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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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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78절-80절.
78절-79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추어지고, 그리고 그 발을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합니다. 빛이 위에서 비추어지면 형태나 모양이나 색깔이나 명확하게 다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차원 높은 교훈이 오면 인간의 소원목적 정신 사상, 마음이 머물고 있는 곳, 마음이 가는 곳, 그 위치 활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을 깨달아서 자기 마음이 어떻게 움직여질 때에 ‘아, 이것은 육신의 생각이구나. 세상생각이구나.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와 똑같구나. 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어떻게 그렇게 구별되고 분별된 적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습니까? 그냥 내 마음입니까? 그냥 내 마음으로 예수 믿는 거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그 이치에 자기 마음이나 정신이나 소원목적이나 자기 전 인격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라. 그러면 자기가 미련하게 되고 굶어 죽을 것 같고 이 시대에 떨어질 것 같습니까? 오늘날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교회나 사회나 이 지경입니다.
어두움이 무엇이냐? 어두운 곳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분별도 구별도 되지 않습니다. 모양도 색깔도 안 보이고 무엇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안 보이고 무슨 활동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모르듯이 어두움은 진리의 빛이 없는 곳입니다. 진리의 빛이 없는 곳은 아무리 ‘하나님 말씀 말씀’ 해도 자기 속에 숨어있는 그 생각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현재적으로 자기 마음에 하고자 하는 그 면에 부채질을 하고 더 기름을 부어서 불붙듯이 부어서 일어나게 할는지 모르지만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자기 몸에 균이 들어왔습니다. 몸 바깥에 있는 것을 가지러 가는 것이 급선무겠습니까 아니면 자기 몸 안의 균부터 죽이는 것이 급선무겠습니까? 어느 것이 급선무요? 일반 이치적으로도?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소용 있느냐? 네가 땀 흘려 일궈놓은 거 다 누가 가져가느냐? 딴 사람이 다 가져간다.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먹고 마시고 부귀영화를 누리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에 교육이 다 들어있어요. 사회적으로 제일 신경이 쓰이고 고통스럽고 신경질 나고 스트레스 받는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돈이 없는 겁니까? 못 사는 겁니까? 공기가 없는 겁니까? 햇빛이 안 비춰지는 겁니까? 문제는 사람 안 된데 있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무슨 소용 있느냐? 법관이 아무리 법을 공부를 열심히 해도 무슨 소용이 있냐? 왜? 내가 말한 판단하고 저 사람이 말한 판단하고 틀리거든. 그럼 어떻게 된 거요? 법을 공부한 것이 어떻게 된 거냔 말이요? 이 세상에는 절대 정확한 것이 없다. 그럼 법관들이 서로 또 싸웁니까? 법관끼리 싸우면 그럼 누가 이걸 판단해야 돼요?
교회를 가도 병원을 가도 자기 집 가까운데 병원으로 가야 됩니까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는 그 병을 찾아서 찾아서, 아닌 말로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라도 돈을 빌려서라도 가는 겁니까? 대출을 해서라도 병 고치러 가는 겁니까? ‘교회 가자’ 하면 자기 집 가까운 교회로 그냥 가는 겁니까? 병원도 자기 집 가까운 병원으로 그냥 가버립니까? 중한 병 들렸다면? 그래요? 이치가 그러냐고요? 그러니까 머리가 그 모양이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으면 아무데고 가는 겁니까? 수소문을 해서 돈이 얼마나 드는 건지? 교통이 어떤 건지? 물질적 이해타산에는 어찌 그리 머리가 영리한지? 영적 이해타산을 따지는 면에는 어찌 그리 미련퉁인지? 안 믿는 사람하고 똑같다. 믿는 가치가 뭐가 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주신 그 고귀함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구속을 자기가 헛되게 만들어 버리면 너도 헛되게 사는 수밖에 없다. 별 수가 없는 거다.
어두움은 진리의 빛이 없는 곳. 진리의 빛이 없는 곳은 혼성이요 혼합이요 혼탁이요 혼돈이라서 절대 정확한 것을 찾지를 못합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임시의 것과 영원한 것, 선과 악이 분명치 못하고 생명과 사망적인 것을 잘 알지를 못하고 영과 육의 구별도 없이 인간관계성도 모르고 세상을 세상만큼도 모르고 자기를 지으신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도 모르고 가치판단 평가도 정확치를 못한 겁니다.
자기가 구별 판단 못하고 자기의 존재목적 영원 궁극적인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어두움에 살고 있구나 보는 겁니다. 너는 아직까지 어둡구나.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예, 어두운데 캄캄한 어두운데 앉아있는 게 아니고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으면 머물고 있으면 즉 살고 있으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죽어가는 것일까요 사는 것으로 되어 있을까요? 죽어가는 것이다. 사는 것은 없다. 전부는 죽어가는 거다. 서서히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결국은 전부는 죽는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신앙이 사상적으로 본질에 입각해서 이탈된 신앙은 그렇게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수 년 수십 년 예수 믿었는데 죽음의 그늘의 사상이 무엇인지 뭐가 이게 분별인지 이거 모르고 있었다면 너는 그만큼 죽었다. 너는 그만큼 죽었어.
어린아이들 학교 다니는 것도 학교에 따라서 학생들 성적이 다르고 옷 입는 맵시가 다르며 머리하며 다 맵시가 다릅니까? 눈에 안 보입니까? 그런 거는? 눈으로 보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면 밥 먹고 사는 것이 그게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나? 그게. 전부는 죽는 거.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모태신앙이 뭐요? 모태신앙이 자기가 신앙을 가진 건가? 어쨌든 깨닫지를 못했다면 너는 그만큼 죽은 거다. 똑똑한 척 하지 마라.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 측에 들어가서 성경에 대해서 묻기도 하고 깨닫기도 한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예수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아무 것도 모른다면 이게 뭐요? 어디다 쓸 거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머리되기를 원하고. 누가 자기를 머리 시켜줘. 바보 멍텅구리 머리 따라갔다가는 죽는 거요. 그건 도매금으로 다 죽는 거요.
예수 믿고 자기 속에서 어떤 면이 살아난 건지? 그만큼 구별이 되어간 건지? 알아들을 귀는 있는 건지? 천국복음이 아닌 것은 자기에게 영생으로 살아나는 것은 없습니다. 육운동 세상운동 비진리적인 운동 세상복음 운동 옛사람 운동 전부는 죽음의 그늘입니다. 전부는 죽음의 그늘이요.
목사님들이 신문에 보면 개인적으로 뭘 하면 이름이 안 나거든?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모여서 게는 게끼리 고동은 고동끼리 모여서 미꾸라지는 미꾸라지들끼리 모여서 신문에 내는 거요. 그러니까 뭘 하는 거 같지? 하는 말이 전부 다 ‘어떻게 하자. 어떻게 하자. 모여서 어떻게 하자.’ 생각을 해봐요. 주님의 복음을 복음역사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을 하는 것이냐? 그러니까 안 믿는 세상은 전부는 기독교를 어떤 봉사적인 그런 면으로 미뤄놓고, 안 믿는 사람들은 돈 가지고 뭐 하겠어요? 놀러 다니지. 안 그럴까요? 그렇게 안 돌아가요? 세상운동, 기독교에서 세상운동은 세상복음 운동이라. 세상을 위한 복음운동이라.
이 교회가 할 일이 세상 잘 살도록 하는 운동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가는 겁니까? 어느 것이 주목적이요? 어느 것이 교회가 할 일이요? 이방 불신세상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고 그 영은 죽어 있는 세상이요. 그래, 기독교인들이 봉사적으로 하면 자기의 봉사로서 죽었던 그 영이 살아나겠습니까? 자기가 하나님이요? 예수님의 구속은 어디로 가고 자기의 선행으로 타가 알아차려서 그 영이 살아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예수 믿었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럼 그 사람은 뭘 보고 예수 믿은 것 같아요? 어떻게 믿든 믿으면 되는 거요? 성경은 지금 그걸 말하고 있나요? 예수님의 구속의 이치는 어디로 가버렸어? 예수님의 구속의 이치는 어디로 가버렸어? 인간사랑을 듬뿍 쏟아놓으니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지금 그 말씀을 그 성경구절을 붙인 겁니까? 지금? 자기가 진리의 복음을 위해서 진리에 맡겨서 자기를 진리 자체화 시켜서 그 면으로 나가는 자기가 복음을 위해서 산다고 그러면 거기에 주님이라고 하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지는 거라.
복음을 위해서 버려진 거하고 사회봉사 정신으로 버려진 거 하고 이게 같아요? 이게 같으냐고요? 그럼 이방종교 불교인들도 사랑 많지요? 고아원도 하고 얼마든지 공부도 시키고 해요. 그러니까 돌부처 섬기는 이런 사람들도 천국 간다는 말이 나와야지. 돼야지. 이치가? 근데 그렇습니까? 성경은? 신앙의 이치를 언제 바로 잡을래요? 언제 바로 잡아.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자기를, 살고 있는 자기를, 그곳이 좋다고 하고 있는 자기를 진리생명의 빛은 이것을 알게 하여 자기가 어느 사상 정신, ‘이게 죽은 정신이냐 산 정신이냐’를 알게 하여 그곳에서 탈출하여 인생의 삶의 걸음걸이를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 맞추어가게 하는 것은 이것이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다가 인생의 목적이라든지 인생의 걸음걸이 목적을 맞추는 이것은 자기에게 평강이 된다. 평강이 뭐요? 생강을 설탕에 튀겨놓은 게 뭐지요? 편강이지. 그 편강이지요? ‘평.’ 한자로 쓰면 편안하다. ‘강’은 건강하다. 그 사람의 정신 생활 모든 면에서 건강이야 건강. 그 정신이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세상성적인 그 병적인 요소가 들어올 수가 없어.
산 정신이 있고 병든 정신이 있어. 젊은이들 병든 정신 참 많아요. 자기는 몸은 건강하기 때문에 건강하다고 그러지. 아니야. 너는 병들었어. 정신병 들어놓으면 몸에 병이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신앙정신 면에 병들어놓으면 자기 마음이 들떠있기 때문에 돌아다니기 일쑤요. 정착이 안 돼. 어느 한 교회에 정착이 안 돼. 누가 자기 마음을 맞춰줘요? 누가 있어요? 주님이 건져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자기가 손을 안 잡는다면 그대로 빠져죽는 거지요? 거짓된 종교인들 이단자들 전부는 사망권 안에 권세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진대 어느 누가 죽음의 그늘에서 살고 싶은가?
발은 두었다가 어디다 씁니까?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탈출하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는 그런데 쓰지 않아요? 그 발이 들어가든 나가든 삶의 길에다가 맞춰져 있지요? 맞잖아요? 방에 들어가도 살려고 하는 거고 방에서 나가도 살려고 하는 거고. 그 발걸음은 사는 데로 가는 거요. 아, 그래야지.
진리생명의 밝은 빛을 받은 자는 흑과 백 사망과 생명 의와 불의 선과 악 가치판단 평가가 바로 나오기 때문에 생명의 곳 영생의 곳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가치판단이 바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 맞추어 사는 그 삶은 평강의 길이 되는 겁니다. 복된 길이라 그 말이요. 복된 삶이라 그 말이요.
무엇이 자기를 그 복된 삶에 평강의 길을 못 가게 못 살게 그렇게 만듭니까? 무엇이 무서워서 그 복된 길을 못 가는 겁니까? 그 생각을 못 가지느냐 그 말이요? 물질성 때문에? 인정성 때문에? 아니면 육신의 목숨 때문에? 사람이란 이유는 없어. 한 번 걸려놓으면 자꾸 걸리기 마련이요.
이방 불신세상이 예수 믿는 자기를 마음 좋다고 칭찬을 하면서 ‘당신 마음 좋은 거 안다. 요것 좀 해 주실래요?’ ‘아, 그러십시오’ 하고 한 번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 하려고 그래요. 그 다음에 이제 또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또 ‘어느 사람은 마음이 좋으니까 그 사람한테 부탁해보자.’ 안 믿는 사람이. 그러면은 차마 저번에도 해줬으니까 뿌리치지 못하고 또 해 주지요? 이게 가만 보니까 아주 길이나 버렸어. ‘아이, 나 안 한다.’ ‘에이, 뭐 그럴 거 있습니까? 이때까지 해 주셨는데, 아무도 할 사람이 없고 또 해 주셔야지.’ 뭐 이런 식. 코가 꿰였어. 지혜를 써야 돼.
누가 자기를 칭찬하면 그렇게 좋습니까? ‘정신 좀 차리라’ 그러면 기분 나쁘고? 그럼 ‘정신 안 차리고 흐리멍덩하게 살라’ 그러면 기분 좋겠지요?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어떤 아이요? 집에서 나간 아이요? 이게 지금? 어떤 아이요? 어떤 아이가 지금 빈들에 있다고 그러는 거요? 세례요한. 아이가 왜 빈들에서 자랍니까? 이게 몇 살 먹은 아이요? 이게? 왜 사람도 안 사는 빈들에서 자라요? 이게 지금? 담력 키우는 거요? 메뚜기 잡으러 다니는 거요 뭐요? 도시에서는 못 자랍니까? 왜 빈들에서 자라요?
그런데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만 보면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농촌에 막 그냥 들판을 쏘다니면서 자라는 아이하고 건강상태를 가만 보면 많이 다를 거요. 도시 한복판에서 늘 아파트 속에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간에 그냥 그늘 속에서 늘 살기 때문에 피부가 하얘가지고. 허연 게 좋지요? 힘이 없어가지고 움직이질 않으니 뼈까지 약해져가지고.
우리 어릴 때는 버스고 뭐고 있나요? 있어봐야 소 구루마 그런 거지. 길바닥에 보면 소들이 똥을 싸서 말라가지고 그렇게 있고. 여름 되면 그냥 그 없는 집안에 런닝셔츠 이런 게 있어요? 그 삼베옷, 어른들은 시원하지만 애들 삼베팬티 그런 거 해 입히면 다리 사이에 마찰이 일어가지고 이게 빨개가지고 막 껍데기가 시달려서 이게 얼마나 아픈지 안 입는다고.
요새 같으면 사각팬티 삼각팬티 그런 게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없었어. 곰표 밀가루 포대 그걸로 팬티 만들어서 입어요. 그것도 억세서 살갗이 막 시달려요. 그 팬티 하나입고 뭐 5, 6학년 돼도, 바닷가 가려고 해도 시내서 가려면 한 십리 거의 돼요. 머리는 박박 깎은 데다 그 뙤약볕에 수영하러 가려면 가는데 땀 뻘뻘 흘리고 오는데 뻘뻘 흘리지. 왔다 갔다 하다 피부를 데어가지고 며칠 지나면 껍데기가 한 벌 벗겨지고 또 태워서 또 두 벌 벗겨지고 그렇게 살았어. 새카매가지고.
이 서울 사는 애들 아침저녁으로 밤이고 뭐 햇빛 쐴 때가 없어요. 학원이고 뭐고 이러느라고. 그러니 얼마나 그게 스트레스요. 일종의.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머릿속에 맨 ‘공부 공부.’ 결국은 돈이에요. 돈이 안 벌어진다 그러면 그 공부 하겠어요? ‘다 놀아라. 그러면 돈 잘 벌린다’ 그러면 다 놀라고 그러지. 돈이야 돈. 그러니까 연령에 따라서 이게 크는 시기가 있는데 이게 안 돼요. 이 시기가 이게 발란스가 하나도 안 맞아요. 어릴 때는 잘 뛰어놀아야 돼요. 그래야 이게 발달이 잘 돼요. 정서적인 것도 이게 잘 들어가고. 자기들끼리 좀 싸워도 내버려두고. 애들은 깨지기도 하고 그러지.
이 성경에 보니까 아이가 빈들에서 자라고 있어요. 오늘부터 우리아이들 빈들로 다 내 보내야 되겠어. 허허. 애들끼리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시간 있으면 방학 때 애들 데리고 산으로 매미채 잠자리 잡는 거 그것 가지고 이렇게 해서 좀 데리고 다니고 그래야 돼요. 사실은 우리는 그랬어. 전부 다 그냥 학원이고 뭐고, 돈 있으면 외국으로. ‘돈’ 그러니까 돈 때문에 시집장가 가도 맨 그런 식.
우리는 세금 낼 돈이 없으면 ‘참 쪼들린다’ 그러지만 이 부자들은 이게 뭐요? 홈플러스나 어떤 놀이 갈 돈이 없으면 쪼들린다고 죽는 소리 하는 거요. 이제 엄청난 세계요. 다른 거요. 달라. 다른 거요. 그러니까 고생을 해봤나? 이게?
아이는 어디에서든지 부모슬하에서 양육을 받고 자라지요? 아이라 그러면 몇 살 때부터 몇 살 때까지가 아이요? 백 살 먹은 어머니가 칠십 살 먹은 아들보고 ‘어른아’ 그래요 ‘아가야’ 그래요? 그런데 왜 빈들에서 있다고 하는 거냐? 왜 빈들에 있다고 하는 거냐? 이 말씀 속에는 교육적인 면에서 계시가 있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빈들에서 사는 그 애가 좋다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계시사상이 들어있어.
참 진리생명의 신앙교육은 세상과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한 교육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이 사상이 광야라 그 말이요. 말하자면 광야에는 집도 절도 없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요. 그러니까 광야로 내려쫓겼다면 누구보고 하소연하고 누구에게 살려달라고 그럴까요? 하나님. 그러니 그 정신을 말하는 거요. 그 정신. 그 정신을 말하는 거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것이 광야입니다. 예, 광야라 그럴 때는 그래요.
광야교육은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으로 인해서 오는 시련 연단 영능의 실력교육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배우고 하나님을 바로 깨닫는 교육이 바로 광야교회라 그 말이요. 이 교육에서 자라야 뭐가 강해져요? 심령이 강해져. 반드시 그렇다. 세상 속화된 종교적 교육은 사람의 심령이 강해지지를 않습니다. 그건 상황 따라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자꾸 그런 방편을 목적인 것처럼 자꾸 쓰게 돼요. 그러니까 사람이 강하지를 못해요.
‘사람이 강하지를 못하다’ 그럴 때는 ‘그 사람 속의 정신이 어떻다’ 하는 것은 금방 드러나는 거요. 고집이란 말이 아니에요. 고집이 강한 것 같아요? 아니요. 참 미련한 거요. 고건. 옳은 이치의 정신의 사람이 넘어지지 않는 거니 이게 참 강한 사람이요. 멋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그래요. 하나님이 우리 주님이 그렇더라 그 말이요.
깨닫고 아는 면에서 아이라고 생각하고 배우면 자랄 수 있지만 깨닫고 아는 면에서 ‘어른이다. 나는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만큼 자란 것이니 죽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너는 더 배울 것이 없구나. 너 이제 죽자. 죽어라.’ 그 사람이 교만하면 자기는 제일이다 그 말이요. ‘나는 더 배울 것 없고 다 안다’ 그 말이요. 예, 그러니까 ‘너 이제 죽자. 죽을 준비하라’ 그러는 거요. 그러니까 안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나는 아이입니다. 나는 칠십 살이지만 빨리 안 죽으려고 늘 나는 아이입니다. 아이입니다.’ ‘어른이다’ 그러면 금방 데려가 버려요. 허허. 교만하면 은혜 받지를 못하고 모든 면에서 삭감이 돼버려.
그 참 생각이 나서, 이게 포도원제일교회에서 목사님들 교육하는데 어느 한 목사님이 가만 보니까, 다 보이지요. 여기 선 사람 눈 작다고 ‘못 보지’ 그렇게 하지 말아요. 다 보여요. 아니, 실제로 와서 서서 봐 봐요. 다 보이는 거요. 누가 등 뒤에 숨고 잠자는 건지 누가 엎드려서 쓰는 것처럼 하면서 눈감고 있는 건지 다 아는 거요. 못 속여요.
근데 어느 한 목사님이 가만 보니까 그 자기 노트에다가 하는 건지 어쨌든 쓰는 건지 뭘 그리는 건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래, ‘어디 한 번 보자’ 하고 가봤더니 장미꽃을 그려놓고. 아니, 설교 안 듣고 꽃을 그리고 있어? 뭐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 어떻게 은혜를 받겠어. 그 교회에 갔으면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분별하려고 그러고 그래야지. 시간을 낭비를 하지 말아야지. 말씀 듣고 이치를 깨달아가지고 아닌 말로 ‘아이고, 저 말씀은 나보고 하는 소리구나.’ 하고 그게 듣기 싫으면 다음부터 교회 안 나와야지. 아, 그렇게 들었더라도 바로 들은 거야. 그렇지 않아요?
성경은 얼마나 알고 있으며 인인관계도 짓지 못하는 사람이 그 모양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사람이 펴져 나가겠어? 인인관계도 잘 연관시켜 놓으면 자기 갈 길이 세상에서 열려요. 인인관계 세상에는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신인관계 대신관계 막혀놓으면 이 뭐요? 신앙의 세계서는 이게 성도와 딱딱 막혀버려요. 그 다음에 받을 은혜도 못 받아요. 다시 말하면 국물도 없다. 건더기커녕은 국물도 없다. 누가 말을 해도 누가 자기를 좋은 쪽으로 말을 하겠느냐 그 말이요. 한 번 생각을 해봐요. 그게 인간세상이다. 인간세상 사회 어디를 가도 그런 거다. ‘에이,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좋을 뻔했다?’ 어때요? 그렇게 할 거요?
저는 길에 다니면서 보면 풀이 강한 풀이 있어요. 나만 밟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밟아요. 그렇게 밟아도 비만 오면 이게 솟아나요. ‘야, 참 어떻게 보면 내가 저 풀만도 못하구나.’ 풀을 보고 뭘 생각해요? 예, 그 잔디 풀 참 강하지요? 그 다음에 뭐가 강하느냐? 민들레 참 강해요. 뿌리가 참 좋다며? 그렇게? 민들레가 길가에 나면 그 색깔이 참 좋아요. 그 이제 뭐요? 솜처럼 이렇게 나오지요? 홀씨? 그 이제 다 씨를 내고 있지요. 그래서 내가 딱 끊어가지고 ‘아이고, 이제 시집보내줘야 되겠다’ 하고 내가 들고 바람을 훅 불면서 ‘가서 잘 살아라’ 그러면 제각기 낙하산처럼 꽁당꽁당 하면서 날아가요. 시집 잘 보내줘야 돼. 여기저기서 나면 얼마나 아름답겠어. 근데 꽃은 피었는데 나비들이 별로 없어. 공해 때문에. 꽃이 그만큼 있으면 나비도 그만큼 날아다니면 그게 한 폭의 그림인데 꽃은 있는데 나비가 없어.
참 사람이 되지 못한 교만한 사람, 이 사람은 주님의 종이 될 사람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이 광야에서 말씀의 교훈으로 다듬어지지 못하고 자랐다고 하는 것은 말씀의 교훈으로 자란다는 뜻이 아니고 이건 험악한 세상에 제 멋대로 신경질 가지고 살았구나. 그런 사람도 있어요. 사람이 다듬어지지 못해가지고 까칠해가지고 이게 남자끼리 말을 해도 툭툭거리고 남자 여자가 말을 해도 툭툭거리지. 그 이게 성격이 문제라. 그러니 이게 어디를 간들 대우를 받겠느냐? 보통 큰일이 아니구나. 이거.
그런 사람도 있어요? 본처하고 살다가 본처가 도망가 버리고 또 재처가 들어와도 또 얼마 못 살다가 또 도망가 버리고 그 다음에 삼처가 와도 도망가 버리고. 왜 그런 거 같아요? 왜 그런 거 같다고 보는 겁니까? 뭐 신체결함이 있다거나 아니면 성격이 문제다. 이거 사람의 성격이 문제다. 그런 사람 만나면 뭐 그냥 돈 벌어주고 그렇게 생각을 하지 말고 ‘고치고 죽읍시다. 우리 고치고 한 날 한 시에 죽읍시다.’ 하루를 살더라도 고치고 죽어야지. 하루를 살다 가더라도 사람처럼 살다가 가야지. 밥을 못 먹어서 그 모양인가? 어떻게 그래요?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그렇지요?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서 산다. 무슨 교육이라? 그게? 하나님의 말씀의 특수교육. 특수교육이요.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보냄을 받으려면 심령이 강하게 자라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겁니다.
기독자는 예수 믿는 기독자는 무엇으로 강해지고 있는가? 우리 집 아이는 무엇으로 강해지고 있는가? 자기 집 아이는 무엇으로 강해지고 있어요? 돈으로 강해지고 있나? 고집통으로 강해지고 있나? 밥 힘으로 된장 힘으로 강해지고 있나? 밥 힘으로 된장 힘으로 강해지려면 씨름으로 보내고.
우리교회는 무엇으로 강해지고 있는가? 교인들한테 물어봅시다. 우리교회가 무엇으로 강해지고 있다고 보는 거요? 지금? 무엇으로? 이 목사님의 설교가 하루 이틀 듣는 것도 아닌데 무엇으로 우리에게 강해지라고 하는 이거 없습니까? 없어요? 아니, 솔직하게 얘기해야지. 괜히 나한테 꾸중 들을까봐? 그거 관계없어 솔직하게. 내 딴에는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우리교인들, 천국에서도 일인자. 영능의 실력자. 어디를 가든 구별 분별하고 빠지지 않는. 뒤 쫄쫄 따라다니지 않고 머리가 되는 아, 그런 교인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데 어떻게 들려요? 강해져야 돼. 진리의 신앙정신 사상으로 사람이 강해져야 돼. 고집이 아니라. 고집은 지혜가 없는 거요. 옳은 진리의 지혜지식은 그거 참 강한 거요. 순교의 정신은 그런데서 나오는 거요.
그리고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아가페 사랑.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은 역시 교훈이 들어가고 있는데, 다른 거는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어요. 물질은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는 거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이게 아가페 사랑이야. 하나님의 사랑이야.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하나님으로 이렇게 돼 나오는 이 면으로 힘을 쓰고 있어. 그게 아가페요.
그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달라는 자에게 다 주고받지 말고 주라’ 그랬어. 그 다음에 ‘너의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들도 자비해야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자하고 자비합니다. 자, 그러면 인자하고 자비하다는 게 뭐요? 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짓고 죽을 짓을 하고 심판받을 짓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죽는 일만 하면서 벌 받을 일만 하면서 세월을 그렇게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참아주시고 ‘허허’ 하면서 웃고 그런 겁니까? ‘인자와 자비’ 라는 말의 의미가 그런 겁니까?
우리 어머니들, 자기 자식 키울 때 어떻게 생각해요? 그렇게 애를 먹여도 그냥 ‘허허’ 웃고 가만있는 겁니까? 그게 사랑이요? 인자요? 자비요? 자자비요? 인자와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이룰구원을 염려해서 다각적인 방법으로 교육을 하면서 이룰구원에 존귀영광의 사람이 되도록 방편을 그렇게 써가면서 골인이 되도록 그렇게 되기까지 그 과정이 자비란 말이요. 그 과정이. 그냥 가만있는 게 자비가 아니고.
절의 부처는 ‘대자대비’ 그러는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그게 아니요. 가만있는 게 대자대비가 아니요. 정신을 차려요. 사랑하면 고쳐야 돼. 고치도록 노력을 하고 고쳐요. ‘크면 깨닫겠지 뭐. 크면 깨닫겠지.’ 현재 가만 놔두면서 ‘크면 깨닫겠지.’ 아이를 죽이고 있구나. 지금 사람을 교육적으로 죽이고 있구나. 고치도록 하면서 ‘훗날에 고쳐지겠지’ 하면서 고치도록 하면서 아, 이게 들어가 있는 거요.
사람이 한 번 빗나가면 그게 고쳐지겠어요? 이게 비스듬한 기둥이 저절로 그게 꼿꼿하게 설까요? 저절로? 자라나는 소나무가 처음부터 꼿꼿하게 서는 나무가 있어요. 잣나무 같은 거. 근데 소나무가 비스듬하게 자라가지고 아, 이게 그 다음에 바로 서려면 허리 안 아플까요? 허리 안 아프겠어요? 그만큼 진통이 안 오겠냐 그 말이요?
현재 부모에게 대항하고 말 안 듣고 있는데 ‘훗날에 가서 그 자식한테 좋은 말하면 듣겠지’ 하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라. 빤한 거다. 그런 줄 알고 우리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크다는 걸 알아야 되겠지요. 진리의 사상과 정신이 아닌 것은 자기 망할 위험에 살고 있고 사망권 안에 앉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이요. 자기 신앙사상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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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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