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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4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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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48절-49절: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게 받았으면 적게 찾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많이 찾는 쪽이 좋으냐, 적게 찾는 쪽이 좋으냐? 많이. 예를 들면 장사가 잘 돼서 세금을 많이 내는 게 좋으냐, 장사가 안 돼서 적게 내는 게 좋으냐? 많이 내는 게 좋다.
‘많이 받은 자에게.’ 물질을 많이 받은 자에게서 많이 찾는다고 하는 이 말의 의미가 뭐냐? 물질을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찾는다고 했으니 물질을 많이 구하는 게 좋으냐, 안 구하는 게 좋으냐? 왜 기독교인들이 물질을 많이 찾느냐?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찾는다고 했는데, 물질을 구하는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많이 드리려고 물질을 많이 구하는 것이냐, 아니면 자기가 누리고 마시고 영화롭게 살려고 구하느냐?
세상 물질 모든 것은 자기 노력 것 벌었더라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것이다. 자기가 날 때 물질을 가지고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심지어 자기의 몸도 하나님께서 만들었으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벌었으니 내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건 병적이다.
사람은 움직이지 않으면 몸에 병이 생긴다. 팔다리를 아낀다고 가만 두면 관절에 병이 온다. 너무 심하게 사용해도 문제다. 우리에게 적당히 일을 주신 것은 ‘내 건강을 위해 주셨구나’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타락된 사고방식과는 다른 거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찾는다고 하는 것을 물질적인 측면으로 알기 쉽게 얘기를 했는데, 영적 차원에서도 진리이치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찾는다. 그러면 뭘 많이 찾는 거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많이 깨달았으면 그 나에게서 뭘 찾느냐? 깨달음이 되었느냐? 깨닫는 족족 네가 실천하고 살아라. 그러면 그게 너의 믿음실력 신앙실력 영능의 실력이 돼서 네 것이 된다. 그 면을 어디 한 번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자식을 돈을 들여서 학교에 보내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쳐서 자식이 점수를 받아오면 아버지가 ‘어디 보자’ 하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라고 학비도 주고 학원도 보내고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나 보자’ 하는 것이다. 점수가 많을 것을 기대하고 보자는 것이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찾는다는 것은 이것과 같은 이치다.
교회에 얼마나 다녔느냐? 몇 년 몇 십 년을 다녔느냐? 예수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사건도 몰아붙이고 사람도 몰아붙이고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몰아붙이는 것은 사후세계를 생각하면 영능의 실력을 위해서이지만 그러나 현실의 부분 부분 면에서 보면 ‘네가 그 동안 많이 듣고 배우고 깨달았느냐? 그러면 네 실력이 얼마나 컸나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것이다.
많이 깨달았느냐? 행하라. 그게 신앙이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 발상을 가지고, 그 소원 목적을 가지고 제 마음대로 생각을 하지만 이건 아니다. 그럴 바에는 왜 성경을 배우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왜 배우느냐? 일상생활에서도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물관계 대사관계를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생각한다면 성경은 왜 배우느냐?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생각이요,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요, 그 의사성이 나에게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닮아라’ 한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조만간에 천국에 들어갈 자들인데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막힘이 없어야 하고 성도들과도 막힘이 없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사람이 바로 못 돼 놓으면 사람과의 관계성이 자꾸 막힌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상대가 어떤 마음을 품어도 그걸 뛰어넘는다. 대립을 하면 똑같은 차원이다. 교회에서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일반 생활방식을 들으려는 게 아니고 일반사람들이 사는 생활 속에 일반적인 이치가 들어있으니 그 이치를 성경에서 바로 깨달으라는 것이다.
일반이치는 아무리 길어봐야 세상 끝날까지다. 그 이치보다 신령천국 하늘나라의 이치는 영원히 가는 이치다. 그러니까 땅의 것은 아무리 좋아도 변질 변동성이 있는 것이고, 하늘나라의 것은 변질 변동성이 없는 거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이치를 갖고 와서 그걸 자기 것을 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 속에는 그 이치가 들어있다. 그 다음에는 그걸 변질시키지 말고 일반이치를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의 구원에 써먹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의 이치를 모르면 일반세상의 이치도 모르게 된다. 모르니 써먹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서도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 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깨달음에서 그 머리통은 멍청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 입장에서는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세상은 어떤 조건에 환경에 시대의 풍파 바람에 잘 살아지기도 하고 못 살아지기도 하는 것이니까 내가 부자가 되어도 그 부요를 주님을 위해서 사람에게 이용을 할 줄 알아야 되고, 가난하더라도 거기에 푹 빠지지 말고 가난 속에서 사람 됨됨이를 배우고 나와야 한다. 그게 멋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들에게 크고 작은 풍파와 환난을 보내주는 것이다.
이건 모른 채 ‘내가 싫어하는 사건은 마귀가 보내주는 거다’ 하게 되면 이단자가 된다. 이건 말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해도 은연중에 자기 속에 마귀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앉혀놓은 생각이다. 신앙이치가 그렇게 되면 결론은 예수 믿는 무당이 돼 버린다. 이렇게 되면 오만 잡귀신에게 이용되고, 거짓 종들에게 이용되고, 이단자들에게 이용되고,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이용된다. 성경에 있지 않느냐?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물을 가득 채우지 않고 ‘착하게 진실하게 살아야지’ 하고 있다면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판을 치게 된다고 하지 않더냐?
자기가 자기를 이치적으로 생각을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끄러움이 많이 드러나게 돼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못하니까 남을 보고, 세상을 보고, 환경을 보고 탓을 하는 거다. 여기에는 자기 잘못은 없다는 식이 된다. 미친 사람은 자기는 미쳤다고 안 한다. 자기의 정신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살필 줄을 모르면 어느 순간에 자기 마음속에 검은 구름이 짙어져서 사단 마귀의 시험이 들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난 다음에 무엇부터 보느냐? 거울부터 본다. 이건 다 통일이 된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치적으로 본다면 자기 마음을 보려면 성경이라는 거울로 봐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왜 성경을 안 보느냐? 성경을 보면 자기 마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리의 마음이 싹 드러나면 자기 마음속에 뭐가 묻었는지 자기 마음의 죄성을 말씀에서 깨달아 씻고 회개를 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만 나가고, 일반 사회 윤리 도덕성만 듣고 하면 그게 하나님 말씀이냐? 일반 사회적 윤리 도덕성을 들을 바에야 공자 맹자 같은 사람에게 듣지.
우리 주님은 하늘의 도다.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더라. 하늘나라를 말씀하시더라.’ 성경이라면 이게 나와야 한다.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하늘의 사람의 이치로 바로 사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나 하나님의 이해타산이나 하나님의 평가성을 성경에서 깨닫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네가 옳은 진리이치를 많이 들었다면 얼마나 만들어졌느냐? 하나님께서는 일한 양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을 찾는다. 예수를 한 달을 믿었어도, 일 년을 믿었어도, 십 년을 믿었어도, 죽을 때까지 믿었어도, 또한 집사 장로 목사라고 해도 성경을 깨닫는 것은 나중으로 치도라도 일반적인 차원으로 봐도 성격이 고쳐졌느냐, 성질이 고쳐졌느냐? 안 믿는 사람만도 못하다면 믿은 효력이 뭐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의 도로, 하나님 아버지의 도덕성으로, 신적인 도덕성으로 덧입어야 하는데 일반적인 선악과 따먹고 나온 타락되고 저주받은 이런 도덕성에도 못 미친다면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할 수가 있겠느냐?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주기도문은 늘 외우면서 세상 것을 달라고 있다면 이건 미친 것이다. 이치가, 말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 모양으로 예수를 믿으니 사람이 정신이 있는 거냐?
그러니까 남을 쳐다보고 ‘너는 이단이네 삼단이네’ 할 게 아니라 그러는 너부터 하나님 앞에 눈 멀고 헐벗고 처참한 처지임을 알아라. 다른 사람이 이단이던 백단이던 말할 필요가 없고 문제는 하나님께서 너를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니까 제자들이 자기들 귀에 들리는 소문에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세례요한이라 하더이다’ 라고 했다. ‘들리는 소문은 그렇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니까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했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 신앙 속에서 이런 증언이 나올 수 있겠느냐?
세상은 남의 소문만 듣고 말을 잘 한다. 그러나 남의 소문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을 만났다면, 그 교훈을 만났다면 너는 주님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이 나와야 한다. 원래 베드로의 신앙은 그게 아니지만 우리로 깨닫게 하려고 성령님으로 그렇게 말을 하게 한 것이다.
49절: ‘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 초림 때에 성육신으로 계시면서 던지는 불, 예수님 재림 때에 심판으로 오시면서 던지는 불. 두 불의 성질이 전혀 다르다. 예수님 성육신으로 초림 때 던지는 불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불, 열심이다. 그 다음에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는 불, 교훈. 주님의 교훈. 그 다음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을 자를 위해 이뤄놓는 불.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의 그 뜨거움이 불이다.
불이라 하면 지옥불로만 생각하지 말아라. 물이라 할 때도 은혜의 물도 있다. 그래서 성경구절의 단어의 뜻만 가지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면 안 된다. 성경에 보면 양이 새끼양도 있고, 어린양도 있다. 한국말로는 새끼양이나 어린양이나 똑같다. 원어도 똑같다. 그런데 왜 새끼양이라고 했으며, 왜 어린양이라고 했는지? 문제는 그 새끼양 어린양이 어디서 나오느냐가 문제다. 쉽게 말하면 땅에서 나오느냐, 바다에서 나오느냐? 다른 말로는 안 믿는 세상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거짓 종들의 속에서 그 새끼양이 나오는 건지 그 출처를 알아야 한다.
비유를 들자면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하는데, 그 어린양은 어디로부터 온 거냐?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무엇이든지 하늘로부터가 아니란다면,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이나 판단 평가성이나 도덕성이 하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땅의 사고방식 이해타산 땅에 불이 붙은 소원 목적으로 세상 것으로 들어간다면 그건 목사라고 해도 어린양이 아닌 새끼양이다.
성경을 못 보고, 성경을 안 보고, 성경으로 안 깨달으려고 하고 남의 소리만 듣고 이상한 말을 하면 안 된다. 그 예로 노아가 술을 먹고 옷을 벗는 게 좋아서 벗은 거냐, 술을 먹어서 덥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벗은 거냐? 사람들이 웃옷을 벗을 때는 더워서 벗는 것이다.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니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봤는데, 아버지의 하체를 아들이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일이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술을 먹고 취해서 옷을 벗었어도, 그걸 또 함이 봤다고 해도 그게 지옥 갈 범죄성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성경에 아버지의 후처를 범하면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와서 하체라고 하면 죄다 거기에 붙여서 말을 하면 말도 안 되는 해괴한 해석이 된다. 왜 성경에도 없는 말을 꾸며대느냐?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사, 천국복음,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마음을 말하면서 내 마음도 그렇게 되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건 다 집어넣고 세상을 달라고 기도를 하느냐? 이건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그런 사람처럼 성경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격이다. 기도로 세상을 달라고 안 한 안 믿는 사람들이 왜 자기보다 부자로 사는 것이냐?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 어디에? 목조건물을 불태우러 왔느냐, 아니면 우리 마음에 불을 던지러 오셨느냐? 어디에 불을 던지러 오셨느냐? 우리의 마음에. 기도하다가 등이 뜨겁고 가슴이 뜨거운 것은 예수님이 불을 던진 것이냐?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하심은 예수님께서 원하는 불이 붙여졌다는 말이냐, 안 붙여졌다는 말이냐? 안 붙여졌다는 말이다.
땅은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데, 어떤 불이 내 마음이 붙었으면 좋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이 구석 저 구석을 잘 살펴야 한다. 잘 살펴서 ‘내 마음이 무엇으로 닮아졌으면 좋겠다. 무엇으로 가득 들어있으면 좋겠다’ 해야 하겠는데, 테레비에 서양 여자들이 나오면 그걸 보고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자기 눈을 찢고, 턱뼈를 깎고 한다. 아무리 깎고 찢고 빗고 꿰매고 해도 그거는 입시성이다. 죽으면 해골로 눈구멍이 뻐끔하게 뚫리는 것밖에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마음속의 영모의 미모성을 인격적인 면에서 왜 생각을 못할까? 사람의 가치를 왜 생각을 못할까? 잘 생긴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못 생긴 것은 마귀가 만든 것이냐?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나를 만드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 앞에서 땅에 글씨를 쓴 것이 있다. 그 때 뭐라고 썼기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 물러갔을까?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 그 사건 앞뒤로 보면 알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땅 즉, 마음에다, 심비의 양심에 글씨를 쓴 것이다. 그래서 그걸 보고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한 자신들의 양심 속에서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다 도망을 간 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썼을까? 예수님께서 땅에다 글을 쓴 후에 말씀을 하신 그것이 우리에게 힌트다. 글자적으로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가 의인이냐? 너는 죄인이다’ 하는 내용으로 쓴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그런 게 있다. 동네사람들이 한참 싸울 때 서로를 향해서 각자 상대의 잘못이나 죄를 말을 할 때 내가 그 옆에서 그걸 듣고 내 마음속에 뭔가 쓱 들어오는 게 있다. ‘아 나는 남보고만 그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게 있다. 그게 주님이 자기 마음에 쓰신 것이다. 그걸 알아야 한다. 자기 죄를 깨닫게 하는 건 자기 마음 밭 땅에, 심비에 주님이 글을 쓰셨구나.
나에게 어떤 불이 붙었으면 좋겠느냐?
1. 나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붙었으면 좋겠다. 2. 나에게 고통스런 불이 붙었으면 좋겠다. 3. 나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불이 붙었으면 좋겠다. 어느 거냐? 3번의 불이 붙으면 확실히 좋다. 그 불이 안 붙는다면 어떻게 되느냐? 진노의 불이다.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나에게 외부로부터 사건 환경적으로 떨어지게 돼 있다. 그 때에 생각을 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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