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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2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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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9.4.3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영성(靈性)에 빠져들라
눅12:22~34
신학적인 해석은 아닙니다만, 한문의 ‘령靈’자를 파자(破字)하면 글자의 맨 아랫부분은 무당을 뜻하는 무당무 ‘巫’입니다. 이 글자를 다시 파자하면 위에 한 일은 하늘( ? )이고, 아래의 한 일은 (_ )은 땅입니다. 그 하늘과 땅을 잇기 위해(Ⅰ)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입구(口)자가 셋 있는데 그것은 간절한 기도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비우(雨)자가 있죠? 그건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늘의 응답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양 사람들의 영이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어떤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절박한 문제에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게 아니라 땅의 춤과 기도에 하늘이 응답하는 식으로, 하늘과 땅이 통하는 어떤 경지가 바로 [영]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분리되거나 배척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본시 통해야 하는, 일체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서구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영성이란, 하늘과 땅이 통하는 경지보다는 땅을 초월하여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가 발전하고 확장되어 가면서 그리스의 이원론적 영 이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전통이나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이런 이원론적 영 이해가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님이 비유하신 하나님나라의 비유에서 아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비유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재는 세속적인 재료들로 쓰여져 있습니다.
밭에 묻힌 보화, 그것을 발견한 장사꾼(마13:44-46)이 그 예입니다. 이들은 고상한 신앙인도 아니고 경건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보통의 사람들입니다. 신비주의자, 금욕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죠. 예수님은 그런 세상 일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약삭빠른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품 혹은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란 그것만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런 일을 그리스도인의 영성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유들로 이런 교훈을 이끌어 낸 다음에 그러므로 장사꾼이 어떻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어떻고 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은 밭일을 하면서도 횡재의 꿈이나 꾸는, 복권이나 사는 사람의, 한 건 올려 돈이나 벌려는 장사꾼의 삶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현존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의 현존 자체를 거부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세속적인 면이 있으나 보통 인간들이 살아가는 그런 열심과 세속적 꿈에 빠져드는 열정이 인생에서 소중하다는 것을 전제로 이 비유를 하시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 인고 하면, ‘인간들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을 때의 그런 몰입과 열망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인생을 그렇게만 살아서야 하겠나. 열망과 몰입을 돈버는 대만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데 써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일에 빠져들 줄 아는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일에 빠져드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그동안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영성의 삶이 분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과 오늘 설교, 우리가 이해하는 예수님의 영성이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영성은, 사람들이 이 세상일로부터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세상을 버리고 표적 없는 종교적 제시를 따르는 것), 이 세상일에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과녁이 돈과 같은 보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예수를 통해 이루려고 하셔던 그것,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성입니다.
막1:17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예수의 영성이 이 땅의 삶을 초월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낚는 일에 기술자들입니다. 그야말로 프로입니다. 그들은 고기 잡는 일에 빠져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베드로와 안드레가 게으른 어부였다면 그들은 좋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기를(세상의 이재)를 낚던 그들이 사람을 낚는 것으로 가치와 방향전환을 한 겁니다. 고기 그 기술로 사람을 낚는 것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일상과 연장되어 있는 것이지 단절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성은 그런 겁니다.
세리장 삭개오도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온갖 비난과 따돌림에도 그는 자신의 보화를 모아들이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매국적이고 탐욕적인 그였지만 예수님은 그런 성격이 방향을 바로 잡기만 하면 바르게 갈 줄 알았습니다. 예수가 그의 집에서 담화를 나누게 되었을 때 그는 평소의 열성답게 그 자리에서 그의 인생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경우입니다. 그런 얼마나 열성적인 사람이었는지, 그가 얼마나 기독교인 색출과 제거에 열성이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일에 깊이 빠져 들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보편적인 삶인 것을 그가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부정하지 않고 그걸 그대로 인정하는 가운데 방향전환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골방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 기도원에서 생기는 어떤 감흥이나 몸의 일시적 변화를 영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 불 을 가리지 않고 세상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그런 삶의 태도를 바꿔서 예수님처럼 사는 것, 예수님이 몰입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그 길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영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조금 장면을 바꿔보겠습니다. 이야기를 영성과 性의 관계로 옮겨 보렵니다. 흔히 기독교 영성은 육체적인 성 즉 에로틱과 정반대라고 말하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성을 부정적으로 혹은 영성을 헤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성어거스틴(AD354-430)의 주장에서 비롯된 이해입니다. 그는 뭐라 했냐하면, ‘성이란 오직 결혼에만 속한 것이다/성은 오직 자녀를 낳는 일에만 타당하다/그리고 성은 배우자가 즐거움을 몰라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데만 유효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게 성이고, 가급적 피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은 영성으로 가는 가장 큰 장애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버트 맥카비 브라운이라는 학자는 말하길, 인간을 이분성으로 나누지 말고 통전성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몸에 갇힌, 성에 갇힌 악한 실체가 아니라 생각하고, 싸우고, 욕망하고, 기억하고, 기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교하고, 노래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상상도 하는 하나의 통전적, 이 모든 걸 다 포함하고 있는 통째로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과 성은 반대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전체 안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실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브라운은 키에르케고르와 마틴 부버를 비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어거스틴의 이해를 따라서 성을 멀리해야 하는 괴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약혼녀인 레기나를 버립니다. 그러면서 키에르는 말하길,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걸림이 되는 레기나를 제거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이걸 보고 마틴 부버는 이렇게 논평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오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이르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레기나’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오길 원하시지 그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앞에서 우리가 나눴던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 대한, 하나님 나라를 결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삶의 방식을 떠나서 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와 동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새들을 보아라’, ‘꽃들을 보아라’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들의 생존에 얼마나 몰입하여 치열합니까? 결국 그것으로 그들은 자유롭고 아름답게 꽃피지 않습니까? 그들이 딛고 선 땅과 날고 있는 하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생존의 터 위에서, 생존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꽃들에게 땅은 부자유의 한계지만 불평하지 않습니다. 새들에게 하늘은 먹이를 수집하는 일터일 뿐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열심히 재미있게 삽니다. 닭은 알에서 나오면서부터 뒷발질을 하면서 흙을 헤치며 삽니다. 다람쥐나 토끼는 자꾸 갉아서 앞니를 닳게 해야 삽니다. 평생 하는 일이 칡뿌리 도토리 따위를 갉아먹으면서 달리는 것뿐입니다. 미꾸라지는 어떻습니까? 모래무지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단순한 일들을 통해 자연을 이롭게 하면서 어울려 창조동산을 가꾸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그렇게 살면서 자신들의 영성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비비고, 만지고, 쓰다듬고, 사랑하고, 욕망하고, 싸우고, 뺏고, 욕하고, 뒷간가고, 병들고 그러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가운데 자신이 바르게 살고, 정의롭게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도 푹 빠져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사로잡혀 있다는 확신이 들 때, 그의 영성은 깨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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