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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4:2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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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4장 21절-27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1절: 속히 가라고 하는 것은 정해진 시간 안에 이뤄져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내거리는 넓은 길이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길이요, 또한 큰 길로 간다고 하는 것은 큰 포부와 소원 목적을 앉고 사는 것을 말하는데, 이 길은 다 사망 길 넓은 길이다. 골목길은 생활이 낮은 사람들이 사는 길. 여기에는 세상 넓은 길로 나가려고 하는 인간 좁은 소견들이 들어있다.
가난한 자들은 대부분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노동자들이요, 병신들은 몸이 불구자들로서 자기 몸 하나 다루기도 힘든 자들이다.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다. 소경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니 구별도 분별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무엇이든 분별이 안 된다. 이런 소경에게는 무엇이 필요하냐? 진리진실한 인도자가 필요하다. 진리진실한 인도자가 아니란다면 그 소경은 전부 도둑을 맞고 만다.
자기가 구별 분별되기 전에 진리진실한 인도자의 인도를 받았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로 인도를 받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를 못하고 구별 분별을 하지 못해서 이용당하고 종교적인 사업으로 자기의 시간성, 물질투자성, 활동봉사, 노력성이 다 사망 길로 가버렸다. 그 증거는 생명적으로 속성적으로 인격과 성품적으로 하나님의 실상으로 자라나지 못한 그게 바로 증거다. 바로 너라고 하는 것이 증거다 그 말이다. 예수 믿어 부자 된 게 증거는 아니다. 부자는 안 믿는 사람도 천지다. 예수 믿으면서 물질부자가 된 것을 증거로 보는 건 믿음이 아니다. 이건 이방지식이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이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이 부자가 된 거는 마귀가 해 준 거고, 예수 믿는 자기가 부자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해 주는 거냐? 다 하나님이 하시는 거다. 먹고 마시는 일반적인 건 그만큼 하나님이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 우로지택으로 은혜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으로 내려주실 때 네가 열심히 해서 살림살이가 늘어나니까 꼭 네 주관성으로 네가 한 것으로 생각을 하는구나. 그러니까 이건 그 속에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인간의 주격적 시은성으로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사람을 무시하게 돼 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데, 물질기준을 가지고 무시한다.
소경에게는 진실한 인도자가 필요하다. 저는 자들은 길을 가기가 참 힘들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함으로 해서 양쪽 다리가 다 아픈 거다. 성한 다리는 더 아프다. 이들 전부가 빈곤하고 천하고 고통스럽고 하루하루 살기 힘든 자들이다. 먹을 것이 있어서 배를 채우면 ‘오늘 하루를 살았구나’ 하고 안심이 되지만 동시에 ‘내일은 또 어디 가서 배를 채우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이것을 영적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인생들 전부는 죄 아래 사망 아래 살면서 강한 자에게 얻어맞고, 어리석어서 속고 당하고, 게을러서 영양실조이고, 성질이 더러워서 얻어맞고, 거짓말을 해서 도망 다니고 하는 그런 장면을 다 볼 수 있다. 정말 힘들게 산다.
불법으로 부자 된 자가 편안하게 살겠는지, 정직한 가난뱅이가 마음 편히 살겠는지? 어느 쪽이 세상을 살기가 힘들겠느냐 어느 쪽이 마음이 편하고, 어느 쪽이 마음이 불안할까? 불법으로 산 부자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22절-23절: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그러니까 거기에 누가 안 온 것이냐?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늘 말하지만 ‘길’ 할 때는 사람이 다니는 길을 말함인데, 산울가라는 것은 나무를 심어서 울타리처럼 된 것이다. 이곳은 농촌지역으로, 도시에서 먼 거리에 있는 곳이다. 시내 길이 아니고 외국 이방으로 나가는 길이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신앙 본질적인 사상에서 내가 진리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정신과 사상적으로 진리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인간용어를 빌려서 쓰는 거다. 무촌 남이라도 취미적으로 의사적으로 통하면 멀리 살아도 마음이 가깝다. 부부라도 싸워서 돌아누우면 엄청나게 멀다. 가까이 있지만, 같이 밥을 먹지만 남보다 더 멀구나.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은 그 잔치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잔치가 나를 위한 잔치인줄을 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무슨 사경회나 부흥집회를 한다고 하면 교인들이 자기를 위한 잔치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딴 교회 교인이거나, 또는 교회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한다고 하니까 그 집회가 자기를 위한 잔치로 생각을 하고 ‘나도 가봐야지’ 하는 사람이 있을까? ‘가서 은혜를 받자’ 한다면 표현은 그렇지만 그 사람은 ‘아, 나를 위해서 사경회 부흥회 잔치를 여는구나’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집 주인은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왜 불러들였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도리가 있어서 이런 표현을 하신 것이다. 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였을까? 그것은 그런 자들을 영적인 면에서 건강자로 온전자로 실력 있는 능력자로 만들어서 천국복음의 일을 하게 하려고. 그러면 천국복음의 일을 아무나 하느냐? 아니다. 예를 들어서 청와대의 일을 아무나 하느냐? 안 된다. 하다못해 건강한 사람이 ‘나를 청와대를 청소하게 시켜주십시오’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주일학교 교사는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하는 거냐? 아니다. 하물며 목사가 되는 게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돈만 내면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아니다. 세상실력을 가지고 목사는 안 되는 거다. 만일 교회에서 그런다면 이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거다.
우리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교회를 가르치려면 중심 사상이 하나님 본질에 입각해서 어떤 사람이냐? 고쳐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냐, 아니면 딴 짓 할 사람이냐? 여기에는 사람이 영적 차원에서 죽고 사는 문제가 들어있는 거다. 왜 그런가 하니 성경에 보면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들을 고치고 하는 게 들어있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들은 설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들어있는 거다. 그리고 영의 눈을 가지고 보는 정신적 차원에서 고쳐지고 안 고쳐지고 하는 게 들어있고, 귀신이 나가고 안 나가고 그게 들어있다.
또한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자세나, 설교를 듣는 자세나, 자기의 마음자세가 하나님 앞에 일반적으로 모임에서 듣는 자세로는 안 된다. 그러면 자기가 당하고 만다.
앞에서 말한 그런 자들을 천국복음의 일을 하게 하고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존영자로 만들어 주고 싶어서 죄다 부른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교회는 그러지를 못한다. 왜냐? 사장족을 뽑고, 공부 많이 한 사람을 뽑아서 쓰니까. 하지만 교회에서는 일반세상적으로 잘 배우고 못 배우고 한 그 기준으로 보는 게 아니라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의 속성의 기준을 두고 세상에서 공부를 잘 했던 못 했던 어떤 환경에 처했건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 쪽으로 속성적으로 올려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세상에게 등용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손에 등용되어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 사람은 성공이다. ‘사람 많이 모였다. 적게 모였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진리사역에, 천국복음에 등용된 자라면 하나님 앞에 성공자이다. 그런데 세상은 일 많이 하고, 크게 한 이런 걸 성공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쓰레기다. 두 세 사람이 모였어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즉, 주님의 실상화로 만들어지는 그 일을 하는 곳에는 성령님이 계시는 거고, 주님이 계시는 거고, 하나님의 예정이 그 안에 있다.
24절: 전에 청했던 사람들은 미리 연락을 했기 때문에 다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다 아는 사람들에게 잔치를 하기 전에 연락을 한 것이다. 결혼식을 하려면 며칠 전에 알리느냐? 아무리 못해도 3, 4일 전에는 해야 한다.
그들이 참석을 하지 못하는 핑계를 댄 ‘밭을 산 것과, 소를 산 것과, 장가 간 것’ 등은 별로 비중이 큰일도 아니다. 말하자면 사소한 일인데 그들은 그것 때문에 주인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그들을 위한 잔치였는데 그 잔치 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집주인의 뜻을 그들은 무시한 셈이 됐다.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이 잔치가 보통 잔치가 아니다. ‘맛보지 못하리라’ 라고 했으니 딴 데서 맛볼 수 있는 잔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안 와서 못 본다’ 그 표현보다 ‘딴 데서는 보지 못하는 맛’이라는 의미다.
잔치도 세상에 속한 육의 잔치가 있고, 천국에 속한 영의 잔치가 있다. 천국에 속한 영의 잔치는 생명의 말씀잔치, 진리이치의 잔치다. 이 잔치에 오지 않은 자는 맛보지 못하고, 변명이 많은 자는 맛보지 못한다.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인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오늘날 자기는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느냐?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세상 부잣집에서 먹는 세상잔치는 아니다. 천국의 잔치를 말하는 거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잔치요, 생수의 기쁨이 솟는 잔치요, 깨달음이 솟는 잔치요, 영인성장이 힘을 얻는 잔치요,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는 잔치요, 죄와 사망의 유혹과 미혹을 이기는 잔치요,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는 것은 세상의 보통 잔치가 아님을 계시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도 해 보았지만 늘 잘 먹는 사람은 한 끼를 굶어도 허기가 지는지를 잘 모른다. 그런데 늘 굶는 사람은 귀가 늘 멍멍하다. 그런데 어느 집에서 아닌 말로 보리밥이라도 한 그릇 주어서 그걸 먹으면 귀가 멍멍한 것도 뻥 뚫린다. 영양가가 들어가니 그렇다.
늘 잘 먹으면 귀에서 기차소리도 안 난다. 그러나 늘 제대로 못 먹는 사람은 늘 그런 소리가 나게 돼 있다. 이걸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데서 비진리를 먹을 때는 귀가 꽉 막혔다. 그런 곳에서 늘 듣는 세상얘기는 다 아는 거다. 슬픈 얘기, 기쁜 얘기 그거는 누구나 다 아는 거다. 그걸 듣는다고 해서 귀가 뚫리는 게 아니다. 말씀의 이치를 먹을 때 ‘이거다’ 하고 각성적 조명적 영감이 오는 게 귀가 뚫리는 거다.
25절-27절: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게 참 힘들겠다. 왜 힘이 드느냐? 간단히 세 가지로 말하면 물질선을 초월해야 하고, 인정선을 초월해야 하고, 생명선을 초월해야 하니 어렵다. 또 왜 어려운가 하니 인류의 조상이 선악과를 먹은 후로는 모든 사람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기 때문이다. 사는 게 전부 세상이 목적적으로 들어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라도 가만 보면 물질을 가지려고 따르고, 인정을 위해서 따르고, 육신생명을 위해서 따른다. 그러니 초월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초절이 아니고 초월을 말씀하심이다. 초절은 끊는 거다. 초월은 주님을 따르다 보니 초월이 되는 거다. 완전히 끊고 간다가 아니라 주님을 붙잡고 가다가 보니 초월이 되는 거다. 초월이 된 것은 버린 게 아니다.
‘네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출발해서 모세의 인도로 약속의 땅으로 갈 때 부모가 앞서거니 자식이 앞서거니 하고 인도자를 따라서 약속 땅으로 간다. 그 때 불기둥 기름기둥이 먼저 앞서고, 그 다음 모세, 그 다음 두령들이 가는데, 그 때 자식이 먼저 간다고 해서 그 자식이 부모를 버린 거냐? 같은 길로 가는 의미다.
그러면 자식은 약속의 땅으로 말씀을 따라서 가는데 부모는 애굽에 있다면 이건 부모가 자식을 버린 거냐, 자식이 부모를 버린 거냐? 육적으로는 부모가 자식을 버린 것이고, 영적으로는 자식이 부모를 버린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부모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한 거냐? 그게 아니라 부모가 안 가려고 버티는 거다.
진리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까 사람이 진리를 따라와야 하는데, 부모는 진리를 버리고 애굽에 있고, 자식은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다면 이건 자식이 부모를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모가 자식을 버린 셈이 되는 것이다. ‘누구의 주격으로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표현이 달라진다.
그런데 ‘버려라’ 하는 건 무슨 뜻이냐? 기준을 붙잡으라는 말이다. 기준이 아닌 것을 잡으면 네가 죽고 네가 고통을 당한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자식이 안 믿는 부모를 붙잡고(의지하고) 있다면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에서 볼 때 어떻게 되는 거냐? 자식이 바른 걸 붙잡은 것이냐? 아니다. 그게 효자 효녀 같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니다.
이방 불신자들의 부모자식의 모든 사건은 누가 주관하는 거냐? 하나님이 하시는 거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성경을 깨달을 때 늘 기준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것은 소속도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본질로 돼야 하고, 자기의 신앙사상의 입장도 그렇게 서야 한다. 전부는 하나님께로 통일이다. 그게 성경이요, 그게 하나님의 자녀다.
교회가 이방세상이 구하는 것을 죽기 전에 더 열심히 더 빨리 이뤄달라고 예수님께 기도로 부르짖고 금식으로 부르짖고 구하는 판국이라면 언제 세상이 초월이 되겠느냐? 이건 그 기도가 영적으로 말하자면 소돔 고모라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건데, 그런 기도를 하면 기도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도덕성의 불감증이요 음란으로 내려가게 돼 있다.
사람이 한 번 내려가면 자꾸 내려가게 돼 있다. 그런데 올라오는 것은 힘들다. 내려가는 것은 자기 스스로 구르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할 수 있지만 올라오는 것은 힘들다. 왜냐하면 올라오기 위해서는 외부적으로부터 누군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힘이 드는 거다. 인생이 영적 면에서 한 번 굴러 떨어지면 참 힘든 거다.
교회가 기도로 설교로 세상 것을 구하게 되면 본문과는 정 반대가 된다. 이치를 깨닫게 해서 초월하게 하고, 부모형제들도 다 예수를 믿고 초월적으로 주님을 따라가게 해야 하는데 세상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건 구약의 뭣과 같은가 하니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는데 옆에서 자꾸 미녀작전이 나올 때 거기에 따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 끌려가면 그냥 죽는 거다.
그런데 왜 그런 걸 자꾸 달라고 하고, 또 그런 게 이뤄지면 자랑시키고 하느냐? 교회가 그러면 못 쓴다. 신앙이란 그런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불교인에게서 배워라. 불교인들은 그런 거 다 내버리고 올라가는 게 아니냐? 그런데 교회에서 그런 걸 달라고 하고 있으니 석가가 기독교인들을 보고 웃는다. 그래서 보면 기독교 안에 이방 종교적 사상이 많다.
우리가 구할 건 뭐냐? 예수님께서 구할 것을 기도로 가르쳐 줬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사람이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못 사는 거냐?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게 뭐냐? 그런데 못 믿고 안 믿는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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