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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6: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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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6장 17절-18절: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17절: 한 획 속에 물질세상 이 우주만물과 존재들, 그리고 사건 환경 생태계 등등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인류역사의 변천사가 다 들어있다. 하나님의 율법의 한 획 속에서 다 이뤄져가고 있다. 그 한 획 속에 자기의 이룰구원도 들어있는 건데, 지혜로운 자는 자기 영능의 실력으로 그 구원을 이뤄가고 있는 거다.
하나님의 율법의 설계는 100%가 우리의 구원에 관한 설계인데, 만일 이 율법이 한 획이라도 빠진다면 전부는 무가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완벽하냐? 그러니 예수 믿는 자기는 상아생전에 무엇을 더 생각을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하나님의 설계를 인간 자기의 수단 방법으로 변경이 된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겠느냐? 이것을 안다면 지금 우리의 예수 믿는 신앙은 이미 결정이 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결정이 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선택이냐, 물질세상 선택이냐’ 하는 판단이 한 이치 속에서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천지가 없어지는 것보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기가 쉽다는 말이냐, 안 떨어진다는 말이냐? 율법의 한 획은 너의 구원이 이뤄지기 전에는 안 떨어진다. 그러니까 율법의 한 획이 너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 역사되어 가고 있고, 너를 이렇게 저렇게 굴리고 있다. 이게 어디 있느냐? 율법의 한 획 속에 들어있다.
‘말씀대로 세상은 다 이뤄지고 마지막에 세상은 불 탄다’ 하는 건 맞지만 우리는 이것만 알 게 아니라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 그 율법 없어지기 전에 너의 구원을 이루는데 이 말씀이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를 알아라. 다시 말하면 세상이 불타기 전에 내가 만들어져야 한다. 율법 속에는 자기의 한 인생이 끝나기 전에 율법이 원하는 대로, 한 획이 원하는 대로 자기의 구원이 들어있으니 구원을 다 이루고 가야 한다. 우리는 이룰구원에 신경을 쓰는 거다.
성경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 당신의 온전한 성품을 위해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권고도 하고 책망도 한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일을 해도,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 자기의 온전이다. 자기가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닮아 나오는 이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너에게 있다. 몸 밖의 것을 크게 어쩌려고 하지 말아라. 그건 심판대에 들어가는 것이다.
18절: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쉽다고 했는데 왜 뜬금없이 간음이 나오고 장가가 나오느냐? 전혀 딴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세상이 없어지고 있고, 아내를 버리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게 다 성도들에게 관해서 하는 말씀이다.
인류 제 1차적 종말인 노아홍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했다. 그러면 그 때 노아의 세 아들들은 장가를 안 보냈느냐? 보냈다. 그런데 가는 목적이 다르다. 노아의 세 아들들의 장가는 왜 보냈느냐? 며느리를 왜 데려왔느냐? 뭐 하자고 데리고 온 거냐? 방주를 짓자고 장가가고 시집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영적 이스라엘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신 사상이 세상을 취하고 물질만능 주의로 세상으로 쏠렸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은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자라는 의미의 말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홍수가 나면 홍수에 쓸릴 사람으로 살았다 그 말이다. ‘교회에 안 나왔다’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았다 그 말이다. ‘데마는 세상으로 갔고’ 한 것도 ‘교회에 안 나왔다’가 아니라 데마 속의 그 사상이 세상성으로 돌아갔다 그 말이다.
우리가 신앙의 질을 못 보면 우리의 이룰구원의 성질을 못 본다. 그걸 발견을 하게 하려니까 이방인, 또는 세상으로 나가는 종교인, 또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셋의 신앙사상으로 볼 때 그걸 보는 내가 누구 것을 가져야 옳으냐? 주님의 것이다.
그러면 세상 쪽으로 외치는 종교인들이, 특히 교회들이 예수님이 외치는 것과 똑같으냐? 전혀 아니다. 질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걸 따라갈 수가 없는 거다.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은 질을 두고 하는 말이지 ‘큰 것은 진짜고, 작은 것은 가짜고’ 그런 게 아니다.
그런데 목사님들 중에는 ‘진리라면, 진짜라면 켜져야지’ 그런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말의 의미가 작으면 진리라는 말이냐, 아니라는 말이냐?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러니 목사이면서 예수님과 정 반대적인 길을 간다. 얼마나 허풍 되고 허황된 생각인지?
본문을 세상 사회적 법적인 제도의 기준을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하게 되면 해석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왜? 기준이 틀리니까.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이래도 죄가 되고, 저래도 죄가 된다. 예를 들면 시집 장가가서 헤어졌다가 다른 사람을 또 만났다고 할 때 자기들끼리 이렇게 저렇게 붙었다 떨어졌다 할지라도 남녀가 선악과 따먹은 정신으로 만났다 떨어졌다 했다면 그건 다 선악과 따먹은 저주 받고 타락된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죄다.
우리는 질을 두고 생각을 해야 한다. 자기들끼리 붙었다 헤어졌다 하는 것을 일반 사회적으로 이상하게 보겠지만 그거나 저거나 질은 똑같은 거다. 선악과 따먹은 정신으로 산다면 부자가 돼도 죄가 되고 가난해도 죄가 되고, 행복해도 죄가 되고 불행해도 죄가 된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렇다.
일반적으로 죄를 많이 지으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살았다고 해도 지옥에 들어가는 거다. 그거나 저거나 같다. 안 믿는 사람이 가난하거나 부자 된 거나 질은 똑같다. 어떤 면에서 똑같은 거냐? 선악과 먹은 지식에서 가난하게 됐고, 부자가 됐고.
예수 믿는 사람이 목적적으로 세상으로 들어가 있어서 예수이름으로 부자 되게 해 달라고 하는 속성이나, 안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 되어 살겠다는 것과 그 속성은 같다. 다만 다른 건 믿는 사람은 영이 중생이 돼서 천국에 가는 것만 다르다. 우리는 그걸 원하는 게 아니라 영능의 실력적 머리가 되는 것이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지식은 선악과 먹은 지식이다. 선악과 먹은 그 지식에서 어떤 기발한 것이 나와도 그 지식 자체는 하나님의 저주 안에 들어있는 거다. 그러니 이렇든 저렇든 사람 보기에는 조금 달리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해당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질을 놓고 볼 때 그렇다. 우리는 신앙의 언행심사의 실력이 되는 것, 하나님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성경이 해석이 안 된다.
선악과 먹은 지식에서 나오는 모든 판단은 죄가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까지도 영원히 가고, 영원히 옳고, 영원히 살고, 영원히 영광이 되는 걸 주장하는데, 거짓 종들은 현세 임시세상서만 되는 걸 자꾸 주장을 하니 하나님의 주장과 다른 거다. 주장이 하나님의 주장이 아니면 죄가 되는 거다.
기독교 안에서 다 옳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당신 혼자서 ‘아니다’ 하면 아닌 것이다. 온 세계 기독교인들은 ‘이다’ 라고 하고, 예수님은 ‘아니다’ 하고, 예수님이 또 ‘이다’ 하고 온 세상교인들은 ‘아니다’ 한다면 그걸 바라보고 있는 자기는 누구 것이 옳다고 그 쪽으로 가겠느냐? 그 속에 든 성질의 그런 상황을 볼 줄 알아라. 그냥 눈으로 보이고 키 크고 한 그것만 보지 말고.
남자와 여자를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놓은 것은 뭘 하라는 것이냐? 하나님이 부부로 만들어 놨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좋아서 결혼을 해 놓고는 ‘하나님이 짝지어줬다’ 그런 말을 한다. 에덴동산에서 남녀를 만들어서 부부로 결합시켜 놓았다고 하는 것만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 말을 한다. 자기끼리 좋아서 하고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은 부부가 생명과 먹고, 생명과를 먹어야 지키고 다스리고 하는 게 나오게 된다. 생명과를 먹어야 자기 마음부터 지켜지고, 그 다음에 몸 밖의 것을 다스리게 된다. 그 다음에 ‘정복하고 땅에 편만하라’가 된다. 이것이 지상명령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게 들어있다.
부부냐? 지켜라. 뭘 지켜야 하느냐? 정조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부를 만드신 목적은 생명과 먹고 신앙정조를 지키고,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고. 다스리는 여기에는 영능의 실력이 붙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마음을 못 지키면 딴 것은 못 다스린다. ‘마음을 지키는 자가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는 거냐? 이쪽으로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고 몸 밖의 것을 자꾸 생각을 하니 몸 밖의 것이 자기 말을 듣느냐? 영능의 실력화가 돼서 자기를 못 지키면 정복을 못한다. 군인이 무장을 못하면 정복이 안 되고 죽는다.
그리고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땅에 편만하라’고 했는데 ‘편만’이란 자녀를 낳아서 복음동산을 만들어라 그 말이다. 이건 창조 때부터 지상명령이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으면 이건 안 된다. 위치가 바뀌니 정복을 당하는 자가 된다.
이 명령에 순종을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과 영인성장과 영능의 실력이 들어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실력으로 조만간 천국에 올라가면 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누림이 된다. 그렇게 되는 실력이 하나님 앞에 최고 최대의 존귀 영광이요 행복이요 기쁨의 극치다. 다시 말하면 고차원적인 인격에서 나오는 그 행복 그 기쁨 그 즐거움은 극치다. 사람이 깨닫지를 못한 채 저질적인 지식이나 성분 속에서 나오는 기쁨이나 행복은 저질이다. 최대의 행복과 기쁨과 극치를 누리려면 자기가 최고의 깨달음으로 올라가야 한다.
선악과를 먹으면 고통이요 불행이요 심판이요 죽음이다. 그러니까 부부의 원칙이 하나님의 말씀순종으로 생명과를 먹는 것을 원칙을 두고 볼 때 남자가 생명과는 안 먹고,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먹으니 자기 기준에 안 맞아서 아내를 버린 것이고, 선악과 먹은 그 지식에서 그 기준에서 안 맞아서 버린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사실 누구부터 버림을 당한 거냐? 자기부터다. 선악과를 먹으면 자기부터 버림이 된다. 쫓겨났다는 것은 버림이다 그 말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냥 학문이 아니고 자기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옳은 진리지식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그렇게 보고 사는 것이다. 그래야 이룰구원이 들어간다.
예수 믿는 게 주님의 지식과 완전히 다르다면 무엇이 되느냐? 허황된 말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자기의 기쁨과 즐거움과 최고의 극치의 행복은 어떻게 하라는 거냐? 말씀을 보라는 것이다. 말씀을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과는 안 먹고 자꾸 눈으로 보는 기준을 가지고 자기 원망하고 남 원망을 하면 어찌 되는 거냐?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행복이 있겠느냐?
예수님 안에는 눈물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뿐이다. 그런데 이게 거꾸로 돼서 세상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 같고, 예수 안에는 고통과 괴로움만 있는 것으로 느끼는 건 아닌지? 요셉이나 다니엘을 보면 남이 보면 고통인데 자기 속에서 이 고통을 기쁨으로 만든다. 대단한 실력가다. 행복 된 자리에서야 이렇게 못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 지옥 같은 환경에서 천국을 만들어 내는 게 정말 실력가고 하나님의 사람이다.
부부의 원칙이 하나님의 말씀순종으로 생명과를 먹는 것을 원칙으로 두고 볼 때 남자가 생명과는 안 먹고 선악과를 먹고서 그 기준에 안 맞아서 여자를 버린다면 누가 간음죄가 되는 거냐? 남자다. 성경은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지금 이치를 찾아내게 하기 위해서 생각해 본다면 남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 지식의 기준에 안 맞아서 여자를 버렸다면 누가 간음죄를 지은 거냐? 남자다. 그러니까 이건 부부라는 인간이 만든 제도 이전에 생명과를 먹어야 할 부부의 도에서 이탈이 된 거다.
참 부부는 진리생명과를 먹고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를 갖는 것이다. 이 원리대로 예수님과 나와의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가 돼야 한다. 일방적이 아니라 생명과 먹고 주고 받고 수수관계다. 이게 있기 때문에 부부를 만들어서 이걸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부부는 인격적 대등성이다.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하고, 여자는 안에서 일을 해도 인격적 성품적 차별을 두면 안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준 위치이탈이 되면 안 된다. 말하자면 여자는 밖에서 일을 하고, 남자는 안에서 일을 하면 위치이탈이 된 것이다. 위치이탈이 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남녀의 위치를 만들었다. 그래서 여자목사도 위치이탈이다. 목사 이전에 여자 전도사는 참 아름답지만 여자목사는 내 입장에서 깨달을 때는 위치이탈이다. 성경대로 하라. 그래야 바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여자를 불러서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든다’고 했느냐? 그런데 지금 하지도 않은 짓을 하고 있다.
아까는 남자가 간음이 됐고, 그 다음에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이다.’ 버리운 이가 누구냐? 앞에서 누가 버림을 당한 거냐? 여자가 버림을 당한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 자기 기준, 선악과 따먹은 그 기준에 안 맞는다고 여자를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가 버리운 그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다. 그러니까 장가 든 남자가 간음죄라고 하는데, 이게 여자가 문제냐, 남자가 문제냐? 남자가 문제다.
왜 남자가 잘못된 것일까? 그것은 이 남자 역시 선악과 먹은 자기 지식의 기준으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간음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를 버린 그 정신 사상의 지식도 선악과 먹은 기준지식, 여자를 아내로 취한 그 사상 정신도 선악과 먹은 기준지식이라는 말이다. 이건 안 믿는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안 믿는 사람은 선악과 먹은 지식에서 다 이뤄지는 거니까.
진리생명과 먹는 부부는 손잡고 이룰구원으로 순종하며 산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부부다. 그러면 예수 믿기 전에 부부가 되었다면 어떻게 할까? 그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뒤늦게라도 부부의 기준을 알았다면 이제는 두 부부가 진리생명과 먹는 의사단일로 손을 잡고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서 이룰구원으로 나가야 한다.
이방인들의 부부는 선악과 먹은 상태의 결합이고 하나님을 떠난 자기들끼리의 결함인고로 우리가 그 어두운 일에 간섭할 것은 못 된다. 그러니까 ‘이래라 저래라. 옳다 그르다’ 간섭을 말라.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붙었다 떨어졌다 해도 그게 그거다. 인간을 만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결혼에 목사님들이 주례 설 것이 못 된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이 나온 것이냐? 무얼 깨달으라고 부부의 말을 할까? 시집가고 장가가고 한 사람들이 많은 여자를 많은 남자를 갈아치웠다는 말이냐? 뭘 생각을 해야 되는 거냐?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으로 되었으니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세상목적으로 갔으니 심판 아래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바꿔치거나 안 바꿔치거나 상관없이 이미 세상으로 나갔으니 하나님의 심판대 아래 들어간 것이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아내와 남편이 처음부터 알콩달콩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거는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차원이 되는 거다.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을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니,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부부의 상을 가지고 영적인 면으로 끌고 들어오는 거다.
교회는, 성도는 여자로 표현이 된다. 남자고 여자고 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교회로써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사모하는 여자로 표현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주님을 사모하다가 세상 쪽을 사모하면 그건 간음이다. 이렇게 돼도 저렇게 돼도 간음이다. 그래서 그 앞에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한 그 말끝에 이 말이 나온 거다.
예수 믿는 부부가 산다고 할 때 여자건 남자건 진리지식을 버리고 세상으로 들어갔다면 헤어지지를 않아도 이건 간음이다. 주님을 버리고 됐으니 간음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실질적으로 눈으로 보이는 간음이 되는 게 나온다.
우리 입장에서는 진리신앙의 정조가 자기를 명예스럽게 영광스럽게 만드는 거지 진리신앙의 정조를 버리면 그 다음에 오는 순서는 정신이 세상 쪽으로 들어가면 정신 팔고 환경에 이용되고 사람이 망가진다. 순서가 그렇게 들어온다. 회개하지 않으면 순서가 그렇게 내려간다.
믿는 사람으로서 과거에는 몰랐으니 그렇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진리를 알았다면 진리 안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안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 다음에 세상만 바라보며 살다가 오다가다 진리를 만나서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기의 과거를 갖고 와서 물을까, 현재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는 면으로 하나님께서 물을까? 현재다. 현재의 이룰구원이다.
회개하고 바로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일 저런 일이 참 많은데, 그런데 이룰구원으로 알차게 이뤄가는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거다. 그래서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고 못 깨달아서 그랬다 할지라도 그러나 아는 그날로부터는 달음박질을 해야 한다. 남편의 이룰구원과 아내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달음박질을 해야 한다.
과거를 자꾸 갖고 와서 말을 하고, 과거를 생각하고, 같이 살면서 과거의 아내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을 해 줄까? 하나님의 어떤 사건적인 형벌이 오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남녀관계는 하나의 일반계시이고, 우리는 신앙정신의 영의 눈을 가지고 ‘그 안의 남녀 부부의 신앙사상이 본질에서 이탈이 됐느냐 아니냐? 본질을 붙잡았느냐?’를 살펴서 자기를 본질화 시켜서 잘못된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잡고 옳지 못한 것을 고치려고 애를 쓰고 해야 옳은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한 획 속에 들어있는 구원을 이뤄 들어가는 그 장면이다. 그러니까 이걸 인간 편으로 말을 하자면 ‘네가 구원이 완전히 이뤄졌느냐? 이제 율법을 치우겠다’ 이렇게 들어가는 것이다.
법이 언제까지 필요하냐? 법은 사람이 없어지면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언제까지 있을 것 같으냐?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가 죽을 때까지다. 세상적으로 보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다.
상상해 보면 마지막 날 한 사람이 딱 남았다면 그 한 사람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율법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누굴 두고 하는 말이냐? 다 본인 나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는 것은 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다짐이다. 말씀대로 너에게 이루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어떤 다짐이랄까?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는 별로다.
남녀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게 많은데, 성경의 계시적으로 보면 그게 다가 아니라 문제는 ‘하나님의 본질로 걸어가느냐’ 이게 문제다.
뱀이 여자의 발뒤꿈치를 문다고 했다. 과거를 자꾸 보게 한다는 거다. 뒤를 자꾸 보게 해서 앞으로 못 나가게 한다. 뱀은 사람의 발쪽을 물어서 눈이 땅 쪽을 바라보게 한다. 이게 사단 마귀의 역사다. 그럴 적마다 앞을 보면서 현재의 이 고통은 미래의 영광스런 자기를 위한 훈련으로 생각하고 나가야 한다.
인간은 과거를 생각하면 안 된다. 과거의 잘못된 것을 자꾸 생각하면 사단 마귀의 시험을 타게 된다. 과거는 지나가 버렸다. 과거를 생각하면 자꾸 원망 불평이 따라온다. 그런 자에게 앞으로 어떤 말할 수 없는 사건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진퇴양난이다. 그럴 때 자기 속의 무엇을 죽이려고 하나님께서 지금 작전을 쓰는가를 생각을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나가야 하는데, 앞으로 나가려면 홍해를 건너야 하는데 모세는 그 홍해를 건너는 장면에서 길이 있는지 없는지 다 안다. 애굽제국 대학에서 지형 지리공부를 다 했다. 그런데도 순종으로 간 거다. 하나님께서 길도 없는 곳으로 가라고 한다면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지금 뭘 죽일 작정이냐? 홍해를 완전히 건너기 전에 애굽군대를 죽일 작정이다.
또 홍해를 건넌 걸 세례라고도 하는데, 세례 받는 그것이 홍해를 건너면서 애굽세상을 끊는 거다. 세례라고 교회에서는 의식을 하지만 그러나 성령세례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안 바꾸면 그게 자꾸 네 뒤를 따라온다. 그러면 어찌 되겠느냐? 자기가 못하면 하나님 당신이 강권적으로 역사를 한다. 자기가 못 끊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한다면 그러면 그 마음속에서 ‘감사합니다’ 할까, 원망이 나올까? 원망이 나오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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