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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2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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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
누가복음 (38강) 하나님의 큰 일
2012.12.02 13:29
눅8:26-39
<본문>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설교>
◉ 귀신 들림 ◉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 우리가 많이 궁금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사람으로 봐야 하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확인되는 귀신 들린 사람의 상태는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사람도 오래 옷을 입지 않고, 집이 아니라 무덤 사이에서 지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은 모두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귀신 들린 것으로 여겨야 할까요?
저는 소위 축귀의 능력이 있다는 목사로부터 귀신을 쫓아낸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말한 귀신 들린 사람의 상태는 이러했습니다. 일단 귀신 들렸다고 한 그 사람은 그 교회를 다닌 청년 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를 욕하며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발작을 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놀라서 축귀의 능력이 있다고 하는 담임목사를 부른 것이고, 그 목사가 청년 교인을 붙들고 안수 기도를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자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런 일을 실제로 접했다면 신기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얘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그처럼 눈에 드러난 현상에 매이는 것은 신앙생활에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먼저 주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그 같은 현상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보다는 무당의 세계에서 오히려 더 실감 있게 접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귀신들린 사람은 겨우 발작 정도이지만 무당의 세계에서는 실제로 귀신과 소통을 하고, 신이 내린 사람은 작두위에서 춤까지 춘다고 하니 더 실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무당은 정상적인 사람일까요 귀신들린 사람일까요. 무당이라고 해서 그 행동이나 생활 자체가 정신이상자처럼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반 사람과는 다른 것이 있겠지만 본문의 귀신 들린 사람처럼 옷을 벗고 집이 아닌 무덤에서 지내는 것처럼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생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거라사인은 이방인들입니다. 따라서 귀신들린 사람도 이방인이며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일을 목격한 모든 거라사인들도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에 대해서도 물론 관심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 즉 우상을 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거라사인들은 귀신 들리지 않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단정하게 옷을 입고 무덤이 아닌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해서 귀신 들리지 않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가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연 귀신 들린 사람이 누군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밖에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귀신 들린 사람, 정상적인 사람으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시각에서 정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아무리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심지어는 수준 높은 도덕과 윤리적인 모습을 유지한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다면 그는 귀신 들린 상태, 즉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귀신 들린 자의 행동 ◉
예수님은 그 사람을 지배하는 더러운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 하십니다(29절). 그리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귀신이 ‘군대’라고 답합니다(30절). 이것은 군대처럼 많은 귀신이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강하고 악한 영에 사로잡힌 그 사람에게서 나타난 현상은 단지 옷을 입지 않고 무덤에서 지낸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지만 그 맨 것을 끊고 광야로 나갔다고 한 것을 보면 귀신에 의해 쇠사슬까지 끊어버리는 힘이 있었음을 짐작하게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 같은 힘으로 주변 사람의 목숨에 위협을 가하는 그런 행동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귀신들린 사람의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어떤 처지와 상태에 있는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옷을 벗고 무덤에서 지낸다는 것은 부끄럽고 비참하게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귀신들린 그 사람은 자신이 부끄럽고 비참하게 살고 있음을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옷을 벗고 무덤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끄럽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실질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연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얼마나 인식합니까? 사람들은 기껏해야 남들보다 적게 가졌다는 것으로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탐욕이 있다는 것이고, 시기, 미움, 분쟁, 사기, 교만, 자랑 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리는 남을 시기하고 교만이 있고 비방하기도 하고 나를 자랑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면서도 그 같은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악한 영에 지배를 받고 있는 실질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악한 영은 예수님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움이 되는가를 모릅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면서도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로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기를 거부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어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 또한 필요 없는 존재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롬 9:33절을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가 모든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그의 피로 덮어주심으로써 우리의 부끄러움으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실 예수님을 원한다면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정상과 비정상 ◉
35절에 보면 귀신들렸던 사람은 더러운 귀신이 나감으로 인해서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있습니다. 옷을 벗고 무덤에서 생활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비참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면 그것은 자신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보게 됨으로써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이 온전해진 정상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때문에 현대인들이 아무리 정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탐욕과 불의와 시기와 미움과 비방 등의 죄 속에 살아가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전혀 보지 못하고 예수 또한 나와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옷을 벗고 무덤에서 생활하는 귀신들린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를 보면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른 채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린 모두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운 사람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님이 전부인 삶을 산 적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돈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내가 자랑되어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면서 판단과 비방을 일삼습니다.
이런 우리가 교회를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봉사를 한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를 보면 자신의 자랑스러운 행함을 내세워 부끄러움을 가리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교인으로 세움 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보게 하시고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온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시고 만나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께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것을 허락하자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니 돼지 떼가 호수에 들어가 몰사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모든 일을 알게 된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것을 봤으면 그 같은 신기한 일을 행한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있어달라고 할 법도 합니다. 그런데 떠나달라고 한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돼지 떼를 잃었다는 것이 이유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돼지 떼라고 하는 헛된 것에 마음을 둠으로 인해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싫어한 것이 됩니다.
귀신들려서 미쳤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정신이 온전하게 된 반면에 정상적으로 산다고 했던 사람들은 헛된 것 때문에 참된 것을 버리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실상임을 본문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큰 일 – 자유 ◉
거라사인들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간구하지만 귀신 나간 사람은 함께 있기를 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귀신 나간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귀신 나간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가 정신이 온전하게 된 사람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의 큰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러운 군대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정신이 온전하게 되어서 옷을 입고 무덤을 떠나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큰 일을 행하셨습니까? 여러분께는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셨다는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은 더러운 군대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주와 함께 하게 된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는 죄와 더러움을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히심으로 가려주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같은 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신자가 전파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면 안 됩니다. 윤리나 도덕이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보다 남들보다 초라하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것보다는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는 것으로 부끄러워하십시오. 지식이든 재물이든 타인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는 것으로 부끄러워하십시오. 누군가를 비방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부끄러워하십시오. 나의 의와 가치를 위해 살고자 하는 것으로 부끄러워하십시오. 그 모든 것은 더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한 영의 다스림으로 옷을 벗고 무덤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유한 자가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큰 일이며, 이 큰 일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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