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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5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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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56절-9장 1절.
8장 56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9장 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8장 56절: 놀라는 부모에게 예수님이 경계하시되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때 당시에 그 일을 본 사람들은 다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고, 그리고 이 성경이 온 세계에 퍼지는 것만큼 온 세계는 온 교회는 다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도 알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그 말을 우리도 지금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부모는 입을 다물고 있다. 다른 사람은 뭐라고 전하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부모가 입을 열면 안 된다는 말이니 이 말씀은 부모를 위해서 하신 말씀일까, 아니면 아이를 위해 주신 말씀일까? 아이 쪽으로 생각을 한다면 살아난 아이 자기는 죽었던 것을 모른다. 자고 일어난 줄로만 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만일 부모가 ‘우리 아이가 죽었었는데 예수님이란 분이 살렸다’ 하고 소문을 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1. 애곡하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죽은 줄 알고 애곡을 했는데 예수님이 ‘이 아이는 죽은 게 아니라 잔다’ 하고 ‘일어나라’ 하니까 아이가 일어났으니까 ‘그 아이는 원래 죽은 것이 아니었다’ 하고 말을 할 테니 아이의 부모가 자기 딸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 말을 우습게 여기게 될 줄도 모른다. 그래서 부모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2. “‘우리 아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고 소문을 내면 그 소문을 듣고 오는 자들이 아이에게 달려와서 ‘너 천국을 보았느냐, 지옥을 보았느냐?’ 하며 자꾸 묻는다면 얼마나 귀찮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그리고 만일 부모가 돈에 욕심을 냈다면 그 아이를 데리고 간증하러 돌아다닐 것이다.
또 부모에게 경계를 한 것은, 첫째는 부모는 아이가 죽은 것을 안다. 그래서 살아난 것을 보고 놀랐다. 예수님께서도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 왜 잔다고 하셨나? 그것은 부활 때 죽은 자들을 모두 일으키시는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자는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나중에 깨어서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므로 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당시 부모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알기 전에는 그 사실이 안 믿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을 하지 말라’고 했을 수도 있다.
두 번째는 부모가 ‘죽은 우리 아이를 예수님께서 살렸다’고 소문을 퍼뜨리면 부활의 신앙을 모르는 자들이 살려달라고 죽은 자의 송장을 파서 데려올 것이고, 길 가다가 술 먹고 죽은 자도 엎고 올 것이고, 자기 집 애완용 죽은 개도 가져와서 살려달라고 할 것이다.
세 번째는 부모가 ‘우리 아이가 자는 것을 예수님께서 깨웠다’고 자꾸 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는 아이를 깨우는 것이 무엇이 그리 신기한가’ 하면서 ‘저 사람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꾸 돌아다니면서 ‘자는 우리 아이를 깨웠다’ 하고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겠느냐?
자는 사람은 깨는 시간이 되면 자기가 일어나진다. 인간 편에서 보면 자기가 깨어 일어난 것이지만 이것을 주님의 주권섭리로 보면 주님이 깨우신 것이다. 주님이 안 깨우면 못 일어나는 거다. 설교시간에 자는 사람은 ‘내가 자고 싶다’ 해서 자는 게 아니라 마음은 안 그런데 저절로 눈이 감기는 것이다. 일어날 때는 ‘내가 일어나면 되지’ 하는 것과 반대 생각으로 ‘내가 안 자면 되지’ 하면 안 자질 텐데 마음은 그런데 왜 자꾸 잠이 오느냐?
자는 사람은 깨는 시간이 되면 알아서 일어나고, 또 약속한 시간에 못 일어나면 깨워달라고 하기도 한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신앙의 원리가 들어있다. 깨어있는 신앙이라야 잠자는 신앙을 깨울 수가 있다.
‘경계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시니, 마치 자는 자를 깨우듯이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구나. 믿고 순종만 하면 된다. 그런데 만일 자기 아이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잔다고 하니까 그 부모가 ‘우리 아이는 죽었는데 자꾸 잔다고 하네’ 하고 있다면 그게 부모로서 바른 태도가 되겠느냐?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나난 우리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 죽기 전처럼 아무렇게나 자라게 만들 수는 없다. 이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육을 먹이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부모의 옳은 태도다.
9장 1절: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기도 했고 내어 보내시기도 했는데, 부를 때는 왜 불렀느냐? 불러서 3년 동안 데리고 다니신 이유는? 그리고 내어 보낼 때 그냥 내보낸 것은 아니다. 주어서 보냈다. 제자들은 분명히 받았고.
예수님께서 주신 것과 제자들이 받은 것은 세상은 알 수가 없다. 세상에는 없는 것,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그러니까 곧,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의 것을 받은 것이지 세상의 것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걸 분명히 해야 한다. 오늘날 목사님들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니까 첫째는 모든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고, 두 번째는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믿는 것을 병이나 고치고 세상에서 부자나 살고 하는 이런 것을 받는 걸로 알고 있다. 예수님의 원 목적은 그런 게 아닌데. 하늘의 뜻을 말을 하자니 이런 저런 사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하는 사건 속에 하늘의 뜻을 담아서 보여주는 것인데 그 하늘의 뜻은 안 보이고 눈에 보이는 그것만 달랑 보는 게 큰 문제다.
능력에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차력, 마술, 작두 위로 걸어가는 것, 머리로 돌을 깨는 것 등등 그런 것을 했을 때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데, 이 하나님의 능력은 만능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병목을 못 자르는 게 아니라 그런데 쓰는 게 아니다. 만능의 능력, 창조의 능력, 심판의 능력, 인간을 온전케 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이 능력은 인간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능력이다. 신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이 볼 때 신의 능력이라고 표현을 하는 건데, 이 능력은 희랍의 신화처럼 신들끼리 겨루는 능력이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다. 질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권세는 무엇을 남보다 가진 것. 뛰어난 것을 많이 가져야 권세를 부릴 수 있다. 세상권세는 임시성이고 물질성이다. 능력은 내적으로 안으로 쌓은 축적된 것이라고 한다면 권세는 그 축적된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 권세다. 또 위임을 받아 나오는 권세도 있다. 이거는 자기 능력은 아니다.
권세는 내적으로 축적된 능력에서 실력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권세는 주권이 있고 통치 통제력 지휘권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능력과 권세는 신령천국에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다. 왜 그러냐? 임시성인고로. 신령성이 아닌고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된 구원인고로 신령천국에 다 해당이 되는 능력이요 권세다. 그런고로 이방 불신세상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모든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권세. 귀신은 사람과 관계가 있다. 자기와 관계가 있다. 성령님은 누구와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하고? 나하고? 나하고. 그러면 어느 쪽으로 관계를 짓고 싶으냐? 성령님과 관계를 짓고 싶다면 자기 속 성품이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도덕성으로 띄고 있으면 성령님과 관계가 된다. 그런데 설교시간에 잠만 자고 하면 누구와 관계가 될까? 귀신이 오게 된다.
설교시간에 첫 시간부터 계속 졸다가 예배를 끝마치면 남보다 먼저 나가는 게 참 신비스럽다. 그러고서 집에 가서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겠느냐, 나쁘겠느냐? ‘교회에서 참 잘 자고 왔다, 참 기분 좋다’ 하겠느냐? ‘집에서 테레비 본 것만도 못하고 차라리 교회에서 잘 바에야 딴 데 가서 놀다가 올 걸. 다음에 또 자느니 미리 딴 데로 가버려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안 들겠느냐?
귀신은 사람과 관계가 돼 있다. 사람이 없으면 귀신의 존재도 필요가 없다.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느냐?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사람에게 들어가고, 신앙을 가졌다고 해도 악한 마음을 품으면 귀신이 들어가게 된다.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 사람은 온전한 정신이 안 된다.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안 만들어지면 귀신들린 상태가 많아진다. 귀신은 사람의 성격과 성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썩은 시체 안에 있는 구더기를 보고 나가라고 하면 구더기들이 나가느냐? 속에 도둑질할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보고 나가라고 하면 그 마음이 나가느냐? 예수님의 명령이면 떠나갈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 곧,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신이 떠남과 동시에 사람이 온전한 정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라야 사람이 참 사람으로 옳은 정신이 된다. 그 외에는 옳은 정신이 아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살짝 건드려 봐라. 눈이 시퍼래져서 싸우려고 하고 죽이려고 한다. 그게 옳은 정신이냐? 자기 힘을 가지고 자기 주관대로 어떻게 하려고 하지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하느냐? 잘 못한다. 할 줄도 모르고.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을 그만큼 가르쳤고, 그만큼 훈련이 되었고, 예수님을 그만큼 아는 그들에게만 능력과 권세를 주시는구나. 갓 들어온 사람에게 주면 어떻게 되겠느냐?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주신 것은 아니다. 흉악범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면 어떻게 되겠느냐? 타락된 세상이지만 기술이 있는 자에게 인정서를 주는 거지 아무 것도 모르는 자에게 인정서를 주는 게 아니다. 아무나에게 주면 사회가 어지러워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바로 세운다. 이 교훈으로 하나님의 성품화로 되면 그 사람에게는 귀신이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있던 귀신도 떠나가는 교훈이다. 이게 기독교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겉으로 보이는 귀신을 내어 쫓았다고 해도 그 다음에 말씀의 사람으로 들어있어야 하는 건데 그게 아니니 귀신이 또 들어간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교훈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의 역사로 깨달음을 주어서 사람의 성격과 성질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고치게 되는데, 이게 천국복음인데 거짓과 이단자 사단 마귀의 종들은 불탈 세상 것을 자랑하고 세상 넓은 길 사망 길로 끌고 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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