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21:1-4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1장 1절-4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는 이건 그냥 고개를 드는 게 아니라 그 계시의 정신은 연보를 하는 사람을 한 차원 더 올려서 보시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결론을 미리 당겨서 말한다면 헌금을 할 때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겠느냐, 헌금을 하는 사람의 마음중심이 중요한 것이겠느냐? 마음중심이다. 이 점을 미리 깔아놓고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전 안에서 무엇을 보셨는가 하니 연보궤에 부자가 헌금하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하는 것을 보셨다. ‘누가 많이 하고, 누가 적고 하고’ 하는 액수를 보신 게 아니라 헌금하는 사람의 형편과 마음중심을 보셨다.
‘마음중심은 이러이러한데 그 사람의 형편이’ 하는 게 있다. 그래서 부자가 헌금하는 것과, 과부가 헌금을 하는 것에는 그들의 형편이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오늘날 헌금을 하는 우리의 마음도 보시겠느냐? 보신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헌금을 하는 그 마음중심이 어떻게 무엇을 생각하면서 하는 건지? 부자 될 마음으로 넣는 건지, 부자고 가난이고 생각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은혜 받은 것이 많아서 감사함으로 넣는 건지, 아니면 은혜를 받을 목적으로 넣는 건지? 그 마음이 있는 거다. 아니면 ‘남이 하니 나도, 옆의 사람이 보니 나도’ 그런 게 있을 수도 있다. 헌금을 하는 자세는 미리 준비하는 그게 나와야 한다.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의례히 생각을 한다. 또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믿음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각의 발상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지식을 기준적 지식을 가지고 보는 발상이요 생각이요 눈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말씀의 이치는 못 깨닫는다. 그래서 생각하는 발상이 중요하다.
아담 타락 이후부터 마지막 때까지 이 세상에는 지식이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저주받은 그 지식의 개념으로 사는 이방세상의 지식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이 있다. 이방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으로 살지를 않는다.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 지식을 기준으로 하고 판단도 하고 가치도 두고 소원 목적을 두고 살았지만 믿은 후에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으니 이 성경의 지식으로 사는 거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게 생명과를 먹는 거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중이 들어있는데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우리의 소원 목적 취미 추구 지향성으로 삼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생명과를 먹는 거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것이 우리에게 들어갈 수 있는 터를 예수님이 닦아 놨다. 다시 말하면 믿는 사람들은 생명과를 먹고, 생명과를 먹은 그 지식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세우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지식은 생명적 지식이요, 그 지식에서 나오는 지혜는 생명적 지혜요, 그 지식에서 나오는 선 사랑 거룩 진실도 하나님의 신적인 것으로서 그 옳음이 능력적으로 들어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세상이 말하는 지식의 소원 목적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는 소원 목적의 지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면 지식전환이 돼야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도 전환이 되면서 신적인 성품으로 하나님의 온전으로 들어가게 되는 건데, 이게 성경의 기록목적인데, 모든 성경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따라 살면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으로 닮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된 자들과 이단자들은 그 지식이 생명과를 먹은 지식이 아니고 세상 선악과 먹은 그 지식의 기준의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예수이름으로 세상을 목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성경의 뜻, 하나님의 뜻, 천국의 성질 성격 성분이 나오는 게 아니라 육적이고 임시적이고 세상적인 정신과 소원 목적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지식은 하나님 앞에 할례를 받지를 못한 지식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이 안 바뀌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천국의 성격으로, 천국의 성질로, 천국의 도덕성으로, 모든 것이 신적으로 바껴야 하는 건데 ‘하나님의 말씀, 말씀’ 하면서 세상으로 소원 목적을 하고 있으니 그 속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그 중심이 천국이 아닌 세상으로 가 있으니 교회라면 생명과를 먹어야 하겠는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질적으로 세상을 추구하고 있으니 이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요, 이게 바로 외식신앙이다.
원리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영생과 생명과를 먹으면 온전의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중심으로(주-인본주의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 들어가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성경은 우리의 영인성장 면이 잘 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기준지식의 개념으로 말을 하고, 십계명도 일반 사회 윤리 도덕성의 개념으로 말을 하니 그게 어떻게 복음이냐? 이건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다른 복음을 받는 자도 저주다. 저주란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인격적으로 되는 면은 완전히 망한다는 말이다. 충성봉사를 계속 강조하니 겉으로 보기에는 뭔가 일이 되는 것 같은데 속사람은 완전히 죽었다. 이게 유형교회를 영의 눈으로 보는 지식이다.
이 세상에는 지식이 두 가지다.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지식과, 선악과를 나온 지식 두 가지 지식밖에 없다. 우리교회에서는 지식을 바꿔야 한다. 하나의 종교적 지식으로 갖고 있지 말고 하나님의 의사, 뜻, 소원 목적,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하나님 본질, 즉 썩지 않고 불에 타지 않고 진동 변동이 영원히 없는 이것이 생명과의 지식이다. 그런 사람으로 되는 게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이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돼 있지 않으면 시대적 종교적 유행바람, 시대적 과학 문화 정치바람에 다 휘말리게 돼 있다. 예수님은 휘말리지를 않았다. 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당신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사람은 그렇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존재성만 ‘예수님, 하나님’ 하고 말을 할 뿐이지 그 분 속의 소원 목적이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지 그 면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할 때 받을 줄도 모른다. 결국 내 쪽에서 하나의 종교적 지식으로 ‘주님께서 날 위해 돌아가셨으니, 날 구원했으니 나는 그 보답을 해 드려야겠다’ 하면서 일을 크게 만들려 하고 있다. 계:에서는 그게 큰 음녀 바벨론이라고 한다. 이건 불에 타고 만다. 우리는 말씀의 이치가 깨달아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가 있는데 거짓된 인도자들이 모여서 ‘저거는 이단이다’ 하는 것도 있고, 또 이단자들의 입장에서 거짓된 교회 목사를 보고 ‘저건 이단이다’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단이라고 하는 그들의 지식이 하나님의 본질이냐’ 하고 볼 때는 ‘이것도 저것도 거짓이고, 큰 것도 거짓이고 작은 것도 거짓이고’ 한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크기 때문에 진짜고 작기 때문에 거짓이 아니라, 인간 내 경험으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본질에서 판단이 나는 거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판단이 안 되면 종교적인 잣대로 판단하기 마련이고, 자기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이건 정확하지를 않다.
교회가 이런 잣대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외식으로 흐르게 돼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외식이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참 교회는, 참 종들은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예수 닮은 사람으로 성장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이 이르기까지 성장하라. 장성하라.’ 이건 속성이요 인격이요 성품이다. ‘덩어리를 키워라’ 그런 의미가 아니다. 덩어리가 커지더라도 본질에서 큰 것이 아니라면 이건 큰일 날 일이다. 이질로 커지면 어쩔 것인가?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질로 커지는 건지, 본질로 커지는 건지 그 지식조차도 모른 채 키워놓으면 무조건 성공이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한다. 그런 사고방식의 신앙은 하나님 기준은 없고 세상기준이다.
계:에 보니 잣대를 가지고 성전 밖은 재지를 말고 성전 안을 재라고 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을 향해서 ‘나쁜 놈, 지옥 갈 놈, 죄 많은 놈’ 하며 재지 말고 믿는 사람을 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잣대는 어느 잣대라야 정확한 거냐? 공자의 도덕성의 잣대냐, 불교의 석가의 잣대냐? 누구의 잣대를 가지고 교회 안을, 신앙 믿음을 재야 정확한 거냐?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오늘날 말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세상기준 개념의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보고, 목회도 보고 ‘믿음 있네. 없네’를 따진다.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세계적으로나 한국에서나 어느 사람이 능력이 많고 믿음이 제일 좋은 것이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3년 동안 가르쳤는데도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그런데 오늘날 규모가 큰 교회는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도 있다. 그러면 누가 더 능력이 좋은 것이냐? 예수냐, 그 목사냐? 목사다. 자기중심 속에 저울추가 은근히 자기에게 무겁게 내려져 있다.
그러면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교인이 많은 그게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예수님의 본질이 아닌 이질로 커졌다면 그건 다 쓰레기로 취급이 되는 거다.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 거리를 찾아보라.’ 이게 본질을 가진 신앙자를 찾는 거냐, 덩어리 많이 모인 데를 찾는 거냐?
우리가 신구약을 보더라도, 창:1을 봐도, 계: 마지막까지 봐도 일괄적으로 하나님의 온전으로 들어가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어느 성경구절이던 온전이라는 게 들어있다. 따라서 설교를 해도, 성경을 해석을 해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은 본질이시니 그 본질로 내가 닮아야 한다.
신앙을 종교적인 잣대로 보면 안 된다. 부피 덩어리를 잣대로 보면 안 된다. 신앙을 단순히 그 사람의 활동으로만 보면 안 된다. 활동을 봤느냐? ‘그 활동이 어디에 뿌리를 박고 나오느냐’ 하는 그 생각의 뿌리를, 사상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야 한다. 선악과 먹은 그 지식에 뿌리를 박고 소원 목적을 하고 나온 건지, 생명과를 먹은 하늘의 뜻에 뿌리를 박고 나온 건지를 알아야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말을 하는 그 근원이 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거기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니까 열매를 세상에서 보려고 한다. 그 세상은 해 아래의 것이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왔으니, 예수가 하늘로부터 왔으니 거기에 뿌리를 박아놓으면 그 물은, 그 영생수는 하나님의 온전으로 사람이 성장되도록 원리가 돼 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바리새교인들의 신앙사상과 같은 질이 돼버린다. 율법사 또는 서기관 또는 대제사장들은 외모 외형적으로 예배의식이 아주 거창하고 구약 식으로 그대로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는 없구나. 구원은 없구나. 진리는 없구나.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런 의식은 없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주님의 형상이 그들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로써 이뤄져 간다. 이게 진짜다.
껍데기는 있는데 알맹이가 열리지 않은 콩도 있다. 이건 짐승의 밥이 된다.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성령의 열매로 그 속성이 주님의 신적 도덕성으로 알알이 열리지 못하면 이건 껍데기다. 껍데기는 발아래 밟히고, 짐승의 밥이 되고, 쓰레기가 된다. 오늘날 그런 기독자들이 많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봉사하는 사람을 보고 ‘봉사만 한다고 해서 다 믿음이 좋으냐’ 한다. 이건 이상하다. 봉사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하건 그런 말을 하는 자기는 안 하고 있으면서 하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건 이상하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공부도 안 하고 시험을 치면 맨날 영점을 받으면서 공부 잘 하는 학생을 보고 ‘공부만 잘 하면 제일인가’ 한다면 이상한 말이 되는 거다. 격에 안 맞는 말이다. 조금만 지나면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결과는 천지차이로 다른 거다. 그런 걸 생각을 못한다. 그런 것처럼 예수를 믿는데 그 궁극적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는 교인들이 많다. 성경은 다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러니까 남이 잘 하는 것을 헐뜯는 사람은 사단의 짓이요, 이치를 밝혀주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다. 교회적으로도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저 목사는 어떻고, 저 교회는 어떻고’ 하며 헐뜯는 것은 이단자들에게 먹잇감이 된다. 이단자들은 행동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된 걸 자꾸 헐뜯으면서 자기 쪽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진리의 종은 행동 활동 이전에 말하는 사람의 그 속 중심의 근원적 뿌리가 ‘하나님의 본질이냐, 아니냐’를 따져 들어간다.
마7:에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비판을 받는다’ 했는데, 어떤 지식을 기준을 삼아서 비판을 하느냐? 비판에는 옳은 것을 헐뜯는 비판이 있고, 옳은 지식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비판을 한다면 이건 비판이 아니라 흑백을 나누고 빛과 어둠을 나눠서 구별시키는 거다. 행동 활동을 가지고 말을 한다면 이건 어떤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는 거냐? 선악과 먹고 나온 타락적 세상적 기준이나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거고, 외모 외형 덩어리를 가지고 비판을 하는 거다.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하는 비판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진리지식을 받고 나서 ‘내가 그동안 헌금도 많이 했고 잘 했는데 이제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이용만 당했구나’ 한다. 우리가 이런 깨달음이 됐을 때 육적 세상적 종교적으로 흐르는 곳에는 헌금을 할 수가 없다. 왜? 그런 곳에 헌금을 하게 되면 결국은 거짓을 키우는 면이 되겠고, 거짓에 동참 협조 참여의 의미가 되니 그렇다. 세상에만 남에게 이용당하는 게 있느냐? 기독교 안에도 있다.
이 말을 듣고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더 많이 깨달을 때까지는 헌금도 안 하고 봉사도 안 하고, 또 옳은 교회를 발견했어도 그곳에서 아무 것도 안 하련다’ 한다면 이게 똑바로 된 신앙이냐? 이것도 육의 생각이다. 이건 자기 판단에 자기가 또 속는 것이다. 그러니 받을 은혜도 또 못 받는다.
‘하나님 앞에 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했는데 거짓된 인도자들이 이 성경구절을 들고 교인들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앞에 올 때는 빈손 들고 오지 말라’ 하신 것이 무슨 뜻이냐? 신령계와 물질계가 다 당신의 것인데 교인들로부터 돈 뺏어먹으려는 거냐?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되는 진리본질의 교회라고 전제를 하고 그런 교회에 갈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것이다.
이걸 예를 들어서 해석을 하자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랐느냐? 그러면 버린 그게 다 누구의 것이냐? 다 주님의 것이다. 그러면 버린 그 자들을 통통 망해서 알거지가 되게 하실까?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당신의 것이다. ‘당신은 만능의 능력자라’는 말씀 속에는 당신의 참 자녀들, 참 종들을 위해서 그 모든 것들 동원시킨다는 것이 들어있다. 그런데 그걸 못 믿고 안 믿는다. 해와 달까지 멈추는 그 분인데도 못 믿는 믿음이고 안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 만물은 모두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섭리가 있는 건데 그건 안 보이고 자꾸 자기 노력을 하고 힘을 쓰고 떼를 써서 달라고만 하니 그게 믿음이냐? 이건 믿음이 아니다.
믿음도 질이 있는 거다. 이질적인 믿음, 이질적인 지식. 그러면 믿음은 어디서 나는 거냐?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지식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거다. 왜? 본질적인 진리지식을 듣게 되면 그 분을 알게 되고, 그 분이 알아질수록 자꾸 내 믿음이 커지는 거다. 그 분을 바로 모르면 믿음이 안 생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주관적인 것으로 자꾸 어떻게 하겠다는 그것만 커진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 내 속에 들어온 건 없고 내 속에서 뭘 하겠다는 주장만 자꾸 생기고, 꾀만 생기고, 프로그램만 생긴다.
헌금을 할 때 은혜를 받기 위한 헌금이 있다. 이건 본질의 교회에 하는 헌금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질적인 세상적인 교회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앞에 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은 진리본질의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 세상적으로 나가는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은 아니다.
은혜를 받기 위한 헌금도 있고, 또는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하는 헌금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었어도 진리이치를 못 깨달았는데 이제 이걸 깨닫고 보니 보는 세계가 달라지는구나. 하늘 문이 열리는구나, 세상 흐름이 다 보이는구나. 사람 속에 다 보이는구나’ 해서 하는 헌금도 있다.
또 인간들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서 헌금을 하는 것도 있다. 행: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논밭을 판 돈 얼마를 감춘 것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 앞에 보면 누가 칭찬을 많이 받았느냐? 바라바. 바라바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사람들이 존경을 하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런 생각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런 사고 발상을 가진 잘못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참 많다.
일반세상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가지고 말할 때는 일반세상은 말을 하나마나 옳은 진리이치에 의해서 그냥 따라오는 거다. 교회를 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를 보고 하는 말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처음의 마음은 판 돈을 다 헌금을 하려고 했는데 그만 나쁜 마음이 든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나쁜 마음으로 한 것인지? 어쨌든 얼마를 감추고 헌금을 했다. 그렇게 사도를 속인 것은 결국 사도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이걸 우리교인들이 잘 알아야 한다. 진리의 종을 발견했으면 그 배후의 하나님을 보고 따라가야 한다. 자칫 잘못해서 인간을 신성시 하면 큰일 난다. 그 분 속에 들어있는 진리이치를 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존경해야 하는 거다.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선지자를 가까이 하니 그 선지자가 미래를 자꾸 알게 하는 것이니 이게 그 사람에게는 선지자의 상이다. 하나님의 하실 일에 대해서 미래를 알게 하는 것.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시험이 들어서 얼마를 감추고 헌금을 했는데, 결국은 하나님 속이고, 사도를 속이고, 자기 양심도 속이고 결국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 그러면 그 감춰둔 돈을 누가 가져갔을까? 참 어리석다. 저주를 받아서 그 돈 다 못 쓰고 죽었다. 결국 남이 쓰게 된다. 주님의 일에 마음이 없는 사람이 감춰둔 그 돈을 누가 쓸까? 남이 쓰게 된다. 하나님의 사건적 허락이 안 돼서 그렇지.
안 믿는 사람들이 그런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겠는데 그러나 생명보험을 드는 게 죄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생명보험을 들 수가 없다. 세상에 있는 생명보험의 의미가 생명연장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말의 의미가 그런 암시가 들어있는 거다. 빨리 죽는다는 게 생명보험이 아니다. 병이 들었을 때 돈을 들여서 연장시킨다는 그게 들어있는 거다. 그러면 내 생명은 누가 연장을 시키는 거고, 내 건강은 누가 주관하는 거냐? 주님이시다. 그래서 내가 만일 암보험을 든다면 내 양심에서 하는 소리가 하나님께서 ‘그래? 그러면 내가 너에게 암이 걸리게 하지’ 할 것 같다. 나는 그게 무서워서 암보험을 못 들겠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알아서 하라. 암보험을 들어서 미리 준비하는 게 믿음이 있는 거냐? 각자 알아서 생각을 해 봐라.
가룟유다도 예수 팔아서 그 돈 다 못 쓰고 목매달아 배 터져 죽었다. 가룟유다가 떨어진 그 밑에 있었던 돌이 언제부터 있었던 돌이냐? 창세 때부터다. 가룟유다가 목을 매달았던 그 옆에 심어놓은 나무도 하나님이 창세 때부터 심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정말 신비롭다. 가룟유다의 미래를 미리 알고 그런 것들을 준비해 놓은 것이 아니냐? 인간계획에 들지 않는 게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어떤 계획도 할 수가 없다. 준비만 해 놓고 있다가 기회를 주시면 ‘이때다’ 하고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쓰는 게 믿음의 사람이요 지혜의 사람이다.
혹시 큰 깨달음의 은혜를 받고 나서 단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결심을 했는데 그만 시험이 들어서 못 한 것이 있느냐? 그러면 경험을 해 봐라. 그러다가 돈 자루에 구멍이 난 것처럼 몇 배의 손해가 난 적은 없느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손해를 본 적이 있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