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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삶이란?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58 추천 수 0 2023.04.03 21: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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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32-4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5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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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abia.net/xe/1056465

설교보기 : https://youtu.be/7-JrK8ejf8Y 

성경본문 : 누가복음 12:32~40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성령강림 후 아홉째 주일,

2022년 8월7일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예수님은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한 교사였습니다. 특히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다른 것에 빗대서 설명하는 방식의 교수법입니다. 예를 들어 마 13장에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밭에 묻힌 보화 비유, 진주 장사 비유, 그물의 비유 등등입니다. 비유의 주제는 주로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도 비유가 나옵니다. 36절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이 한 구절만으로도 비유가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밤에 혼인예식이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시간 개념도 명확하지 않고, 사람들이 오가는 교통편도 불편해서 혼인예식의 시작과 마침 시간이 들쑥날쑥하였습니다. 하객으로 참석했던 주인이 집으로 돌아올 때 문을 열어주려면 그 집 종들은 밤새 졸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비유가 그 뒤로 이어집니다.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종들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 수도 있습니다. 너그러운 주인이라면 종들을 이해하겠지만, 인색한 주인이라면 화를 내겠지요. 이 비유에서는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들이 깨어있을 때 벌어지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37절에 따르면 주인이 띠를 띠고 종들에게 ‘수종’을 듭니다. 수종을 든다는 말은 발을 씻긴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원래 종이 주인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종의 발을 씻기는 주인은 없습니다. 일상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정도로 종들에게 복된 일이, 즉 좋은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겁니다. ‘복’이 있으리라는 표현이 37절과 38절에 반복됩니다.

 

종말론적 심판자

 

누가복음 공동체는 이 비유에 나오는 종들이 바로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를 ‘재림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본문 눅 12:35절이 묘사하듯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띤다는 말은 자리에 눕지 않고 당장 활동할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고, 등불을 켠다는 말도 밤중에 누군가를 맞을 준비를 마쳤다는 뜻입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누가복음 공동체만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도 이처럼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한다는 말인지는 막연해 보이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분들에게 일종의 ‘영적인 가이드’ 역할을 하고 싶어서 오늘 저는 설교자로 섰습니다.

오늘 비유의 마지막 구절인 40절이 단도직입적으로 이에 관한 실체적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인자’라는 단어가 아주 낯설 겁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습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가르침이 생각날지도 모르겠군요. 헬라어 ‘? Υ??? το? ?νθρ?που’(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를 한자로 인자(人子)라고 번역한 겁니다. 상당히 어색한 번역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번역하면 예수의 신성이 손상될지 모른다고 우리말 성경 번역자들이 염려해서 어색한 한자로 번역했나 봅니다. ‘호 휘오스 투 데우’라는 헬라어는 천자(天子)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번역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본문에 나오는 ‘인자’, 즉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의 기본 개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자는 구약 묵시 사상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세상 마지막 때 나타날 심판자’를 가리킵니다. 이 개념은 바벨론 포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고대 이스라엘은 명맥이 끊어졌습니다. 이미 140년 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다윗 왕조가 완전히 파멸한 겁니다. 참담한 상황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볼 때 바벨론은 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어떤 힘으로도 바벨론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무력감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 신앙도 포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인생살이에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바닥으로 떨어질 때 하나님을 더는 믿기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 역사에 개입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고대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묵시적 희망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초능력을 지닌 심판자를 보내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심판자는 종말론적 전권으로 바벨론 같은 절대 권력을 심판합니다. 어떤 세력도 심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심판자를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복음서에 나오는 ‘인자’를 ‘종말론적 심판자’로 바꿔 읽으십시오.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말론적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기에 과감하게 예수를 ‘인자’라고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자 개념은 고대 이스라엘의 바벨론 제국 경험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에 관한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세계 고대사에도 나오는 바벨론 제국은 당시 패권 국가였습니다. 그들이 정의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바벨론 제국의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바벨론의 법을 지켜야 하고, 그들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던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성경은 모든 국가, 모든 체제, 모든 문명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인다고 말합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심판받지 않은 국가는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심판받을 겁니다. 심판할 자는 바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국제 정치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소시민으로 사는 우리도 그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소비 중심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할 겁니다.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입고, 너무 많이 마십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향연을 즐기던 로마 시대 귀족들이 배불리 먹다가 더는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옆방에 가서 구토하고 다시 돌아와서 먹는 행태와 비슷한 일이 지금도 벌어집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자연까지 잡아먹을 태세입니다. 100년 후 우리 후손이 어떤 생태계를 맞게 될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과소비 중심의 이런 삶을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떻게 심판하실까요? 그걸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과잉 소비 행태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일지 모릅니다. 그런 행태는 곧 영혼의 만족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물론 저도 그런 행태에 속해서 삽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각오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기회입니다. 심판이 있어야만 인간 중심, 자기중심의 삶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심판이 없는 세상이야말로 끔찍한 세상이 아닐까요? 그런 세상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인자가 온다는 말이야말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미몽에 떨어진 사람들을 향한 종교적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과잉 소비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럭셔리한 삶의 진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정신 승리’, 또는 몽상가의 헛소리 정도로 취급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만 보면 그들의 생각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악인들이 늘 심판을 받는 게 아닙니다. 법망만 피하면 온갖 특혜는 다 누리면서 인생을 즐기는 이들도 꽤나 많습니다. 정직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만 손해라는 생각도 팽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심판하여 구원할 ‘인자가 오신다.’라는 말은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군것질거리를 얼마나 받느냐로 부모를 판단하는 어린아이와 비슷한 행태입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이미 꿰뚫어 보았기에 오늘 본문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

 

‘생각하지 않은 때’라는 표현은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는 게 실제로는 행복한 삶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이라고 생각한 게 오히려 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에 관해서 제가 일일이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제가 목사니까 목회 차원에서 한 말씀만 드린다면 이렇습니다. 목회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있다고 말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씀드리면 한국에서 말하는 그 목회 성공은 그 목회자에게, 그 목회자가 인격적이나 아니냐를 불문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습니다. 목회의 재미나 중압감으로 자기 영혼을 돌보지 못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온다는 말씀이 함축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뿐입니다.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다면 우리가 이미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심판은 곧 생명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미 일어난 생명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미래에 일어날 구원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사랑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며, 시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시가 자기에게 오기를 갈망하겠습니까.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종에 관한 오늘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도 여기에 있지 않을는지요.

 

비유를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주인은 종들이 깨어있는 걸 보았습니다. 띠를 띠고 종들을 자리에 앉힌 후에 종들의 발을 씻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위 세족식은 최고의 환대입니다. 요 13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의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리라는 사실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는 사실이 예고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에게서 최고의 환대를 받은 것입니다. 신적 경지의 환대입니다. 하나님의 환대가 곧 구원 경험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환대받았다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게 무슨 경험인지 전혀 모르시나요? ‘임마누엘’의 기쁨이 무엇인지, 용서받은 경험이 무언지 모르시나요?

 

공관복음 전승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신을 예고하신 뒤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함께 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모습이 그대로 나옵니다. 36절에는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십자가 처형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한 마디로 ‘죽고 싶지 않다.’라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셨다면 오히려 우리와 거리가 먼 분으로 생각됩니다. 우리와 똑같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셨기에 우리와 가까운 분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죽는 그 자리에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야말로 가장 거룩한 환대가 아닐까요? 그 환대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야말로 구원 경험이 아닐까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기자는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요 11:25~26) 담대하게 선포한 게 아닐까요? 이 사실을 믿었던 예수 제자들은 이미 지금 여기서 인자를, 즉 생명의 심판자를 경험한 게 아닐까요?

 

기다리는 삶

 

이 대목에서 정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생명의 심판자인 ‘인자’를 경험한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인자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벌이 꿀을 찾듯이 그 맛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알면 알수록 더 가까이 가게 되고, 모르면 아예 가까이 갈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비슷한 일들은 벌어집니다. 책 읽기에 눈을 뜨면 점점 더 많이, 그리고 깊이 읽습니다. 그림 그리기도 그렇고 음악 공부도 그렇겠지요. 구도적으로 그 길을 가게 됩니다. 세상일도 그러하니 하나님 경험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인자를 지금도 기다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의 삶에서 지금 어떻게 일어나는지, 죄와 죽음에서 어떻게 해방되는지를 점점 더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종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삶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당근에 매료되지도 않고, 채찍에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를 듣고, 내용이 관념적이라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일상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가능한 한 돈도 많이 벌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삶과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종의 삶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한 삶만으로 자신의 인생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설교자는 그런 삶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일반적인 삶이 결국은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둔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관심이 없다면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의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문을 열 준비를 마치셨나요? 이미 문을 열어본 적이 있나요? 어둠 가운데서 뭔가 환한 빛을 경험하셨나요? 그 경험이 생생하여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고 서 있는 사람이 되셨나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죽음을 맞을 준비를 마치셨나요? 일상에 쫓겨서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는 건 아닌가요? 기억하십시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이신 예수가 다시 오십니다. 아니 이미 오셨을지도 모릅니다. 등불을 더 밝히고 찾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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