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다. 생명의 양식을 먹여서 자라게 해야 하고, 육의 양식을 먹이는 것은 몸을 의의 병기로 쓰이게 해서 영의 생명이 자라게 하려는 것이고. 우리의 사는 게 구원에 다 들어가 있다. 이룰구원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과 동거 동행 동사 동식하고 있다. 우리가 아이를 살리는 이 장면에서 다각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고 그 이치를 알 수가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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