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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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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5장 1절-7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절-2절: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음식을 같이 먹든지 말든지 바리새인과 서기관 자기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자기들이 편당을 갈라놓고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요,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를 같이 한다고 예수님께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하는 이들이 이방인들이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바리새교인들이냐? 말하자면 식사를 하는 사람이나, 예수님이나, 자기들이나 다 같은 한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의 잣대로 예수님과 또한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죄인취급을 하고 있다. 성경 액면 문자 그대로 갖다가 예수님을 죄인취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자들이 더 잘 받아들이더냐? 당시의 유대백성의 지도자들은 성경을 가지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양심에 찔리면서도 예수님을 헐뜯고 원망불평을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먼저 배웠다고, 좀 안다고 자기를 의인시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잘 하는 자들을 흉잡고 깎아내리는 자들도 있다.
만일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이 자신들이 보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자리에 앉게 된다면 자신들은 식사자리의 높은 자리에 앉고, 세리와 죄인들은 제일 낮은 자리 맨 끝에 가서 앉게 할 것이다.
식사자리도 높고 낮은 자리가 있다. 어른들을 높은 자리에 앉힌다. 높은 자리는 가운데다. 상 가운데 반찬이 있는데 나이 드신 분을 맨 끝에 앉히면 어떻게 되겠느냐? 서서 집으러 가느냐? 그리고 나이 드신 분을 식사자리에 앉게 할 때 제일 따뜻한 자리, 문을 열면 쳐다보일 수 있는 자리에 앉혀야 한다. 문 쪽에는 주로 수종을 드는 사람이 앉아야 식사 중에라도 수종을 들 수 있다. 어린이는 한 쪽으로 앉히고. 식사자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그렇다. 도덕성이 반듯해야 한다. 자기네들이 식사자리의 높은 자리에 앉는다면 예수님은 어느 쪽에 가서 앉겠느냐?
참고로 3절-7절까지를 보면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의인이라고 자칭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들이었다. 그러면 의인이 뭐냐? 의인이 의행을 하는 것이냐, 악인이 의행을 하는 것이냐? 의인이 의행을 한다.
의행을 하려면 의인이 돼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면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 아닌데 그 사람에게서 일반적으로 좋은 일이 보이면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런다. 그러니까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자기가 의행을 하려면 먼저 의인이 되어야 한다. 누구의 말씀대로의 의인? 하나님 말씀대로의 의인. 사람이 의인이 되어있으면 ‘내가 의행을 해야지’ 그렇게 안 해도 그 사람이 하는 것은 의행이 된다. 그 사람이 하는 건 다 의행으로 나온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 보기에 좋은 일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의인이 볼 때 ‘저거 저래선 안 되겠다’ 하고 회초리를 든다든지 꾸중이나 책망을 하는 경우라면 그 때는 그게 의행이냐, 악행이냐? 의행이다. 왜 의행이냐?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에. 이걸 잘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를, 그 지식을 잘 습득하고 깨닫고 그 인격과 성품을 갖고 있으면 모든 사물을 보고 판단을 해서 나오는 건 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
그러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하는 건 뭘 보고 판단할 수 있느냐? 옳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옳은 것이라야 옳은 거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옳은 걸 현재에서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의인 속에는 현실에서 대가를 바란다거나 그게 아니라 가치판단 평가성이 늘 하나님의 사람의 성품을 염두에 두고, 항상 죽음의 선에 소원이나 목적이나 그 결과를 두고 현실에서 그렇게 살아나간다. ‘내가 이렇게 하다간 목숨이 죽겠구나’ 그런 게 아니라 ‘옳다’ 하면 예수님처럼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나간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생명을 건 것이다.
타 교회 교인들이 ‘천국의 상급 어쩌고’ 해도 그 사람의 이해타산 평가성이 이 땅에 내려져 있다면, 이 땅에서 결과를 보려고 한다면 그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줘도 이건 인조 의이다. 지식이 바르면 사람이 바른 사람이 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가치판단을 내리고 알고 행하는 것에는 늘 궁극적 결과, 죽음 저 너머에서 내 것이 될 것을 현실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 만들어진 그 사람은 또 항상 죽음의 선 너머로 들어가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예수님이 ‘너희는 의인이다’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나는 의인이다’ 하는 게 자칭이다. 주님은 안 알아주는데, 안 보냈는데 자기들 스스로가 ‘나는 의인이다’ 하는 그게 자칭이다.
의인은 인격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자들이고, 죄인은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향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지식으로 말로만 신앙을 잘 하는 것처럼 떠드는 것. 이건 세상 쪽이다. 이건 죄인이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에서 딴 데로 가 있는 자체가 죄라는 것이다. ‘생명과를 따먹어라’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는 게 죄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것을 먹으라’ 하니까 세상 것을 잔뜩 먹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죄라 할 때 행동을 해서 죄를 짓는 죄인이 있고, 또 가르치는 면에서 죄를 짓는 게 참 많다. 생각을 하는 것도 죄적인 생각도 있다. 가르치는 면에서도 죄를 가르치는 것도 있다. 남의 주머니에 든 것을 훔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죄를 짓는 가르침이고,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거짓 종들이나 거짓 목사가 성경을 가지고 세상을 가르치는 것도 가르치는 면에서 죄다. 이런 가르침은 넓은 길, 세상 길, 심판 길, 사망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니 죄다. 자기는 넓은 길로 가느냐, 좁은 길로 가느냐?
‘죄인이니 의인이니’ 할 때 사실은 세상 이방인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 언행심사가 하나님 앞에서 의는 없고 다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들을 끌고 와서 말을 하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처럼 사니까 안 믿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래도 모르겠느냐’ 하고 비교를 시키는 거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 안에 죄인이 참 많다. 의인이라야 되겠는데 죄인이 많다.
바리새교인들이 보는 입장의 그 눈 그 판단은 세리와 이방인들을 죄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 기준에서 보는 죄인은 또 뭐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보는 죄인은 도둑질하고 사람을 해코자 하는 것 등을 죄인이라고 한다. 우리들 입장에서 볼 때도 그건 죄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만 본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보는 기준과 똑같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는 기준은 뭐냐?
바리새교인들이 죄를 보는 기준이 안 믿는 사람들이 보는 기준과 같았느냐, 달랐느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보는 죄의 기준은 행동 죄 즉, 사람을 때리고 도둑질하고 하는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말을 한다.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는 죄인의 기준은 뭐냐?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으냐?
본문으로 통해서 보면 이들이 안 믿는 사람들처럼 사람을 때리고 했느냐? 그런 일은 안 했다. 그런 그들이 세리와 이방인들을 왜 죄인이라고 하느냐? 그들이 자기들처럼 율법을 안 지키니까. 그래서 자기들이 볼 때 그들은 율법을 안 지키는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게 바리새인들의 기준에서 보는 죄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들은 율법대로 살고 있고 행하고 있으니 의인이다’ 한 것이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보는 죄인인 세리와 점심을 같이 먹는다고 해서 예수님도 죄인이라고 하는 거다. 그 때 당시에 이스라엘이 로마 강대국의 관할 하에 살고 있는데, 세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서 로마황제에게 바쳤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죄인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는 죄인은 뭐냐? 예수님은 의인이냐, 죄인이냐? 의인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는 의인은 뭐냐? 예수님이 알아주는 의인은? 당신처럼 인격과 성품이 만들어지고, 만들어지려고 애쓰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신다. 소원성이 그런 사람, 예수 믿는 목적이 그런 사람. 이게 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다. 아직 덜 만들어졌다는 것뿐이지 그러나 예수님처럼 만들어지려고 하는 소원 목적 그걸 주님은 의인이라고 본다. 주님이 보시는 죄인은 이것과 반대다. 그게 죄인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지금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지는 않고 예수님을 깔보고 밟아버리려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바리새인 그들이 죄인이다.
이방인들이 사람을 해코자 하는 등의 눈에 보이게 죄를 지으려면 활동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이 의행을 하려면 자신들이 의인이 아니면서 의행을 하려니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율법을 지킨다거나, 헌금을 알리며 하거나, 전도하는 걸 알리거나, 기도하는 걸 알리거나 해야 한다. 즉 바리새교인들은 율법대로 행해야 의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행동은 예수님의 사람으로 안 만들어지고도 글자 문자대로 할 수 있는 거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그 율법을 지키는 방편으로 해서 의인으로 만들어지라는 뜻이냐, 그냥 문자대로 살라는 것이냐? 전자다. 예수님은 의인이요 만들어진 사람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율법의 문자대로 행했다고 해서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하는 거다.
이방인들이 의행이던 죄행이던 하려면 행동이 나와야 하고, 바리새인들도 율법대로 살려면 행동이 나와야 한다. 이들은 모두 눈으로 행동으로 보여야 만이 ‘의인이구나’ 하게 된다. 바리새교인들은 성경의 율법의 문자대로 해야 의인이라 의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체가 의이고 의인이기 때문에 당신께서 하시는 것마다 다 의행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들어진 속을 보는 것이니 말씀대로 정신 사상 소원성이 그렇게 들어가면 의인으로 쳐준다. 그런 사람이 되면 그 다음에 의행은 천천히 나오기도 하는 거다. 그런데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교인들은 문자대로 살아야 의인이라고 말을 하고 인정을 해 준다. 나타나야 한다. 예수를 안 믿는 이방인들도 행동이 나와야 그걸 기준으로 의인이고 악인이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과 바리새교인들과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눈에 보이는 행동 행위가 기준이다.
우리는 신앙의 원리를 눈으로 보여지는 것에 세우는 게 아니다. 그건 사람이 만들어짐에 따라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고, 안 만들어지면 안 나타나고 하는 거다. 나타난다고 해도 그걸 의로 인정해주는 것은 주님이시다.
만들어진 데서 나타난 건지, 안 만들어진 데서 나타난 건지? 안 만들어지면서 나타난 것과, 만들어진 데서 나타난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성령의 눈으로 보면 안 만들어진 데서 나타나는 건 다 외식자들이다. 안 만들어지고서도 교회에 오래 다닐 수도 있다. 그런데 안 만들어진 사람이 자기가 교회에 오래 다닌 것으로 자기를 의인으로 생각을 한다. 이건 신앙인이 아니고 종교인이다. 예수님은 종교인을 칭찬하지 않는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 안에 죄인이 많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처럼 안 하면 죄인이고, 자기들 단체에 속하지 않으면 죄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교인들의 단체에 속하지 않으니까 주님을 죄인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의인을 보는 눈이 없으면 죄인을 분간을 못하게 된다.
그러면 궁극교회에 속해있으면 다 의인이냐? 궁극교회 목사부터 무엇을 의인이라고 하느냐?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 그렇게 되려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잘 깨달아야지 말씀을 안 듣고 못 깨달으면 의인이고 뭐고 없는 거다. 이러면 사람이 꼴이 꼴이 아니다. 아직까지 죄인의 틀을 못 벗어났느냐?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는 있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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