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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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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59069 |
설교보기 : https://youtu.be/oXP3dWftOzM
성경본문 : 누가복음 17:11~19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창조절 여섯째 주일, 2022년 10월9일
눅 17:11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이미 눅 5:12절 이하에도 나옵니다. 이 대목에는 나병 환자 한 사람만 나오지만 눅 17장에는 열 사람이 나옵니다. 5장 이야기는 구조가 단순하고 17장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해집니다.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본래 있었던 5장 이야기를 교회가 확장해서 17장 이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받아들인 신학적인 의미가 17장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먼저 이야기의 진행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 지역을 지나는 중에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야 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가능한 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합니다.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순수하지 못하다 하여 꺼림칙하게 여긴 겁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역을 피하지 않았고, 비유를 가르치실 때도 사마리아 사람을 유대의 종교 엘리트들보다 더 좋게 평가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나병 환자 열 명이 멀리서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이 환자와 장애인을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눅 5:12절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이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시자 곧 나병이 떠나간 것으로 나오는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그들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그 말씀에 따라서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중간에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진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단락에서 아홉 명과 한 명의 태도가 갈립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아홉 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율법에 나오는 방식으로 적합한 종교의식을 집행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 명은 예수께 돌아와서 엎드리면서 감사의 예를 바쳤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해졌는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18절과 1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 돌아온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나 봅니다. 같은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사마리아 지역에 살면 유대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는 상황에서 이방인이었으니 그의 처지가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아홉 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겁니다. 저는 앞에서 이 아홉 명이 제사장에게로 가서 종교의식을 집행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중에 난치병이 나아서 기쁨 충만한 가운데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헌금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런 정도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이 이방인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처럼 말씀하신 걸까요?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기보다는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온 이 이방인에게 하신 말씀 중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짚는 게 좋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대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병 치유
예수께서는 이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롭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관해서 자주 말씀하셨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쳤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나병 환자였던 이방인에게 하신 말씀 역시 믿음으로 나병이나 이와 비슷한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 나병 환자들은 사회생활을 못 했고, 가족과도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지금 우리가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나병만이 아니라 고질적인 피부병을 모두 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피부에 병균이 침입하면 온갖 트러블이 생기는 병입니다. 아토피나 대상포진이나 건선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원숭이두창’이 유행할지 모른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의료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한 지금도 악성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은데, 2천 년 전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 외에도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가난, 가정 폭력, 우울증, 노동 재해 등등, 이런 일들의 극복이야말로 그걸 당한 이들에게는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중에 인간다운 삶이 무너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공중에 뜬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이 무너진 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세상의 구조 악에 대항해야 합니다. 교회가 정치에 직접 개입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정치 권력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경고하고 격려하고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구원은 그런 인간다운 삶의 회복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나병에서 놓여났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큰 차원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 이 사람에게서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당연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나병 환자가 치료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재난을 우리가 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가 나타나도 인간 세상의 모든 불행한 사건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운명과 인류 전체의 운명이 다 마찬가지로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세상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없는 세상)입니다. 예수님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는 나병과 같은 재난이 없을 수 없기에 그것을 제거하는 것만을 구원이라고 말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나병 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까지 구원받을 때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보다 훨씬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그분의 고유한 생명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성애자들만이 아니라 동성애자들까지, 자본주의를 체제에서 사는 이들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체제에서 사는 이들까지도,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만이 아니라 낮은 사람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배우자와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크게 부족한 배우자와 사는 사람도 모두 행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격이 고상한 사람만이 아니라 종종 민폐를 끼치는 사람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 돌아온 한 사람 이방인은 다른 아홉 명과 똑같이 나병에서 놓였으나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구원을 받은 겁니다. 이를 영혼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 구원이야말로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참된 복음입니다. 세상이 주는 구원과는 차원이 다른 구원입니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참된 구원이자,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런 구원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방인 이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또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그 ‘영광’(히브리어 카봇, 헬라어 독사)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순간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생명 충만, 또는 존재의 신비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사 6:3, 민 14:21, 시 8:1)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말도 들어보셨을 겁니다.(눅 2:14) 영광을 다른 말로 바꾸면 거룩하심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천사들이 세 번이나 거룩하다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표현합니다. 거룩하신 존재가 나타나는 순간을 가리켜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험이 어떤 건지를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상의 순간이 영원한 시간과 일치되는 경험은 자신이 느껴야만 현실이 되는 거 아닙니까. 비유적으로 저의 작은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매월 첫 주일 오후에는 서울 샘터교회를 방문합니다. 집에 돌아오면 대략 밤 11시입니다. 그 시간대에 제가 사는 원당 마을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가로등 불빛과 몇몇 집 창문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불빛만 비춥니다. 저의 집은 언덕 위에 자리하기에 집 뒤로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섰습니다. 밤에는 나무도 보이지 않고 그냥 흑암입니다. 달빛이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바로 옆에는 폐가가 있습니다. 너무 낯선 풍경입니다. 너무 낯설어서 다른 행성에 온 게 아닐까 하는 느낌까지 듭니다. 그런 느낌에 휩싸이면 ‘나’가 축소됩니다. ‘나’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흑암이 저의 영혼 전체를 휘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런 경험과 비슷합니다. 완전히 낯선 생명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성경은 가끔 그런 경험을 천사로 표현합니다.
계 4:1 이하에는 하나님에 관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는 ‘보좌에 앉으신 이’입니다. 그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무지개가 보좌를 둘렸다고 합니다. 보좌 둘레에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상상하기 힘든 풍경입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뜻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서 절대 타자(totaliter aliter)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절대 타자를 만나면 우리는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찬송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 영광
본문에서 이방인은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려서 감사했습니다. 그의 행동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방인의 행동은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본보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유대교 지도부와 예수님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 요소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이냐? 그리스도냐?”라고 그들은 예수께 따졌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여러분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예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인가요?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경험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애나 휴머니즘이 아니라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낯선 생명을, 즉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렬하고 충격적이었든지 무덤에 묻혔던 예수께서 그들 앞에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셨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낯선 생명을 경험할 때만 우리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게 곧 구원 경험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 생명을 경험하고 선포한 선지자나 랍비가 많았기에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유대교 및 이슬람교와 우리 그리스도교가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서 그 어떤 이로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진술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부활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두 가지 예를 생각해보십시오. 첫째, 여기 심한 장애인 남자와 비장애인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고 합시다. 그들의 사랑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양자역학의 원리는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현상을 직면할 뿐입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상투적인 방식의 삶에 익숙해서 예수라는 인격체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걸 경험한 제자들의 고백만, 즉 그 현상만 우리 앞에 놓여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21장에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낙심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원래 직업인 어부로 살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반복해서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해질 수 있긴 합니다. 그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만, 즉 예수께 가까이 갈 때만 예수님이 누군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 들어서만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이어받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시나요?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신비를 경험하셨나요? 이미 다 알고 있어서 더는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그리스도교 교양인이 되고 맙니다.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말(정보)에만 머문다면(고전 4:20) 얼마나 큰 비극이겠습니까.
제가 숙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물론 저 자신에게 주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죽기 전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생명의 극치를,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가족에게 설명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런 숙제를 함께 푸는 도반들이니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던 한 여인의 간절한 태도로(눅 15:8 이하) 그 길을 가봅시다. 나머지 일은 다 하나님께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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