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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4:1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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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91590 |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주현절 후 셋째 주일, 2019년 1월27일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장소는 회당입니다. 유대인들은 전반적으로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사역을 시작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회당이 평범한 유대인들에게는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후 북쪽 지역인 갈릴리로 다시 올라와 고향인 나사렛을 찾았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회당 관습에 따라서 회당 책임자로부터 전달받은 성경을 읽고 설교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제3독서로 읽은 눅 4:14-21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신탁
예수님이 읽은 성경 본문은 구약 사 61:1절 이하입니다. 이 본문은 기원전 530년에 일어난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20년 어간에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서 선포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고, 뭔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잘 안 된다는 실망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 묶인 자, 눈먼 자, 억눌린 자의 고통을 들어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사 61:1 이하를 인용한 눅 4:18-19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여기에 열거된 이들이 네 종류입니다만 크게 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한쪽은 가난한 자이고, 다른 한쪽은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사람들입니다. 후자에 속한 이들은 가난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을 우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악한 구조에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기자들은 가난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가난을 벗어나려면 왜 가난해졌는지를 알아야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하기 싫어서 가난해진 경우라면 동정받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이런 점에서 노골적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 일하기 싫어서 가난하게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회구조적인 이유가 더 핵심적입니다. 당시 이사야의 말씀을 듣는 예루살렘 주민들은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갔다가 낙후된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가난은 제국의 억압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복음은 더 이상 제국의 억압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사야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가난 문제를 피하지 말아야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를 주로 기복주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기복주의가 먹힐지 모르나 세상을 똑바로 대면하는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사야의 외침이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필요합니다. 사회 체제와 질서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쪽으로 변화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은 세계 상위에 속하기에 경제 질서가 바르게 운용되기만 한다면 가난으로 인해서 삶이 파괴되는 사람들의 숫자는 대폭 줄어들 것입니다. 이런 데에 관심이 없는 교회라면 이사야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두 번째 부류에 해당되는 이들은 감옥에 갇힌 자, 시각장애인, 억눌린 자입니다. 이사야는 갇힌 자가 해방될 것이라는 소식을 외칩니다. 이 외침이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생생한 것으로 들렸을 겁니다. 제국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을 뿐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식민통치를 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먼 자는 단순히 육체적인 시각장애만이 아니라 진실을 봐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진실을 보고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다는 뜻입니다.
특별하게 어려운 처지에 떨어진 사람만이 아니라 괜찮게 산다는 사람들도 근본적으로는 여기에 언급된 이들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모두 가난하고 감옥에 갇히고 눈이 멀고 억눌린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다 아실 겁니다. 간단하게만 짚겠습니다. 제법 돈이 있는 편인데도 궁핍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면 그게 가난한 거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현대인은 겉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흉내를 낼 뿐이지 실제로는 감옥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종종 막막하고 답답하고 허무에 떨어집니다.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육체의 눈은 떴으나 마음의 눈이 감겨 있을 때도 많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시각장애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한 것도 많으나 삶이 총체적으로 억눌려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최고급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현상이 바로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일전에 어느 젊은 집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지인 중의 어떤 사람이 자녀들 교육비로만 월 5백만 원 이상을 쓴다는 겁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억눌린 자’입니다.
위에서 언급된 네 부류 사람들에게 이사야가 전한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19절)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주의 은혜가 실현되는 해는 안식년, 또는 희년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년과 희년이 되면 왜곡되고 뒤틀린 세상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종으로 팔려갔던 사람들은 풀려나고, 팔렸던 땅도 제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이를 탕감이라고 합니다. 탕감 개념이 오늘날 국제관계에서나 사회에서 적용되기도 합니다. 가난한 나라가 부자 나라에서 빌린 돈을 탕감해주거나 한 나라 안에서도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의 채무를 탕감해주는 제도가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은혜의 해’를 말하는 이유는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세상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막아보려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생각이 자리합니다.
구원의 성취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그 두루마리를 돌려준 뒤에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했습니다. 오늘날로 바꾸면 설교자가 성경을 읽고 설교단에 선 장면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지금 읽은 이사야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가난을 면했다거나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풀려나거나 시각장애인이 치료되었거나 온갖 스트레스로 억눌렸던 사람이 자유롭게 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건지가 궁금합니다. 그 답을 말하기 전에 회당에서 벌어진 이 이야기가 그 뒤로 전개되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답을 얻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놀라워하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이웃에 살던 평범한 인물로 알았는데 말씀을 들으니 예상 밖이라는 뜻입니다. 그 뒤로 논란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발언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예로 들면서 유대인들은 지난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선지자를 반가워하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났다고 합니다. 눅 4:29절에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지 위협만 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진술이 나오는 걸 보면 누가복음의 이 사건도 개연성이 높아 보입니다.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롭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왜 갑자기 험한 상황으로 변한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 퍼즐을 맞추듯이 성경 본문의 미로를 통해서 대답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회당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가 됩니다. 여기서 초기 기독교 시절은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4,50년의 세월이 흐른 때를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와 회당과는 처음에 사이가 좋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여전히 회당을 출입하면서 신앙생활을 했고, 회당 공동체도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이들을 굳이 밀쳐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양자 모두 구약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에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무너지자 유대교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그동안 율법을 느슨하게 대하던 나사렛 예수 추종자들을 회당에서 몰아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냐 아니면 예수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입장은 난처했습니다. 회당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로마의 정치적인 압박을 피할 수 없고, 그렇다고 유대교 주류와 비슷한 입장에서 율법을 따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대답이 바로 오늘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바꿔서 말하면 이사야가 선포한 인간 구원이 예수님에게서 현실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이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불행의 무효화
우선 쉽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사야가 열거한 네 가지 불행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게 분명합니다. 가난, 감옥, 시각장애, 억눌림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일상에서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발버둥을 칩니다. 해결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해결되었다가 다시 어려움에 빠집니다. 우리는 계속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월든』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를 많은 분들이 알 겁니다. 그는 20대 후반에 월든이라는 호수의 숲에 들어가서 혼자 오두막을 짓고 2년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가난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독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숲속에서 더 풍요로운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콧 니어링(1883-1983)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20대 중반에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40대 중반에 농촌으로 들어가 100세까지 평생 살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지배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람들은 제법 많습니다. 출가 수도승들도 많습니다. 가난해도 시를 쓰고 구도적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아주 특별한 몇몇 사람들을 기준으로 일상에서 만나는 불행한 조건들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핵심은 어떤 절대적인 것을 경험하면 그 외의 것들은 사소해진다는 것, 즉 그 악마의 힘이 무효화 된다는 사실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인 대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를 생명의 근원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런 신앙 앞에서 가난과 감옥과 시각장애와 스트레스는 무효가 된 것입니다. 동의하시나요? 세상살이를 너무 나이브하게 본 것일까요?
예수님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기에 현존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회당에서 하신 예수님의 발언을 잘 보십시오. 이사야의 말씀이 ‘오늘’ 당신들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바로 ‘여기에 가까이’라는 뜻입니다. 이 ‘순간’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표적을 봐야하고, 율법을 완수해야만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벤처 기업을 크게 키워서 대박을 내야하고, 누구에게나 존경받을 수 있도록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업적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셨습니다. 그런 조건 없이 하나님이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를 그냥 받아들이고, 죄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쓸모 있게 바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숨을 쉴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선포는 당시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진 유대교 권력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 체제가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예수님의 가르침과 운명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즉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실제 삶에서 여전히 가난과 감옥과 장애와 억눌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주 사소한 것으로 영혼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생명으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현실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면 도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하소연도 가능합니다. 여기서 저는 더 이상 설교의 진도를 나갈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 해당되는 한자가 불립문자(不立文字)입니다. 글과 말로는 해명이 안 되는 절대적인 경험 앞에서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사실을 통해서 그게 어떤 느낌인지만 암시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에서 보면 먼지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작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20년 후가 곧 들이닥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화되었으니,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가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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