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9:22-27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9장 22절-27절: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22절-26절: ‘악한 종아 내가 네가 한 말로 너를 판단하겠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았느냐. 맡겼다면 이자라도 내가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자에게 주라.’ 한 므나를 가진 자가 그 한 므나를 빼앗길 때 어떤 마음이 들까? 줄 때, 받을 때, 찾을 때의 느낌이 같겠느냐?
하나를 가지고 열을 남긴 자는 죽을힘을 다 했을 것이다. 열이란 최대 만수 열이다. 노력을 다하는 의미에서의, 힘을 다하는 면에서의 만수이다. 셈을 하는 것만 보지 말고 셈을 하게 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을 남겼다면 보통 노력이 아니었구나’ 이게 들어간다. 노력을 안 하고서야 어떻게 남기겠느냐?
이 말씀을 들을 때 나의 신앙의 마음이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면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했으면 한 것만큼의 자기, 안 했으면 안 한 것만큼 자기에게 들어있다.
그런데 빼앗긴 자도 있고,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맡긴 것을 볼 때 자기가 노력을 한 만큼 격차가 벌어진 것을 볼 수 있으니 세상은 격차적인 세상임을 알 수 있듯이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 믿음의 성장적인 면에서 노력을 안 한다면 뭐가 되겠느냐? 이방종교 같으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예수 믿는 세계는 그게 아니다. 노력을 할수록 자기에게는 은혜가 들어가는 거다.
여리고 성의 구원 얻은 라합을 봐도 그 일가친척이 원래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산 것이 아니라 라합이 노력을 해서 소식을 전해서 그 복음을 듣고 다 방에 들어가니까 약속대로 다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믿는 쪽으로 노력,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쪽으로 노력이니 살렸다. 사는 노력이라야 사람을 살린다. 사람의 죽은 노력은 살림을 못 받는다. 열심을 부리기는 하는데 산 것이 아닌 것이 있다. 이건 죽은 노력이다.
열을 남긴 자와 다섯을 남긴 자가 어쨌든 격차가 났다. ‘다섯을 남긴 자는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열을 남긴 자는 열 고을을 다스려라.’ 그러면 다섯 고을을 차지한 사람이 하나마저 빼앗긴 자와 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을 보고 아무 생각이 없겠느냐? 우리 입장에서 깨닫고 비교를 해 볼 때 다섯 고을을 차지하는 이 자가 열 고을을 차지하는 쪽으로 비교를 해야 하느냐, 하나마저도 빼앗기고 피지도 못한 그 사람과 비교를 해야 되겠느냐? 열 고을 쪽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과 비교를 하고 있느냐? 세상 쪽으로 보고 자기를 비교하느냐? 그래서 세상을 따라가려고 하느냐? 세상 쪽을 향해서 ‘조금 더, 조금 더’ 하고 있지 않느냐? 그건 신앙이 아니다. 이건 이방인과 똑같은 신앙사상이다.
그런데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있는 자는 받겠고’ 했으니 한 므나를 빼앗아서 누구에게 준 거냐?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 주었다. 그러면 이 말씀이 ‘너는 많이 남겼으니 하나 더 가져라’ 그 말인가? 이건 덤이다. 무엇이 있는 자가 받았느냐? 받을 마음이 있는 자는 받는 거다. 이건 물질을 들어 속의 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열 고을을 받은 자는 키울 마음 있어서 노력을 했고, 노력을 하니 열을 남겼고, 또한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었고, 그리고 하나는 덤으로 더 받았다. 그러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니 손해가 없다.
내가 예수 믿으면서 손해가 났다면 어느 쪽인지, 이익이 났다면 어느 쪽인지를 잘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이 하신 말씀인즉 물질이 좀 손해가 나더라도 자기의 신앙 믿음은 빼앗기지 말라고 했다. 신앙 믿음 빼앗긴 것은 생명을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다. 네 복을 빼앗긴 거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예수 믿어 천국만 가면 되는 거냐? 지금 성경에 그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이룰구원을 못 이룬 것만큼 자기 속에는 그만큼 앙화가 들어있다. 고약한 말로 한다면 너는 찍혔다.
우리교회에 와서 손해가 나면 안 된다. 무슨 말이냐? 하나라도 깨달아졌으면 깨달아진 대로 유익이 들어가고, 깨달아진 것만큼 자기 생활 속에서 지혜를 쓰고 정복해 들어가야 한다. 그런 믿음이라야지 되는 거지 맨 날 앉아서 세상 것을 달라고만 하는 건 거지다.
하늘의 것만 해도 사용하는 면의 지능지수를 개발하는 것도 한이 없는 건데 그건 알지도 못한 채 언젠가 천국에 들어갈 자기임에도 땅의 것을 욕심낸다는 건 심판감이요 저주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길거리에 앉아서 거지행세를 하고 있으니 하늘의 아버지가 가만있겠느냐?
쉽게 말해서 왕의 자식이 길거리에 앉아서 돈을 구걸하고 있다면 왕이 아버지로서 그 자식을 불쌍하다고 그냥 놔두겠느냐? 누구 얼굴이 더러워지는 것이냐? 왕의 얼굴이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더럽게 만들었으니 더럽게 만든 그 자식을 가만두겠느냐? 결국은 자기 얼굴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이건 인격에 관한 면의 말이다.
인격을 가졌다면 자기 얼굴이 부끄럽고 체면이 구겨지는 걸 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세상 물질욕심만 있으면 인격이 없는 짐승은 밥만 먹고 똥만 싸면 다 인줄로 아는 것처럼 그것도 모른다. 자기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는지 그걸 모른다.
‘있는 자는 받겠고.’ 비록 하나이지만 키울 마음이 있어서 노력을 했고, 그래서 열을 남겼고 열 고을을 받았고. 손해가 없다.
우리교회에 와서 손해 보면 안 된다. 깨달음에 손해 보면 안 되고, 살아가는 면에서도 신앙 믿음을 팔아먹는 손해를 보면 안 된다. 물질적인 모든 면에서도 뭔가가 그래도 유익이 있어야지 멍청한 짓을 해서 저주를 받거나 손해 보는 짓을 하다가 세상에서 밥만 먹고 가면 안 된다. 이건 손해 보는 인생이다. 신:에 ‘머리가 되고’ 했는데 머리가 안 되면 중간쯤이라도 가야지. 꼬리에서 중간으로라도 가야지. 의욕성이 없이 예수 믿으면 안 된다.
‘없는 자는.’ 뭐가 없는 것이냐? 있는 자와 반대로 본다면? 키울 마음이 없는 자. 없는 자는 하나를 가지고도 키울 마음도 없고 노력도 없었으니 하나마저 빼앗길 수밖에 없는 거다.
하나마저 빼앗겼다고 할 때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빼앗은 걸까? 사랑을 해서 빼앗은 거냐, 괘씸해서 빼앗은 거냐? 괘씸해서 빼앗은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때릴 때 자식이 얻어맞으면서도 말을 잘못하면 때리는 사람이 괘씸해서 더 때리는 경우가 있다.
나는 살아있는 진리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그냥 의미 없이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깨닫고 키울 목적으로, 잘 믿어보자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해보자고, 하나님의 역사가 되게 믿어보자고 그런 마음으로 듣고 있는 건지? 마음만 있으면 성장이 되고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것인데 생각도 없고 마음도 없었다면 괘씸죄에 걸려서 모두 빼앗기고 처절하고 비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두 번 세 번 ‘내 백성을 내보내라’ 하는데 자꾸 자기 욕심만 차리다가 결국은 처음 난 아들, 처음 난 짐승 등 처음 것은 다 죽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 가정의 축복은 다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 가정의 희망 소망이라는 것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다 끊어졌다 그 말이다. 그러니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이걸 생각을 해 봐라.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왕처럼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고 세상 제일주의로 세상 쪽으로 욕심을 부리며 살거나, 예수 믿는 성도를 핍박주고 환난주고 옳은 것을 자기 속에서 미워하고 싫어하고 생각 없이 살다가는 결국은 다 빼앗기고 저주요 처참이요 비참이다. 왜 사람이 그렇게 되도록 사느냐?
27절: 사학적으로는 로마 디도장군에 의해 주후 70년, 즉 예수님 부활 승천 후 주후 70년에 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듯이 예수님께서 재림으로 오실 때 심판의 장면을 우리들에게 미리 보여주는 거다. 또 깨달을 것은 한 므나에서 열 므나로, 그리고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고, 나아가 또 한 므나를 덤으로 더 받았으니 주인의 말씀을 믿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보람이 난다. 주인의 종으로 산 결과가 분명히 있다. 인생으로 본다면 과연 한 인생을 헛살지 않은 보람이 있다.
목사님들이 제각기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겠지만 주님 당신이 보실 때 ‘난 너를 나의 종 삼은 일이 없다’ 그런 일이 없겠느냐? 거짓 종들은 그런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다섯 므나를 남긴 자는 참 아쉽다. 다 같은 한 므나로 시작을 했는데 이 사람은 열 므나의 절반이다. ‘좀 더 인생 삶의 깊이를 생각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된다. 인간 자기를 만든 존재목적, 창조의 목적, 재세기간의 목적을 좀 더 깊이 생각을 했더라면 너도 그렇게 열 므나를 받을 것이 아니냐?
네가 남을 판단할 줄 안다면 말씀을 놓고 너를 판단을 해 봐라. 네가 누구냐? 열 므나를 남긴 자냐, 다섯 므나를 남긴 자냐, 한 므나를 수건에 쌓아둔 자냐? 어느 너냐? 우리 모두 지금까지 얼마나 남겼는지 생각을 해 봐라.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남길지? 하나도 못 남겼다면 앞으로도 남기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남기는 인생이 돼야 한다.
세상 일반적으로도 보면 세상에 살면서 별 볼일 없는 인생으로 늙은 사람을 많이 본다. 가정도 사랑 못하고, 식구들 이리저리 흩어지게 만들고, 월급 타서 본인이 술 먹고 아무 데서나 자고. 이리저리 생각을 해 보면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많다. 인간쓰레기다.
있는 것도 빼앗기는 인생. 다 똑같이 하나를 주고 똑같이 기회를 주었는데도 주인집에서 종으로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인생을 깨달았는지? 인생을 살아온 보람이 뭐냐?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의 보람이 뭐냐? 깨닫는 보람이 뭐냐? 나이 많은 걸 자랑하는 거냐? 밥 많이 먹은 걸 자랑하는 거냐? 있는 것도 빼앗기는 인생 참 불쌍하고 가련하고 처절하다.
주인이 왕 되기를 싫어하던 자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왕 되기를 싫어하던 그들, 살아있는 말씀통치를 싫어하던 그들, 인간 자기의 출생과 존재목적을 싫어하던 그들, 세상목적으로 살던 자들 모두 죽임을 당했으니 이런 사람들은 인간으로 출생을 해서 한 평생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 앞에 죽임을 당했으니 이건 기다리다 기다리다 죽임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존재의 가치가 있으나 마나다. 완전히 심판으로 헛산 인생이다. 인간으로 존재목적을 분명히 갖고 태어났는데 이 존재목적이 없어진 것과 같다. 그러니 하나의 짐승이다. 사람의 껍데기를 둘러 쓴 짐승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온 것은 없느냐? ‘현재적 자기가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미래적으로 어떤 결과가 올까’ 하는 생각을 안 하느냐? 현실에 만족하면 그만이냐? 하나마저 빼앗긴 이 종은 주인집에 살면서 주인이 기회 주고 자본 주고 했는데도 그 모양이니 죽임을 당함이 마땅하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사형에 마땅한 자로 산다면 어찌 될까? 예수님을 믿는 깨달음이 자기의 일생의 삶이 되는 거다. 깨닫는 사람은 그 깨달음이 자기 복이 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