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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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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5장 3절-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4절: 양 일백 마리라면 그 숫자가 많다면 많은 거다. 여기서는 어떤 이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말씀이다. 표현이야 양을 찾는 것이지만 죄인을 찾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죄인을 찾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본문을 보면 양 일백 마리를 치는 주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양 하나가 없어졌다고 했을 때 누구의 책임이냐? 양 제 책임이냐, 목자 책임이냐? 과연 자기 책임으로 크게 느껴서 양 한 마리를 찾으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찾아 나선다. 그런데 당시의 바리새 종교 지도자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찾아나서는 신앙이 아니다. 그건 왜 그러냐? 양이 한 마리 없어졌는데 찾아나서는 신앙이 아니다 하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영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사람이 거기에 앉아있으면 신앙의 정신이 도망갔는지, 안 갔는지 그 상태를 모르는 거다. 사람만 앉아있으면 안 잃어버렸다고 생각을 하지 사람 속에 어떤 정신이 들어서 그 정신이 들락날락하다가 그 정신이 어디로 잡혀가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죄인이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 불순종이 된 것.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불순종이 된 거. 그러면 ‘이거 뭐가 잘못됐지?’ 하고 바로 찾는 사람이 있느냐? 이건 정신적인 문제로 들어가는 거다. 신앙은 그런 거다.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은 자기들처럼 안 하면 죄인으로 몰아붙인다. 자기들이 기준이 된다.
본문에 일백 마리가 나왔으니 이걸 일반적인 생각으로 쉽게 접근해보면 목자가 양 아흔 아홉을 어디에 두고? 들판에 두고. 그러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판에 두면 어떻게 되느냐? 사나운 맹수가 와서 잡아먹는다. 그러니 목자는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이 섭섭하긴 하지만 아흔 아홉 마리가 남았으니 다행이다’ 하며 스스로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이게 인간의 생각이다.
그런데 자기 자식을 하나 잃었다면 그 때는 문제가 달라지느냐? 백 마리 양이 들판에 있다고 해도 자식이 없어졌다면 양 일백 마리를 놔두고 그 자식을 찾으러 가겠느냐, ‘그까짓 자식 하나’ 하며 양 일백 마리를 지키고 있겠느냐? 밤이 맞도록 자기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찾을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은 그런 심정마저도 없다.
양이 처음에 일백 마리로서 완전하게 있었다. 백 마리로 아구가 꽉 차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가 없어졌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은 목사가 자기 교회 교인이 하나 둘 교회에 안 나오면 교인이 교회에 안 나오는 것만 신경을 쓰지 자기의 교훈이 성경 한 이치가 빠져서 그렇게 된 것인 줄을 아느냐? 또 한 예는 자식이 잘못됐으면 부모가 자식을 보고 야단만 치지 부모 자신이 자식을 기르는 면에 교육의 지식 면에서 나사 하나가 헐겁거나 빠진 것을 아느냐?
자기 생각에 뭐가 비뚤어진 줄은 생각을 못하더라. 그러니 하나가 비뚤어져도 모르고, 많이 비뚤어져도 뭘 모른다. 나사가 빠진 자리에 나사를 찾아서 끼울 줄은 모르고 교인이 도망갈까봐 성경구절을 갖다가 붙여서 대 봐야 그건 진리의 종이 안 된다. 옳은 종이 안 된다.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벌써 목자의 살핌이 관찰이 들어간 것이다. 군대로 본다면 군인들을 연병장으로 불러내서 열을 맞춰서 점호를 치면 몇 명이 빠졌는지를 알듯이. ‘세로 번호, 가로 번호, 앉아 번호’ 해도 백 마리에서 한 마리가 빠진다. 이렇게 저렇게 해도 한 마리가 빠진다.
양은 양들끼리 놀아야지 늑대나 여우하고 논다면 잡아먹힌다. 다시 말하면 교인들에게도 그런 이치와 같은 것이 있는 건데, 당장 잡아먹힐 줄도 모르고 어디 가서 놀고 있느냐? 누구와 짝짝꿍 하느냐? 위험천만이다.
예수님은 찾아오신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대답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왜? 신앙정신 면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탈이 되는 건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단체 안에만 들어있으면 자기 같은 줄로 알고 있다. 오늘날 노회 총회 목사들이 자기가 어떤 조직에 들어있으니 다 하나인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별의 별 생각을 가진 목회자들이 다 들어있다.
바리새인들은 교인들이 돈이 많아 보이면 명예와 직분을 줘서 억지로라도 끌어오고, 돈이 없어 보이면 늑대가 물어가도 무관심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놓지 않으면 늘 백 마리에서 하나가 모자란다. 이걸 사람 쪽으로 생각을 하면 자기 속에 채워 넣을 줄을 모르면 늘 모자라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서 보기에는 우리가 모자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까짓 것 내버려둬라’ 한다.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 대제사장 이들은 깨달아서 채워 넣는 게 없다. 사람을 많이 긁어모아서 종교적인 활동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인 줄로 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스런 사람이 되려면 자기 속에 모자라는 하나님의 것을 채워 넣는 사람이 돼야 한다. 자기 머리 마음 창고에 하나님의 것을 가득가득 채워 넣는 사람이 돼야 한다. 안 그러면 모자라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깨달음에 있어서 모자라는 사람이 된다.
일반적으로 말을 해 보면 모자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역시 교인들이나 목사님들을 만나보면 진리가 아니면 이거는 형편이 없는 거다. 모자라는 것을 말로 한다면 이건 뻥 둘린 것이다. 뇌가 없는 사람처럼 뻥 뚫린 것이다.
참 목자는, 참 성도는 자기의 책임의식을 크게 느낀다. 그래서 본문에 아흔 아홉을 들에 뒀다는 것은 ‘아흔 아홉을 애굽의 산에, 애굽의 정신에, 세상의 정신에 두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양들의 먹이가 풍부한 신령초에 두고, 신령한 양식을 먹을 수 있는 들판에 두고’ 그 뜻이다. 괜히 들판에 두었다고 하는 게 아니다.
양들은 신령한 양식, 하늘의 만나를 먹을 수 있는 그곳이 아니면 흩어진다. 이치가 그렇다. 그곳이 아니면 흩어진다. 왜? 정신이 전부가 분산이 되니까. 그러나 신령한 양식을 먹는 곳이라면 자기의 정신과 소원 목적이, 자기의 살 곳이 그곳이기 때문에 탈출을 안 한다. 누가 끌고 가도 도로 돌아온다. 영양이 없는 썩는 것, 불타질 것, 세상 것을 주면서 ‘여기 가만있으라. 나가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린다’ 하며 공갈협박을 하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으면 말귀를 알아듣는 양들이 가만있겠느냐? 다 도망간다.
양들의 먹이는 신령초, 생명초, 천국초이다. 참 목자는 양들의 먹이를 잘 안다. 하나님의 양떼들이 뭘 잘 먹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생명이 있는 걸 먹는다. 세상 윤리 도덕성을 말하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 거,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 죽은 걸 먹으면 안 된다. 세상은 죽은 거다. 저주받고 타락된 죽은 거다. 이거 먹으면 안 된다. 그 정신 사상을 먹으면 안 된다.
그리고 참 목자는 자기의 불찰을 잘 안다. ‘아차, 내가 잘못 깨달았구나. 실수했구나.’ 목사님들이 말씀이치에서 잘못 나가면 교인들의 생각이 딴 데로 나간다. 옳은 이치라면 비교 판단해서 ‘어떤 것이 영원히 옳은 거냐’ 하며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데 목사님들이 세상에 나돌아 다니는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 이건 먹을 것도 못 되고, 그런 사상을 집어넣어서 그런 사람이 된들 뭐가 되겠느냐? 예수를 믿어도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장똘뱅이가 된다. 사람이 신사가 안 되고 잡배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과 인도자들은 자기를 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양을 찾으러 갈 때는 맨손으로 가느냐, 무장을 하고 가야 하느냐? 무장을 해야 한다. 산에 가려면 무장을 하고 가야 하느냐, 그냥 올라가느냐? 지팡이도 망원경도 후레쉬도 칼도 밧줄도 나침반도 가져가야 한다. 또 산의 지형을 잘 알아야 하고. 무식하면 그냥 죽는 거다. 말하자면 양을 찾으러 갈 때는 진리이치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많은 시련과 연단을 거칠 각오를 해야 한다. 어느 구석에 양이 있는지를 모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인도자 자기부터 먼저 잘못된 것을 바로 찾아서 고치는 게 우선적이다.
자기의 생각 속에서 한 이치가 틀어지면 다 무너진다. 집의 벽돌이 하나 빠지면 서서히 무너지다가 결국은 다 무너진다. 한 이치가 그렇게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평신도로서 자기가 신앙한다고 하는 게 그 지식이 잘못되면 자기가 딴 데 가서 헤맬 수가 있는 거다. 하나님의 집에서 정확하게 신앙정신이 바로 살아야 하는데 잘못된 지식에 의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집이 아닌 딴 데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 수입이 많겠느냐? 자기의 노력과 시간과 자기의 젊음 자기의 투자성이 왕창 날아간다. 그 손해를 어떻게 찾을 것이냐? 뭐가 잘못돼서 그러냐? 신앙지식이 잘못되면 자기의 일생이 다 날아간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심판 받고, 이뤄진 구원이 없고, 영능의 실력 없고 다 날아간다. 그러면 100살을 살았다고 해도 아무 것도 없고 자랑할 것이라곤 밥 먹고 오래 산 것밖에 없다.
예수님이 33세에 우리의 구원에 목적을 두고 돌아가셨는데, 33세에 안 돌아가시고 330세에 돌아가실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왜 33세에 돌아가셨느냐? 그 이유가 뭘까? 인간이 사는 목적이 오래 사는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
5절-6절: 찾기는 찾은 모양이다. 오니까 아흔 아홉이 그대로 있느냐, 다 도망을 가버렸느냐? 그대로 있다. 그런데 다른 성경에 보면 ‘산에 두고’ 라는 말씀도 있다. 이런 경우는 도의 봉우리, 말씀의 봉우리를 의미한다. 교인 하나하나마다 전부 말씀의 봉우리에 올려놓고 그 다음에 찾으러 가는 것을 말한다. 도의 봉우리에 올려놓지 않으면 다 도망간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들판에 두었다고 했으니까 양들이 더 잘 달아나지 않겠느냐? 그렇게 보는 게 아니다. 들판이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염두에 둔 들판이다. 그곳에 먹을 게 잔뜩 있으니까 양들이 안 달아나는 거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참 목자는 공갈협박이 필요가 없는 거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오니 얼마나 기쁜지 나와 함께 즐기자고 벗과 이웃을 집으로 청해서 잔치를 벌인다. 양 한 마리가 얼마이기에 이러느냐? 양 한 마리가 얼마냐? 그것도 새끼 양이다. 그 한 마리를 찾았다고 해서 벗과 이웃을 청해서 잔치를 하려면 그 비용이 양 한 마리 값만 들겠느냐? 그러니까 이 비유의 말씀의 의미가 하나님 앞에 사람이 돌아오는 가치성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돌아온다는 것이, 정신과 마음이 믿는 지식이 하나님 앞에 바로 돌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그 사람의 가치력을 생각을 해 봐라. 그런 한 사람을 위해서 세상 우주만물 천지를 만들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가 있기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보다 더 가치 있게 비중을 두었다. 그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내보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내버려 둔 거다. 당신의 독자보다 인간 너를 그렇게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기의 잘못된 생각이 하나님 앞에 바로 잡혀 들어갔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잔치를 하고 있다. 그런 뜻도 들어있다.
하나 잃은 것을 찾으려면 애굽을 탈출하게 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 들에다 인도하는 그 실력, 들로 나가서 인도하는 그 실력,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그 실력이 아니면, 말하자면 모세와 같은 실력이 아니면 안 되는 거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아서 가는 그런 노력, 그런 열심, 그런 애타는 마음, 그런 불붙는 마음이 아니면 잃어진 그 한 마리를 못 찾는다. 한 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생명을 건지는 것이다. 생명을 건지려면 한 사람의 희생이 또 필요한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자기의 위치, 신앙의 위치, 신앙의 마음을 생각해 봐라. 개인적으로 나 때문에 예수가 왔다.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왔다. 나를 찾으러 왔다. 교훈적으로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가지고 날 찾으러 왔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자.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자. 소원 목적이 하나님 앞에 있자. 이게 본문이 주는 교훈이다. 이것이 옳은 종들의 양을 찾는 심정이다.
본문으로 보면 주님의 양들은 들판으로 인도가 된다. 참 목자도 들판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만나를 먹게 된다. 이건 완전한 나라를 향한 완전한 사람이 되는 이치를 찾는 거다.
우리가 말씀을 보다가 한 이치를 찾으면 굉장히 기쁘다. 그 경험을 해 봐라. 이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처음사랑을 받는 거다. 그 사랑을 인격적으로 받은 사람은 그걸 못 잊는다. 그러니까 그 처음사랑을 또 찾아서 들어가게 되니 자꾸 은혜를 받는 쪽으로 가게 된다. 일반적으로도 남녀가 첫사랑이 없으면 평생을 살아도 살면서 별로 재미가 없다. 처음 만났다는 첫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첫사랑 그 말이다.
한 이치를 찾아서 주는 것, 한 이치를 깨닫게 해서 주는 것. 예수님은 이걸 주러 왔다. 이것을 어찌 물질과 비교하겠느냐?
많은 벗들과 이웃들을 청해서 잔치를 한다는 것은 주님과 참 목자와 모두 함께 진리이치의 기쁨이요, 온전하고 완전을 말하는 것이다. 100으로 딱 채워졌다는 것은 온전한 잔치를 말하고 있다. 잃어버리면 항상 섭섭하고 항상 하나가 모자라는 사람이다.
잃은 양을 들어서 몰랐던 한 이치를 채워주는 것, 찾아주는 것, 자기가 갖는 것. 그러면 자기가 100으로서 온전해지고 완전해지니 얼마나 기쁘겠느냐?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 말씀을 교인들이 전도 가서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에 목적을 둘 수가 있다. 데려오는 것은 좋으나 본문의 성경해석은 그런 게 아니다.
우리교인들이 전도를 할 때 뭘 채워주려는 것이냐? 세상 것을 채워주려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치를 채워주려는 것이냐? 이치를 채워줘야 모자라는 사람이 안 된다. 하나님 앞에 온전 완전하게 하려는 이것이 참 목자의 심정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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