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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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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8.3.18희망의교회 http://hopech.kr |
이렇게 기도하라
눅11:1-13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불행하게 되며 실패하는 인생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만 바르게 살 수 있고,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본분과 사명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 인생은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받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길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통신이 두절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맘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동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밤을 새워 가시며 기도하셨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명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너무나도 친밀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기를 너무나도 사모하셨고 기뻐하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진지하고 확신에 차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바쁘고 피곤하신 가운데서도 기도하셨으며, 기도하실 때마다 완전히 새 힘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일정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가끔 내키는 대로 기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늘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명과 도전을 받은 한 제자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주옵소서”(1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여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인 하나님이 누군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가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근본적으로 달랐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아셨고,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능력이 있었으며, 진지하고 확신에 찼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하나님과 전혀 친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완전히 형식적이었고, 심지어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는 단 15회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대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서였습니다. 특히 구약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아버지’란 호칭이 65번이나 사용되었고, 요한복음에서는 10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그렇게 가르치셨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러운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드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시며, 만유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셔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 반드시 먼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쳐주신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4-1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밤낮으로 돌보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우리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풍성하고 확신에 차고 기쁨 넘치는 기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우리 자신들에 관한 간구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들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에 대한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2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 자신과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땅히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문제를 놓고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고 담대해지며 확신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어도 담대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예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높여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되며 온전한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하는 성도는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모습과 삶을 통해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성도가 거룩하고 의롭고 성실하고 친절하며 사랑 넘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도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하나님을 비방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오늘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예수님께서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시간의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이 땅에 도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마3:2). 예수님께서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병을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통치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과거에 이미 이 땅에 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늘 이 순간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셨을 때 이미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지금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그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분의 권세로 심판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11:15하). 우리는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가 나에게, 나의 삶속에, 우리 가운데,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시면 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계시니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 갈 세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기쁨과 감동이 내 삶에 충만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산다면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그러나 자아를 죽이지 못하고 내 주장과 뜻만을 고집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싸워서 내 뜻을 관철시키고 약간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주님께서 가정을 다스리시면 우리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정은 참으로 복됩니다. 주님께서 남편을 다스리시고, 주님께서 아내를 다스리시며, 주님께서 자녀들을 다스리시는 가정이야말로 천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남편이 주님께 복종하지 않거나, 아내가 주님께 복종하지 않거나, 자녀들이 주님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려면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주님께서 다스리시면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며, 천국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주장과 생각이 지배하게 되면, 교회는 천국의 모습을 상실하고 추한 모습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흔히 교회를 천국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에서 천국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우리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곳에는 그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찬송가 438장)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 맘대로 고집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삶 속에 주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축복과 기쁨을 누리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여 살면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이 기도를 하는 것은 모순이며,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며, 그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되고, 내 맘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기도드리는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우리의 기도를 얼마든지 들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집중하며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가 확신과 기쁨이 넘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힘써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힘을 다해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고 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며, 그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우리는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되고, 내 맘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힘써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3절)
요즘 양식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기도는 더 이상 필요 없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리면서 모든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건강, 친구 …)을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에는 먹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를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세밀한 것까지 다 준비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풍성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구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우리가 구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결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능력 있고 부지런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자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매일 그 날의 만나만을 주셨습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출16:21)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 날 먹을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에도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만나를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실 뿐만 아니라, 내일도 역시 우리를 돌보신 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갑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는 동시에 영적인 양식도 힘써 구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인 것들에 최우선적인 순위를 두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영적인 것까지도 희생시킵니다. 반면에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일은 소홀히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양식을 소홀히 하면서 육신적인 양식만을 구하는 것은 성도의 도리가 아닙니다. 영적인 양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면 우리의 육신적인 건강과 삶이 잘못된 곳에 사용되기 쉽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묵상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우리 죄 사해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4상)
우리에게는 날마다 용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날마다 용서를 받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의 죄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해야만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용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이것이 정신질환으로 발전하여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영국의 한 정신병원 원장은 “만일 환자들이 용서받았다는 확신만 갖는다면, 나는 나의 환자들을 내일이라도 내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지 못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인은 죄책감과 두려움과 불안감에 눌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성도는 참된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고, 우리는 다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그 후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죄를 사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범죄할 때마다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함으로써 우리 영혼을 계속해서 순결하게 보존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해주시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하는 마음 없이 이 기도를 하면, 그것은 실제로 나 자신을 용서하지 마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용서할 줄 모른다면, 우리가 드리는 죄 사함을 위한 기도는 진실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도 내가 하는 것처럼 나를 감정적으로 대하시며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잠을 못자고, 소화도 안 되고, 심지어는 여러 가지 신경질환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은 용서하기 전에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갈등의 원인은 용서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때 우리는 만 가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일이요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하겠습니까? 용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스데반).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죄의 은총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져도 잘 안 되는 것이 용서입니다. 이런 우리가 과연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임하게 되면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알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 죄 사해주신 것을 깊이 깨닫고 있다면, 우리는 용서를 거부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 해도,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리면서 아울러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주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신 것 같이 저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늘 시험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악하고 연약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4하)
시험을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께 달려 있다는 고백이며, 주님께서 잡아주시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이기게 해달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시험을 이기기 위해 힘써 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 있는 무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려면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채워져야 합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면 죄의 유혹이 틈타지 못하며, 시험을 받을 때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렇게 마귀를 대적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간청하라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후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세를 이렇게 교훈해주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그 요구대로 주리라”(5-8절)
팔레스타인 지방은 낮에 태양이 너무나도 뜨겁기 때문에 밤에 여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친한 벗이 매우 지치고 시장한 채로 한밤중에 방문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친구가 찾아왔는데 그 집에는 대접할 음식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가까운 이웃에게 가서 구워놓은 빵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금 시간은 모두가 곤하게 잠이 든 깊은 밤입니다.
당시 그 지방에서는 온 가족이 한 방에서 한 이부자리를 덮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온 가족이 곤히 잠든 깊은 밤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옆에 사는 친구가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음식이 없다고 하면서 빵 세 덩이를 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깊은 밤에 자다가 일어나는 일은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일어나 불을 켠다면, 곤히 잠들었던 가족들이 모두 깨게 될 것이고 잠을 설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거절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립니다.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밤새도록 문을 두드릴 기세입니다. 이 사람은 귀찮고 내키지 않지만 할 수없이 일어나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기도할 때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귀찮게 해드려야만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시며, 기꺼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는 달리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시는 아버지시니 간절히 기도하여 꼭 응답을 받도록 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끝까지 기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들어주시기 때문에,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9-10절)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받았던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고 있던 조카 롯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소돔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결국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여 결국 축복을 받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모세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멸하시려는 하나님께 끝까지 간구하여 사함을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던 한나는 간절히 기도하여 사무엘과 다른 자녀들을 얻었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심을 기억하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절)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인간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를 대조하고 계십니다. 자녀를 둔 부모들은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에게 할 수만 있으면 좋을 것을 다 해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악하고 한계가 많은 우리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하는데,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기꺼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그런데 누가는 ‘좋은 것’ 대신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하고 좋은 선물은 성령입니다. 결국 마태와 누가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기도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큰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여 얼마든지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더 귀한 것은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성도는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며,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 더욱 힘쓰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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