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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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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30925 |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대림절 넷째 주일, 2020년 12월20일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성탄절 이야기는 대체로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어린이 주일학교의 성탄절 연극으로 안성맞춤입니다. 그중에서 어떤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인상 깊은가요? 베들레헴의 말구유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을 찾아와서 경배하고 축하한 이들이 마태복음에는 동방에서 온 점성술 박사들로, 누가복음에는 들에서 양을 키우는 목자들로 나옵니다. 마리아가 임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천사가 전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를 수태고지(annunciation)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천사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당사자인 마리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눅 1:26-38절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알겠지만 설교를 따라가기에 필요한 정도만큼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어요. 가브리엘 천사가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마리아를 찾아갑니다. 마리아는 당시에 요셉과 약혼한 상태입니다. 당시 여자들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최소 나이인 12세에서 14세에 약혼합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아직 동거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일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정식으로 동거를 시작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당신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주께서 당신과 함께하신다고 인사를 합니다. 뜻밖의 인사에 놀란 마리아에게서 가브리엘은 이어서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마리아는 약혼한 요셉과 동거하기 전이라서 아이를 낳는다는 천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사가 다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마리아 당신이 낳을 아이는 특별한 인물이라고, 당신의 사촌인 엘리사벳도 임신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이미 임신하여 여섯 달이나 되었다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못 하실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듣기에 따라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으며, 이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먼저 드는 생각은 예수님이 자연적인 남녀관계로 태어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 같군요. 오늘 이야기가 소위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가 요셉과 육체적 관계없이 임신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31절에 따르면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만 말했습니다. 지금은 약혼 기간이지만 조금 지나면 동거하게 될 겁니다.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마리아의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남자를 알지 못하지만, 조금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였다고 주장합니다. 성령이 임한다거나 친족 엘리사벳이 임신했다거나 하나님 말씀에는 능하지 못함이 없다는 말도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다만 동정녀 탄생을 암시한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동정녀 탄생에 관해서 관심이 높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중요했다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그리고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바울이 이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출생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어릴 적 이야기도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문서가 있기는 합니다.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초자연적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문서는 교회가 정경에서 엄격하게 배제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벌어진 사건이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 출생에 관한 이야기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에 근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걸 잘 이해하면 동화처럼 들리는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대화가 얼마나 근본적이고 역동적인 신앙 서사인지를 절감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서 처음 꺼낸 문장은 28절입니다. 마리아를 향해서 “은혜를 받은 자!”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평안을 빌고 주께서 마리아와 함께한다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이를 듣고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이런 인사는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이들에게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30절에서 천사는 다시 마리아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니 마리아가 아직 어리고 평범한 소녀지만 존엄한 이에게 해당하는 인사를 들을만하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은 아들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마리아가 처한 상황에서 이게 말이 될까요? 말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밑그림을 다 지우고 마리아라는 한 여자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생각해보십시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리아의 임신 사실은 일종의 스캔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면 미혼모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마 1:18절 이하에서 이 사실을 더 노골적으로 전합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문을 듣습니다. 자기와 동거하기 전인데도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책임을 묻지 않고 조용하게 파혼하는 것으로 마리아와의 관계를 마무리할 생각이었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에 의한 것이니 마리아를 데려와서 부부로 사는 걸 겁내지 말라고 설득합니다. 이런 말은 너대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에 여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헤스터 프린이 감당해야 할 수모의 운명이지 은혜는 아닙니다.
다른 한 가지는 예수의 죽음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가리켜서 참척(慘慽)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참척의 고통을 받은 여자입니다. 아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출가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삼십 대 초반의 나이에 로마 형벌인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서 그런 길을 갈 수 있었다 쳐도 어머니 마리아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 어미로서의 고통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식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살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젊어서 사형당했다고 말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앞에서 예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의 공생애에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봐도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가 은혜를 받은 자라는 말은 그녀의 몸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실행되었다는 뜻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녀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는 통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은혜의 실체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경험했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를 본문 32절과 33절이 풀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다윗의 왕위, 왕으로 다스림, 나라가 무궁하다는 표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말로 바꿔서 말해도 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요셉을 찾아간 천사가 걱정하지 말고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말하면서 태어날 아기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에게 나타났으니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지금까지의 설교 내용을 모르는 분들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은혜이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은혜로 인생을 살아가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럴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인생살이가 짜증 나기도 하겠지요. 그러다가 다시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깨닫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신앙의 연륜이 길어지면서 은혜를 더 깊이 느끼기도 하지만, 어떤 분은 은혜와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다가 아예 담을 쌓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에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받은 자의 객관적인 증거나 기준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삼자가 그걸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대신 은혜로 산다는 게 실제로 무슨 뜻인지를 마리아와 관련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마리아의 운명이 상식적으로는 은혜를 입에 담을 수 없었는데도 은혜를 받은 자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종으로서의 정체성
본문 마지막 절인 38절에서 마리아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놀라운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진술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게 무엇인지를 이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나 힘 있는 그 문장을 들어보세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자기 정체성을 종이라고 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진술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험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는 별로 인정받기 힘든 진술입니다. 사람들은 종이 아니라 주인처럼 살고 싶어 하니까요. 좋게 표현하면 주체의식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잘난 척하는 겁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잣대로 주변 사람들을 자꾸 판단하려고 합니다. 저에게도 종종 그런 경향이 보여서 조심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됩니다. 요즘처럼 SNS가 활발한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더 극성스럽게 자기를 표현합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요즘 표현으로 이런 현상을 ‘관종’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잠시 웃고 지나갈 에피소드 정도가 아니라 시대정신으로 자리를 잡으면 이 세상은 서로 마녀사냥에만 열을 올리겠지요. 현대인들에게 마리아의 여종이라는 말은 씨도 먹히지 않을 겁니다.
여종이라는 정체성은 노예근성으로 비굴하게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화염처럼 감싸는 힘을 경험했습니다. 이를 천사 가브리엘은 35절에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 ” 이 큰 능력 앞에서 마리아는 자기를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태풍을 만났습니다. 태풍이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안전한 장소에 피해 태풍이 지나기를 숨죽이고 기다릴 뿐입니다. 누가 회사 사장이고 누가 직원인지, 누가 학교 교장이고 누가 학생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태풍이 주인이지 사람이 주인은 아닙니다. 자기가 주인처럼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칠 겨를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이 임하고 높으신 이의 능력이 우리를 덮는다는 사실을 인생살이에서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이냐, 누가 임차인이고 누가 임대인이냐, 누가 갑이고 을이냐 하는 사실만 크게 보일 뿐입니다. 이런 것에 완전히 지배받는 세상이 곧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저는 과학을 주제로 하는 책을 몇 권 늘어놓고 읽는 중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자연신학』, 한스 큉의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짐 홀트의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걸을 때』입니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드는 느낌은 내가 지금 어마어마한 힘에 둘러싸여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기원과 광대함에 대해서, 수의 오묘함에 대해서, 빅뱅과 블랙홀과 역장(force field)의 존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는 밤하늘의 별이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거대한 힘을 느끼면 우리는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종이 아니라 티끌입니다. 이럴 때 정말 사소한 문제로 아웅다웅 싸우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압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연대하고, 그리고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합친 차원보다 더 높은, 궁극적인 차원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지극히 높으신 이”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의 능력을 어렴풋이라도 느낀다면 어떻게 자신을 여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기도>에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즉 그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만 나올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마리아는 이미 자신을 여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종은 주인에게 순종할 뿐입니다.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불평은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주인에 의해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구나 그 주인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은 지극히 선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순종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런 능력이 얼마나 선한지를 살필 줄 압니다. 거기에 천착하면서 살고 싶어집니다. 잃어버린 양이나 드라크마를 찾는 사람(눅 15장)의 심정으로 삽니다.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마리아를 보세요. 아들이 죽습니다. 이게 왜 하나님의 능력이며, 선한지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불행한 일들이 우리만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운명 앞에서도 하나님이 선하신 뜻이 있다고 제가 말하면 세상을 너무 안이하게 보는 걸까요? 이 세상과 삶이 얼마나 치열한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설교는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마디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마리아는 상식적으로 볼 때 가장 비참한 운명의 여자였습니다. 미혼모라는 말을 들었고, 아들을 먼저 보낸 어미로 살아야겠습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마리아를 불행한 여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복된 여자라고,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댓글 '2'
정용섭
복음서를 읽을 때는 그걸 기록한 공동체와 그 시대의 관점이 필요해요.
누가복음이 기록될 때는(기원후 80년 이후) 이미 예수 사건이, 즉 케리그마가 분명해졌을 때니까
마리아의 저 고백과 행동에는 이미 예수의 죽음이 예기(豫期)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서가 기술하는 예수의 일대기는 과거에서 인과적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겁니다.
즉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가 이해되고,
그 부활과 십자가의 빛에서 출생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 사건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아이콘(icon)이지요.
아, 마리아를 오늘밤 꿈에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제가 가브리엘 천사 역할을 하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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