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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3:2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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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3장 25절-27절: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25절: 기회의 문을 열고 닫고 하는 분이 누구냐? 주인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가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에 해당되는 찬스, 그런 기회가 있다. 이 기회를 통해서 뭘 하자는 그런 게 있는 거다. 그런데 역사의 주인공, 사건 환경과 지구를 돌리시고 역사를 돌리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기회를 주시는 게 있다. 일반역사는 항상 있는 거고 다 아는 건데, 그런데 우리의 이루는 구원의 기회는 항상 있는 기회가 있고, ‘이 순간이다’ 하는 기회도 있다. 순간의 이 기회를 내가 놓치면 다시는 그 기회는 없는 것이다.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건 주인의 마음이다. 내가 들어가고 싶다면 주인이 문을 열었을 때 얼른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문을 여는 건 당신의 주권에 있다. 그런데 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내가 아무리 열어달라고 해도 안 열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치를 바로 가져야 한다. 얼렁뚱땅이 아니다. 신앙생활에 얼렁뚱땅은 있을 수가 없다. 머뭇거리면 닫힌다. 들어가려면 쑥 들어가든지, 안 들어가려면 딴 데로 가버리든지. 머뭇머뭇하다가는 닫혀진다. ‘주여, 열어주소서’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건 분명히 교인이고 목사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는 동리에 들어오신 일이 있다. 그 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천국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전할 때, 또는 그 자리에서 들을 때 하나님의 의중의 단일성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좁은 길 생명 길로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집안에서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꽉 찼는데 밖에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왔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사람이 앞에 있으니 들어갈 수가 없구나. 그러니 그 사람들이 야속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인즉 무리들을 향해서 ‘누가 내 모친이고 내 형제들이냐?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자들이 형제다’ 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동생들은 쫓겨나 버렸다.
‘이 때가 기회다’ 할 때는 ‘남 먼저 내가’ 그렇게 돼야 하는 건데, 예배드리는 시간도 그런 건데 교역자들 세계에서도 보면 신학공부 시간에 꼭 시작을 한 후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자기 교회 예배시간에 교인들이 미리 와서 앉아 있어야 하고, 목사 자기는 신학공부 하는 시간에 뒤늦게 천천히 들어와서 무슨 감독자나 되는 것처럼 뒤에 앉아야 하는 거냐? 신앙의 세계는 그러는 게 아니다. 그런 목사, 그런 교인 이건 상식적으로 은혜를 못 받는 거다. 많은 교인들의 눈총이 가지는 거다. 그런 신앙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겠느냐?
‘지금은 바빠서 못 가겠다. 무엇 때문에 못 가겠다. 무엇부터 해 놓고 가겠다’ 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그 사람은 늘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나중에 찾아와서 기회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이미 늦은 거다. 그런 이치로 보면 우리교회 교인도 아니고, 내가 인도하는 신학공부에 나오는 사람도 아닌 목사나 교인이 내 설교 테이프를 보내달라는 것은 상식 이하의 사람이다. 이룰구원이라고 하는 여기에는 시간 물질 노력 봉사 희생 연관 관계성이 다 들어있는 것인데 귀로만 듣고 지식만 받는다고 해서 이룰구원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정신은 뜯어고쳐야 한다.
자기 일을 다 해 놓고, 세상일을 다 해 놓고 주님과 관계성을 갖겠다는 것은 기회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 사고발상이 그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기회는 안 열린다. 기회는 주님이 만들어주는 거다. 순교를 하는 기회도 주님이 순교의 사건을 만들어줘야 되는 거다. 내가 순교하고 싶다? 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중심을 아는 분은 주님이시다. 순교의 사건이 주어지던 아니던 평소 늘 순 생애로 사는 사람은 순교의 사건이 오면 순교가 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순교의 사건을 늘 보내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은 늘 그런 각오는 하고 믿어야 한다.
밥 잘 먹고 세상에서 부자로 살겠다는 그런 자는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안 불렀다. 이건 완전히 사단 마귀의 종이요 마귀의 교회가 된다. 이건 성경말씀의 이치와는 전혀 무관한 예수를 믿고 있는 거다. 이건 자기 식으로 믿는 거다.
예수 믿는 것을 내 주관성을 가지고 믿는다면 이건 신념성이고, ‘예수를 믿는다’ 할 때는 ‘내가 당신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게 말씀대로 믿는 거다. 당신의 교훈은 지혜 있고 총명 있고 명철하고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들어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의사와 말씀대로 못 따를 이유가 없는 거다. 그런데 왜 그렇게 변명이 많으냐? 이건 그 발상 자체가 못 쓴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앉아있어도 진리역사는 안 들어가고 자기 식대로 믿다가 가는 수밖에 없는 거다.
자기의 세상적인 목표를 세워놓고 그걸 이뤄달라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런 사고방식의 신앙은 이방 우상을 섬기는 신앙자와 같은 거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런 정신 사상을 가지고 믿는다면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거냐? 안 믿는 사람과 차원이 같다.
분초찰나 순간마다 주님과의 의사단일인데 이걸 모르고 주님과의 관계성을 사역적으로 갖겠다는 것은 이미 기회가 지나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꾸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물질을 가지고 주님과 같은 레벨에서 종교적인 사역을 하겠다고 하니 이 사람에게는 깨닫는 기회는 없다. 신령천국도 당신의 것이요, 물질세계도 당신의 것인데 주님이 뭘 못해서 그런 사람을 불러서 시키겠느냐? 종교적 사역적 목적성을 가지고는 좁은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가는 사고가 벌써 넓은 문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유형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전부 좁은 문 생명 길로 들어갔다고 보느냐? 아니다. 바리새교인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갔느냐, 넓은 문으로 들어갔느냐? 세상 넓은 문으로 들어갔다. 세상 넓은 문, 종교 사업적 넓은 문.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들어간 게 생명 길 좁은 문 좁은 길이다. 이것이 구원의 길이다.
오늘날 지금도 교회가 세상 넓은 길로 가는 교회가 있고,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는 교회가 있다. 그러나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는 교회는 그렇게 많지를 않다. 그러니까 찾기가 힘들다. 어렵다. 좁은 문 생명 길 좁은 신앙사상 길로 가는 교인은 드물다. 희귀하다.
기독교는 타종교와 같은 그런 개념을 가진 종교가 아니다. 구원이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자기 실상화 되는 것이 자기 구원이 되는 것이요, 그 삶의 목표 그 삶의 여정이 인간의 본분이다. 그래서 전:에서 인간을 비유하면서 힘 있는 자가 굽어지기 전에, 허리뼈는 기둥을 상징한다. 또 창문에서 빛이 떨어지기 전에 즉, 눈이 어둡기 전에. 맷돌소리가 적어지기 전에 즉, 치아가 빠지기 전에. 집을 지키는 자가 흔들거리기 전에 여호와를 섬기라는 등등의 말씀이 있는 거다. 성경을 보면 재미가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의 종교생활로 안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자기가 진리 실상화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아니다. 본질에 대한 신앙의 성격 성질 성분, 질에 대한 성격과 성질 성분을 알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다. 타 교회에서는 이걸 전혀 모른다. 예수 믿고 교회만 다니고 시간만 보내면 안 된다. 우리교회에서는 그런 정신은 안 된다. 흐물흐물한 그 정신 자체가 스스로 시험이 들어가 있는 거다.
26절-27절: 지금 이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다. 어떤 착각 속에 살고 있느냐?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심은 하나님의 한 뜻인 생명 길 좁은 길로 인도를 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들의 길은 세상 길 넓은 길을 가면서 세상에 속한 것을 이뤄달라고 하는 것이다. 참 엉뚱한 일이다.
말하자면 주님은 하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이 자들은 이와는 반대적인 땅 쪽으로 간 것인데, 그러면서 그들이 왜 그걸 몰랐을까?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인간이 정상적인 일반적인 머리를 가지고 이치적으로 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다. 옳은 이치에서 정 반대로 가고 있으면서 ‘잘 믿는다.’ 넓은 길로 가면서, 소원 목적적으로 이방인들이 구하는 길로 가면서 자기는 좁은 길을 가고 있다고 하니 황당하다. 그러니 이들은 신앙의 길, 신앙의 노선분별을 못하는 거다. 정신 사상의 노선을 분별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고 귀신을 좇아주고 하니까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러 오신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천국의 신령한 예루살렘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자고 하는 뜻으로 한 것인데 이들은 그 뜻은 모른 채 세상 육적으로 알아듣고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예수를 믿고 있는 거다. 이걸 대표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속을 고쳐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가룟유다는 모양새는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가룟유다의 속뜻은 따로 있었다. 돈에 가 있었다. 돈이란 세상 대표적인 부자, 돈, 재산, 재물을 말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신앙노선, 그들의 신앙은 육의 신앙, 세상 종교적 입장으로 가고 있으면서 그런 사고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합세를 해서 자기들과 같이 먹고 마시고 고난도 겪고 고통도 당하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건 주격이 달라져 있다.
오늘날 세상 인본주의 육적으로, 옛사람 부패성적으로, 세상기준으로 믿는 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일을 도와주러 온 것으로 생각을 한다. 왜 도와주느냐? 자기들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니까 ‘그래? 그러면 내가 도와주지’ 하는 식이 돼 버렸다. 지금 이게 그 말이다.
일반사람들을 보면 구구절절이 마음이나 소원 목적이나, 또 기독교 안의 거짓된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이 한 사건 속에서 다 보여진다. 사건 모양새는 이미 지나갔으나 그 속에 들어있는 정신을 빼서 보면 오늘날 교회들이 많이 모여서 정신적으로 무슨 일을 하느냐가 다 보인다. 그게 생명길인지 사망길인지 너무나도 잘 보이는 거다.
전쟁할 때 캄캄한 밤에 보는 야시경이 있다. 반대편 적군이 자기는 몰래 숨어서 오고 있지만 아군 쪽에서 야시경으로 보면 우습지도 않다. 그런 식이다. 거짓된 종교인들, 기독교 안의 종교인들이 잘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의 열감지기로 보니까 마귀와 손을 잡고 다닌다. 교회 등에 마귀가 턱 업혀서 가는 게 훤하게 다 보인다.
자기가 종교적 세상 넓은 길로 가면서 얼마든지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인본주의 교회는 노력봉사 시간봉사를 많이 강조한다. ‘그래야 복 받는다. 축복 준다’ 하면서. 어머니가 그런 교회에서 봉사를 하려면 자녀를 기르는 집에서는 살림살이가 잘 안 된다. 그러면 애가 빗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철야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빗나가는 자기 아이가 자기 십자가로 생각을 한다. 그게 십자가냐? 아이의 그 생활태도로 ‘부모 네가 지금 어떤 길로 가고 있다’ 하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먼저 회개를 하고 바로 돌아서야 하는 거냐? 부모가 먼저 회개를 하고 바로 서야 한다.
아버지가 집에 돈 한 푼도 안 가져오지, 술만 먹고 못된 짓은 다 하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대적을 하게 된다. 세상입장에서 보면 이건 비정상이지만 이치적으로 보면 그건 정상이다. 자식에게 누가 그렇게 가르쳤느냐? 아버지가 가르친 것이다.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너도 나처럼 하라’ 그건 아닌데 아버지의 행동이 은연중에 자식에게 안 좋은 교육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 자식은 아버지보다 더 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러면 아버지는 자식을 붙잡아서 추달을 하겠지만 이건 아버지부터가 잘못돼 있는 거다. 그러니 그 자식을 보고 아버지가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 아버지가 신앙이라면 하나님 앞에 그 자식을 두고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회개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 자식이 하루아침에 돌아서느냐? 그렇지를 않다. 그 동안에 누적되고 누적된 그게 자기 살처럼 돼 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돌아서느냐?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만큼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면서 그게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인데도 진리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진리 때문의 고난은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다.
이방 종교인들을 보면 인간이 만든 신을 믿으면서 자기 신께 잘 보이려고 스스로 고행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고행을 스스로 견디고 나간다. 기독교 안에도 그런 게 많다. 어린애들이 시장에 가서 자기 장난감 안 사준다고 엄마한테 벗대고 사 줄 때까지 밥을 안 먹는 애도 있다. 그러면서 사줄 때까지 배고픈 걸 참는다. 교회 안에도 그런 식이 참 많다.
주님은 천국의 사람의 성격과 성질로, 예수님 당신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드심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건 환경도 주는 거고. 그런데 육덩이 교인들은 사건 환경을 그렇게 보지를 않고, 그러니까 그 사건 환경이 있는 동안에 자기를 살피고 바로 서야 하겠는데 그 사건 환경이 계속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주님 앞에서 바로 찾지 못하고 주워들은 건 있어서 ‘나 깨달으라고 그 사건을 주셨지’ 라고 하기는 하는데 인도자로 통해서 듣는 말씀의 이치가 ‘어떤 사건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 하는 걸 못 본다. 그러니 그런 신앙정신은 전철 간에서 지팡이를 짚고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있고, 다리 밑에 내려가도 그런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돈 구걸, 세상 구걸을 하게 된다.
우리는 구걸이 아니다. 왜냐? 목적적인 삶이 그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믿고 참 사람이 되고 하다 보니 사건 환경은 구원의 매개물이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구원은 모르고 그게 목적물로 들어가 있으니까 그걸 구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나는 너희가 어디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그렇게 할 거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못하노라’ 이 말속에 들어있는 주님의 의사성은 뭘까? 주님은 모든 걸 모를 리가 없다. 알기 때문에 ‘나를 떠나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네가 지금 어디로서 왔는지 내가 모르겠다’ 하는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바로 듣는 거냐? 자기의 출처와 소속과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그걸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기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영적인 면에서 어디서 나온 출처냐? 예수 잘 믿어 세상에서 부자가 되겠다는 사상의 출처는 어디냐? 세상이다. 그런 걸 잘 생각해야 한다. 자기 신앙의 출처, 뿌리, 그리고 소속과 입장. 이 진리를 받으면서 세상 쪽으로 뿌리를 박고 거짓교회에 다닌다면 열매가 있게 되느냐? 사람이 바로 안 되려면 무엇 하려고 이걸 듣느냐?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분명해진다. 정신이 분명해지고, 태도가 분명해지고, 하는 말 활동이 분명해진다. 왜냐? 자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런데 안 만들어지는 상태에서 어떻게 이 진리를 계속 받느냐? 그건 안 되는 거다. 네가 속는 거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또한 이방종교를 믿는 것은 세상물질에 다 들어가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신앙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만들어지는 거다. 이게 기독교다.
세상의 명예 영광 출세 때문에 예수를 믿느냐? 세상 부자 되고 싶어서 예수를 믿느냐? 만능의 능력을 받고자 예수를 믿느냐? 병 나으려고 예수를 믿느냐? 시집장가 가려고 예수를 믿느냐? 해 먹을 것도 없고 하니 용돈 벌어 쓰려고 예수를 믿는 거냐(목사가 되려는 거냐)? 심심해서 예수를 믿는 거냐? ‘이왕 죽을 것 천국이나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거냐? 모두 목사 장로를 따니 나도 한 자리 따려고 예수를 믿는 거냐? 충성봉사해서 천국 가서 큰 상을 타려고 예수를 믿는 거냐?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령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예수를 믿는 거냐? 어느 거냐?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는 것은 불의자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것 중에 어느 것이 행악자인가? 예수를 떠날 자는 어떤 자인가? ‘나는 너를 알겠노라’ 할 자는 어떤 자인가?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잘 알겠다’ 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어느 곳 어느 환경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을 해도 ‘저 놈은 도둑놈이다’로 아는 게 아니고 ‘나는 너를 안다’ 하게.
계:의 일곱 교회 중에 ‘흰 돌을 줄 터이니’ 하는 게 있다. 주님이 주시는 빛나는 돌이다. 그 흰 돌을 받은 자는 어느 장소 어느 처소 어느 환경 어느 무리 어느 시대에 있어도 그게 주님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증거물이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잘 안다. 세상에서 아이를 유괴해서 범죄 한 자들의 발목에 발찌를 채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디에 있어도 그 사람이 있는 곳이 뜬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이 말을 하심은 기독교인들이 도둑질을 했다는 말이냐?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냐? 주님이 가르칠 때 이들도 다 들었고 같이 먹었다. 그러니까 주님을 잘 아는 거다. 그런데 이들을 향해서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했으니까 이는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이 성경을 보고 ‘우리보고 하는 말이다’ 하는 걸 모른다. 그러면서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들은 자들을 향해서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라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그 자들은 순 가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게 그 말이냐?
그들은 인간기준에서 보는 것을 기준으로 가짜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거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방인들은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거짓된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다.
‘행악하는 자들아.’ 그들이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하고 사기 친 것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불쌍한 사람을 돕고 구제를 했는데 그들이 왜 행악하는 자들인가? 말이 심하지 않은가?
사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게 되면 행악자가 된다. 영적으로 자타를 영원히 죽이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영적 살인행위로 들어간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냉대를 받을 게 확실하다. 이게 마지막 날에 되어질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부분적으로 지엽적 문제나 사건으로 들어가서 그 사건에서 이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룰구원에서 이게 참 중요한 거다. 현재에서 자기에게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올 때 그 사건이 와서 너를 냉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건이 와서 너를 냉대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믿었구나’ 하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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