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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4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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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47절-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무릇 많이 받은 자가 있고 적게 받은 자가 있다. 활동 노력으로도 자기 수고한대로 많이 받은 자가 있고 게으르게 살았으면 게으른대로 적게 받은 자가 있다. 부모로부터 받았던 자기의 노력으로 받았던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어놓은 것을 가지고 자기 노력 것 활동으로, 또는 부모로 통해서 받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도 없고 활동을 해서 된 것도 없다면 적게 받은 것.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받는 게 절대 정확하지를 않다. 사기를 쳐서 받은 것도 있다. 이런 경우 나중에 보면 법정 앞에서 홀딱 빼앗기기도 한다. 이치대로 들어간다.
물질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받아 가졌느냐? 그렇다면 많이 찾는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의 건강 면에서 남보다 건강하냐? ‘그 건강을 어디에 썼느냐’ 하고 책임추궁이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이 찾는 것이다. 지구 땅덩어리도, 지구 안에서 사는 모든 인간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중에 자기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물질을 어떤 면으로 얼마나 가졌던 간에 ‘그걸 어디에 어떻게 썼느냐’ 하는 책임추궁이 들어가는 거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면 자녀는 받은 그 용돈을 자기 것으로 알고 쓴다. 이것저것도 사먹고 오락실에 가서도 쓰고 한다. 나중에 부모가 ‘그 돈을 어디에 썼느냐’ 하고 물을 때는 준 돈을 잘 썼으면 더 주겠다는 것도 들어있고, 헛으로 잘못 썼다면 안 주겠다는 것도 들어있다.
어른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건데 어린아이의 차원에서는 그게 자기에게는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는 게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그런 것에 대해 너무 일일이 간섭을 하면 안 된다. 왜냐? 아이가 자기가 좋다고 해서 사서 쓰다가 보니 망가지는 것도 있어야 정서적인 면에서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또 좋은 것을 사서 잃어버렸을 때 거기서도 뭔가를 느끼도록 해야지 ‘그걸 왜 잃어버렸느냐’ 하면서 두들겨 패면 안 된다. 그것도 교육이다. 그러니까 어른도 다 아이에서 자란 것이지 엄마 뱃속에서 낳자마자 하루아침에 어른이 된 건 아니다. 그러니 어른 자기가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서 적절한 교육이 들어가야 한다.
말로 되는 교육도 있고, 사서 쓰다가 그것을 잃어버려서 느끼는 교육도 있고, 밖에 나가서 얻어맞는 것도 교육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드는 것에도 교육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끼리 있었던 일에 대해 부모가 나서서 점점 일을 크게 만들어 놓으면 마음과 마음끼리 다 차단이 돼버린다. 그래서 정서적인 교육을 위해서 웬만한 것은 부모가 어느 정도는 놔둬야 한다.
지금 도시생활에서는 흙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콘크리트에서 넘어지는 것과 흙 위에서 넘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흙을 만지고 산다는 게 참 좋은 거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옷에 뭐가 조금 묻으면 엄마가 불고 털고 불고 털고 한다. 그런 애들을 보면 건강체는 아니다. 왜 그러냐? 애가 꼼짝을 못하도록 하게 하니까 그렇다. 살짝 넘어지기만 해도 큰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이건 마치 가둬놓고 키우는 것과 같은 거다.
요즘은 아파트 문화가 되면서 집이 닭집이 돼 있다. 시골에서는 문만 열면 그냥 나가서 강아지와 뛰어다니고 친구들과 뛰어다니고 하는데 지금은 그게 힘들다. 그러니 정서가 불안하다. 일반 자연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만지고 느끼고 생각을 하고 이래야 머릿속에서 자꾸 활용이 될 텐데 그게 없다. 참 슬픈 일이다. 그래서 부탁하건데 아파트 선호사상을 가지지 말아라. 예수 믿으면서 살다가 보면 초가집에도 살 수 있고 기와집에도 살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사람이 참 멋있겠다. 인간의 마음이 그럴 수가 없을까?
우리 세대 사람들은 어릴 때 시골 고향에서 놀던 추억이 그림처럼 떠오르는 게 있는데 지금 아이들은 고향이 없다. 아파트에서 무슨 정서적인 추억이 있겠느냐? 자연으로 오는 것을 충분하게 느낄 줄을 알아야 성경의 천국에 대한 것도 죽 잡아 늘어뜨려 생각할 수가 있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육성이 아니라 이 세상의 고향이라는 게 마음에 없으니까 그걸 천국까지 죽 늘어뜨려서 생각을 못하는 거다. 그러니 현실에서 물질 이해타산적으로 풍부하면 이게 그만 천국처럼 생각이 들어간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인정적인 면으로서의 그립고 따뜻하고 하는 게 희박하다.
그런데 우리 집 애들이 ‘아브라함이 천막 하나만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였듯이 우리 부모가 예수 믿는다고 이렇게 고달픈 생활을 했구나’ 하는 게 들어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부모가 고생한 이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난 예수 안 믿고,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목회하라면 안 한다’ 하면 큰일이다.
육신적으로 불과 같은 고통과 고난을 받는 것은 용광로에서 정금으로 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과정이기도 하다. 훈련소에서의 훈련도 교육적으로 보면 마찬가지다. 우리 기독자들은 그런 것을 겪은 사람도 있고, 앞으로 겪을 사람도 있는 것이니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느껴볼 때 예수 믿으면서 육신생활이 조금 내려간다고 해도 그걸 두려워하지 말아라.
인간구원 운동이란 이룰구원을 놓고 말하는 거다. 하나님 앞으로 건져 올리는 것. 하나님 앞으로 건져 올리는 것이란 인간의 속성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처럼 끌어올리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끌어올리는 게 아니다. 그냥 단순히 예배처소에 데리고 온 것만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대표적으로 말할 때 돈이나 재산인데, 이것을 가지고 구원운동에 얼마나 썼느냐? 받은 것을 흥청망청 쓰지 말아라. 그렇게 쓰느니 주님의 일에 써라. 말하자면 나중에 자기의 숨이 끊어질 때를 계산해 보든지, 아니면 일 년마다 계산해 보든지 할 때 자기가 받은 물질이 주님 쪽으로 많이 나갔는지, 아니면 자기의 먹고 마시고 유흥적으로 관광 가고 하는 데로 많이 나갔는지 자기가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나가서 돈을 벌어 와서 먹고 마시고 사는데 그 돈이 많이 나가는 건지, 아니면 아이들의 교육비로 많이 나가는 건지, 아니면 무슨 세금으로 많이 나가는 건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는 데로 돈을 쓰는 것보다 주님의 심부름을 잘하기 위해서 건강관리를 하는 데에 더 써라. 그래야 주님의 심부름을 할 수가 있다. 그래야 은혜를 받는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고 건강을 다스리는 면에 많이 신경을 써라.
자기 수준 것 돈을 써라. 벌지는 못하는데 나가는 쪽이 많으면 안 된다. 그럴 때는 쓰는 돈을 줄여라. 그게 지혜다. 그리고 자기가 놀면서도 평생을 먹을 게 있다면 놀고먹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그 면으로 다 드려라. 그게 자기의 물질을 예수님을 따르는 쪽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은혜를 받는 쪽을 염두에 두면서 시간조절을 해야 한다. 쌓아놓고 살려고 하지 말아라. 성경대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족하면 된다. 내일 살려주면 또 나가서 일을 하면 된다. 미래의 연금을 바라보고 현실을 다 놓친다면 이건 어리석다. 내일 날은 너의 날이 아니다.
앞에서는 물질 면에서의 얘기였고, 이제는 영적인 면에서 남보다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영적 이치를 많은 깨달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이룰구원에 대해서도 그만큼 심었느냐? 좋은 씨, 생명의 씨를 가졌느냐? 그렇다면 심어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다. 그런데 그 안에는 생명이 있다. 그 작은 씨를 심으니까 커서 나무가 된다. 이걸 생각한다면 누가 안 심겠느냐? 그러나 작은 씨라고 해서 이걸 우습게 보는 사람은 안 심는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심어만 놓으면 네가 그 씨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미래에 열매가 있는 거다. 그런데 보면 죽은 씨를 심고 있다. 이건 원리상 안 나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큰 포부를 심어줘도 그건 생명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본질적으로 자라는 건 아니다. 불탈 것으로 돼 들어간다.
지극히 작은 씨가 있는가 하면 지극히 적은 것에 충성하는 자가 있다. 지극히 작은 씨라고 해서 ‘이까짓 것’ 하며 내버릴 수가 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살아있는 벼 알갱이 하나를 보면 안 줍는다. 여러 개가 떨어져 있어도 안 줍는다. 그런데 그게 성경대로 생명의 씨앗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하나의 볍씨를 주워서 논바닥에 자리를 잡게 해서 심는다면 싹이 난다. 그러면 그 한 알이 떨어져서 모가 돼서 피어오르면 몇 백 배의 결실을 거둔다. 벼 한 알을 심어서 난 씨앗에서 거둔 열매를 다시 또 모두 심어서 소출을 거둔다면 얼마 안 가서 한 가마니 이상 거둘 것이다. 조 한 알이 떨어져서 나면 수백 배의 결실을 한다.
진리이치 하나에라도 목숨을 거는 자가 충성자이다. 충성이라는 의미가 피땀 흘리는 봉사심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충성이라는 거기에는 목숨을 걸었다 그 말이다.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 그 말이다. 그렇게 되면 목숨을 건 거기에서는 노력봉사는 그냥 따라오는 거다.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러나 진리 한 이치에 목숨을 걸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큰 것을 줘도 안 된다.
영적 이치를 많이 깨달았느냐? 왜 그걸 묵히고 있느냐? 우리교회 수준은 학박사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신만 제일이냐’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 보고 모든 설교를, 그 중심사상을, 말 사상 소원 목적을 다 분석할 수 있는 거다. 절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옳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옳은 것을 가지고 더 깊이 팔 수는 있는 거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대로. 그런데 안 써먹는다면 왜 이 가르침을 받으며, 왜 이 예수를 믿느냐?
어른이면 가정에 돌아가서 손자 손녀들을 앉혀놓고 성경얘기를 하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이치를 말해줄 수가 있는 거다. 평소에 예수정신으로 바로 살아서 동네사람들끼리 모이면 또 앉아서 은연중에 예수정신이 들어가게 할 수가 있다. 그냥 육덩이로 예수 믿으면서 ‘우리교회에 나오시오’ 하는 건 안 된다. 동네사람들은 자기의 못된 마음을 다 아는데 ‘우리교회에 나오시오’ 그건 안 된다.
대화중에, 사는 와중에 대화성이 들어갈 때 은근히 예수정신이 들어가는 대화가 돼야 한다. 사람을 이런 목적으로 지었다. 사람은 이렇게 사는 거다. 지혜를 주고. 이게 전도요 이게 목회자다. 평소에 부지런하지, 착실하지, 봉사심이 강하지 한다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싫어하겠느냐? 다 좋아한다.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달라고 할 것이다. 무엇을 맡았느냐? 직분을 맡았느냐? 그렇다면 그 직분을 가지고 무엇을 남겼느냐? 목사냐? 그렇다면 교인을 몇 명을 맡았느냐? 주일학교 교사면 교사, 구역장이면 구역장도 이것을 생각해 봐라. 교회에서 자기의 직분에 충성하지 못하고 자타의 이룰구원 면에서 지혜롭지 못해서 그 직분을 빼앗기는 자도 더러 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빼앗긴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사람이 자꾸 올라가야 하는 건데 보면 오래 믿어갈수록 뭔가가 목이 꼿꼿해지면서 배가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되고 누군가가 나의 좋은 점을 보고 본을 받도록 살아야 한다. 본을 보여주려고 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본심이 그렇게 들어가야 한다. 나쁜 본을 보여주면 이건 슬픈 일이다.
말하자면 세계교인들이 다 모여 있는 데서 하나님께서 나의 나쁜 점을 보시고 나를 불러서 ‘너는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 해서 ‘궁극교회에 다닙니다’ 한다면 뭐가 되겠냐? 교인이 버릇이 없으면 ‘저게 어디서 굴러먹다 왔지’ 하는 게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어느 교회 목사가 가르쳤기에 저 모양이냐’ 하는 것이니 이것은 그 교회의 목사에게 일종의 책임을 묻는 말이다.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책임추궁이 있다.
영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책임추궁이 있다. 영적인 면에서 많이 받은 자는 질적 양적으로 많이 달라고 할 것이다. 육적으로 길렀는지 영적으로 길렀는지 많이 달라고 할 것이다. ‘많이’라는 말의 의미를 꼭 양적 부피적인 것으로만 보지를 말고, 그건 전제를 하고 그 다음에 질적인 면에서 양적이다. ‘내가 이런 질을 주었는데 질적 양적으로 얼마나 불렸느냐? 생명이 있는 씨앗을 주었는데 네가 어디에 심었느냐?’ 주시는 것은 심으라고 준 것이다. 낱낱이 책임추궁을 하고 따질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너에게 건강을 주었는데 그 건강을 어디에 썼느냐?’ 하는 것도 있는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았던 개인적으로 낱낱이 따져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자기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 이해타산으로 따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것으로 이해타산적으로 사는지 자기 자신의 신앙의 질을 철두철미하게 검토해야 한다. 왜? 자기에게 책임추궁을 하고 들어올 테니까.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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