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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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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8장 1절-8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절-6절: 무지와 무식과 무능은 과부 개인적인 원수뿐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자신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원수가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르면 속고, 신앙 면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 하나님의 본질의 의사단일성, 영적 이치를 모르면 자기가 스스로 속고, 뿐만 아니라 남을 또 속인다. 자기는 안다고 하는데 남을 속인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 속고, 하나님의 것을 주면 타(他)도 속지 않고, 영리하고 똑똑하고 총명하고 지혜롭고 유식하고 유능하고 이렇게 되지만 모르면 남으로부터 내가 속고, 내가 또 남을 속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니 피해도 막심하고, 그 피해는 영원히 간다. 영에 속한 문제는 크고 영원히 간다.
재판관은 이 과부의 원수를 알아야 하고, 여자가 이기도록 판정을 내려줘야 한다. 그러니까 재판관이라 할 때는 잘 알아야지 모르고는 판정을 못한다. 우리 기독자들은 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또 선지자적 속성을 갖고 있는데 모르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런 교인들이 성경의 깨달음과는 너무나도 멀다. 예수를 수십 년을 믿어도 세상 선악과 따먹은 타락되고 저주 받은 그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신앙한다고 하니 사람도 안 바꿔지고, 성령님의 역사도 없고, 있다고 한다면 교회에 오래 다닌 연수밖에 없다.
재판관은 여자가 이기도록 판정을 해야 한다. 기독교계 방송에서 신앙상담을 해 주던데, 그것도 일종의 재판인데, 이 방송을 온 세계적으로 한국인은 다 들을 텐데 들어보면 이건 아니다. 들어보니 여자집사가 어떤 집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에서 작정헌금을 남편이 평생을 모아도 못 모을 액수를 했다고 하면서 상담을 하던데, 대답을 해 주는 목사가 명확히 말을 해 주지 못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방송을 작정헌금을 하라고 한 목사도 들을 테니 그렇게 되면 두 목사가 싸울 것이 아니냐?
신앙문답은 성경을 알아야 한다. 모르면 솔로몬처럼 ‘이거다. 저거다’ 하고 판정을 못 내린다. 내릴 수가 없는 거다. 성경은 흑백이 나눠져야 한다. 딱 갈라져야 한다. 영원과 임시성이 갈라져야 하고, 세상 것과 천국이 갈라져야 하고, 생명적인 것과 사망적인 것이 신앙 속에 다 들어있으니 이게 갈라져야 한다. 판단이 딱 돼야 한다. 그것이 솔로몬의 지혜다. 죽은 것과 산 것을 딱 갈라내는 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다. 그냥 아기를 놓고 ‘누가 죽고, 누가 살았다’ 하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고, 솔로몬은 누가 산 아이의 어머니인지 딱 들추어낸다. 신앙은 정확히 갈라야 한다.
재판관은 과부가 이기도록 판정을 해야 한다. 과부의 원수는 무지 무식 무능이다. 그 원수를 갚아달라고 할 때는 갚아줘야 한다. 그걸 안 갚아주면 안 된다. 이 원통성에는 주님의 갚아주심의 소원성이 들어있다. 자기가 유식하면 유능하면 원수가 없을 테지. 그런데 우리는 다 무지 무능하고 알지 못하고 잘못되고 부족한 게 많다. 그래서 고칠 게 많다.
과부에게 있어서는 무식과 무지와 무능에서 유식이 되고 유능이 되어야 원한을 푸는 것이다. 그래서 과부는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당당히 재판을 요구한 것이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전쟁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7절-8절: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하지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무슨 믿음이 없다는 것이냐? 자기의 무식과 무지와 무능을 풀고픈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걸 푼다는 것은 그 면에 충만성이 들어있는 건데.
믿는 사람이 유능자가 돼야 하는데 지금 신앙상태가 굉장히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능하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하나님의 도덕성이나 하나님의 능력성이 없다. 하나님의 자나려고 하면 하나님의 것이 들어있어야 하는데 그건 없고 세상으로 가득 차 있으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만 들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해서 자타가 속아온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능하여 신앙 믿음의 성장 면에서 자라지 못한 이 원한을 풀 줄을 모른다. 자기가 속아온 것, 이용당한 것, 이 면에 대해 원한을 풀 줄을 알아야 하는데 풀 줄을 모른다. 언제 성도가 그러냐? 말세성도가 그렇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이룰구원에 대하여, 인간 자기를 지으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대한 구원을 모르고, 자기를 왜 인간으로 만들었는지를 모르고, 자기를 왜 성장케 하는 건지, 자기의 몸 안팎으로 왜 사건을 지나게 하는 건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왜 여러 가지 고통과 사건을 겪어야 하는 건지? 이걸 아는 게 구원인데 이 구원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그렇게 살아온 그 자기가 원수처럼 안 여겨지느냐? 말세의 성도들은 모르고 살아온 그 원수를 갚아야 하겠는데 그 자기가 원수처럼 안 여겨진다는 것이다. 남에게 속으면 죽이고 싶은데 자기가 몰라서 손해가 난 건데 그걸 모른다.
일반적으로 사기꾼에게 속았다면 자기의 원수가 사기꾼이 된다. 그런데 성경은 원수가 바로 너의 무식이요 무지라고 한다. 알았다면 어떻게 속아 넘어가겠느냐? 모르니 속아 넘어가는 거다. 자기는 똑똑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속을 못 보니 속아 넘어간다. 자기를 좋아해 주니까 그냥 속아 넘어가 버리고, 목사님이 ‘축복, 축복’ 하면서 복 빌어주니까 그만 넘어간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자기 부모형제 자식들이 거짓된 종에게 속어 넘어가고 이용당하고 있는데 이걸 영적인 면에서 눈에 보이듯이 안다면 그걸 어떻게 가만 두겠느냐? 눈에 보이는 면에 누군가가 가족을 끌고 가면 가만 내버려 두겠느냐?
영적인 면에서는 죄가 와서, 세상성적인 요소가 와서 끌고 가는 건데 그걸 모르니 가만히 있는 거다. 영적 면에서 죽는 건데 가만히 있다. 오히려 ‘가서 더 잘 하라’고 한다. 육적 살인만 알지 영적 살인은 모른다.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만 알지 인간 속에 그 사상이 와서 잡아먹는 걸 모른다.
모르고 살아온 그 자기가 원수처럼 느껴져야 하는데 그게 원수처럼 안 느껴진다.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능하여 마귀가 주최하는 거짓 종들에게, 이단자들에게, 자기의 옛사람에게 속아온 자신이 밉고 싫고 원수처럼 느껴지지를 않는다. 말세의 교인들이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의 원통성을 모른다는 말이다. 자기의 무지성을 모른다는 말이다.
기독자의 원수는 육에 속한 사적인 개인적인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공적이며 공의에 속한 원수다. 하나님 기준에서 보는 원수다. 자타의 이룰구원을 망치게 하고 안 되게 하는 것은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그런 면을 가르치고 활동한다면 어떤 언행심사 종교적인 행사라도 이건 구원이 안 되는 것이니 곧, 우리의 원수가 되는 짓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와 같이 모으지 않는 자는 해치는 자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운동에는 이치가 분명하고 본질이 분명하니 이건 구원운동이요, 주님이 같이 하는 거고, 성령님이 같이 한다. 그런데 모르니 협조 동참도 없고 도리어 핍박을 주고 환난을 주고 헐뜯고 한다. 이럴 때 내가 그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라. 남 탓할 것 없고 나만 바로 가면 된다.
재판관이 가진 법도 공의라야 하고, 재판관의 속성도 의로워야 한다. 법이 공의가 아니라든지 재판관의 속성이 의롭지 못하다면 여기서는 적중한 재판이 나오지를 않는다. 성도가 공의의 법 앞에 자기의 원한을 호소하면 재판관은 공의의 재판을 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무식과 무지와 무능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게 옳은 재판이다. 자칫 잘못하면 ‘과부를 누가 건드렸냐’ 하고 자꾸 딴 데서 찾으려고 하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사는 자기는 본문을 통해서 자기의 원수를 아는가? 자기의 원수를 아느냐? 그것 때문에 자기가 신앙 면에 피해를 보고, 안 그러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는데 어느 새 다짐한 그놈이 또 나와서 자기에게 피해를 주고,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해 놓고 지나고 나면 자기 마음도 아프고. 이게 다 자기의 원수다. 자기의 원수를 알고, 또 자기의 원한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한다.
자기의 이룰구원 면에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 영능의 실력자가 되지 못하게 한 자가 누구냐? 세상 말처럼 하면 자기를 출세 못하게 한 자가 누구냐? 영적으로 보면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지 못하게 한 자가 누구냐? 자기 실력이다. 자기의 실력을 한탄해야지. 그러니까 영능의 실력자가 되지 못하게 한 이 원수를 어디에 가서 찾느냐? 세상법정에 가서 ‘내 원수를 찾아주시오’ 하면 찾아주느냐? 그들도 영적인 면에서 모르는데? 성경에서 인간 자기의 무식과 무지와 무능을 지적해 주는구나.
오늘날 마귀와 거짓 종들에게 빠진 모든 기독자들이 과부의 끈질긴 근성만 뽑아다 세상에서 불타지고 썩어질 것을 구하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말하자면 설교로 통해서 나온 그 재판이 바로 된 것으로 보이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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