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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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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96344 |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사순절 셋째 주일, 2019년 3월24일
1.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재난 앞에서
오늘 설교 본문은 두 대목으로 구분됩니다. 한 대목은 눅 13:1-5절에 나오는 어떤 재난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한 대목은 6-9절로 이어지는 비유 이야기입니다. 두 대목이 한 주제로 연결됩니다. 앞에 나오는 이야기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두 가지 재난에 관한 건입니다. 첫째는 빌라도가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유월절을 맞아 성지 순례 차 예루살렘에 온 갈릴리 사람들 중 일부 순례자들에게서 폭동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을 강력 제압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와중에 적지 않은 갈릴리 사람들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본문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소식을 예수님에게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재난의 이유를 당연히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당한 재난은 다른 이들보다 죄가 더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언급하면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반응을 탐탐치 않게 생각했을 겁니다. 빌라도의 난폭성을 비난하든지, 재난과 죄의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해 주기를 바랐을 겁니다.
둘째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주민을 위한 저수지입니다. 이 저수지 근처에 예루살렘 도성을 지키는 망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빌라도에 의한 갈릴리 사람들의 살해 사건을 평가한 것과 같은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이런 재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4,5절에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런 말씀을 들으면 일단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대단히 위협적인 발언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협해서 종교적인 성과를 올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건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경에는 위협적인 것처럼 들리는 말씀들이 나오기에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마 25:41절에 따르면 저주 받은 자들은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서 유황불과 구더기에 영원히 고통당할 것이라고 과정해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사랑과 긍휼이 부정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더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로 영혼의 눈을 돌리라는 호소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6-9절에 나오는 비유에서 정확하게 설명됩니다.
무화과나무 비유
6절부터 예수님의 비유가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포도농사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품종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은 언제쯤 수확물을 거둘 수 있게 될지 속으로 계산했을 겁니다. 결실이 없었습니다. 실망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심고 삼년을 기다렸는데 아무 결실을 얻지 못했으니 차라리 나무를 찍어내고 다른 농사를 지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누가 봐도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합니다. 자신이 무화과나무에게 정성을 더 기울여볼 테니 일 년 뒤에도 아무런 결실이 없으면 그때 나무를 찍어버리자고 했습니다. 이 비유와 앞에 나오는 두 재난에 대한 이야기에 관통하는 단어는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또는 열매를 맺으면 재난을 면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또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재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회개는 무엇일까요? 열매를 맺는다는 건 무엇일까요?
회개의 일반적인 의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바르게 살겠다는 결단이자 실행입니다. 이런 회개를 가장 강력하게 선포한 인물은 신약성경에서 볼 때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마 3:2절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하나님 나라이고, 회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마 4:17). 문장 형식은 같지만 개념은 다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걸 맞을 준비를 치열하게 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그 준비입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누가복음(3장)은 세례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의 절박성을 훨씬 리얼하게 전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 옆에 놓였습니다. 옷이 두 벌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줘야하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세리들은 연봉에 만족해야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직업군인들도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불을 토하듯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변화를 민중들에게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타노이아, 즉 회개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메시지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왔다는 사실에 포커스가 있습니다. 요한처럼 준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폭풍이 몰려올 때는 준비할 수 있습니다. 창문이 흔들리지 않게 못을 치거나 지붕에 돌을 얹어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폭풍 안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준비할 여유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폭풍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겨야합니다. 광야에서 금욕적으로 살았던 세례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먹고 마시면서 지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고 말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앞으로 올 테니 그걸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으니 그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이 회개이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뭘까, 그걸 살아낸다는 게 실제로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대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붙들려서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사로잡히는 삶입니다. 그것을 저는 오늘 설교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백척간두의 실존’이 그것입니다. 백척간두는 대략 30미터 높이의 장대를 가리킵니다.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주변에 의지할 데가 전혀 없습니다. 아득하고 현기증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히거나 절해고도로 귀양 보내진 형국입니다. 하나님 경험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느낀다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만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했기에 그걸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돌아서라.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의 일상에 왔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험과 무관한 채 교회에 다닙니다. 건전한 인격과 품성을 유지하면서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걸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백척간두의 절박성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생, 또는 삶의 상투성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인생을 사는지에 대한 대답을 안다고, 최소한 대충이라도 안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비유를 기억하시겠지요. 잔치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이 날짜가 임박하자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바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 적응하기 위해서 바쁘게 삽니다. 실제로 바쁘기도 하고, 바쁘지 않아도 바쁜 시늉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 바쁜 삶의 마지막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셨겠지요. 저는 지금 여러분이 교회 모임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채근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일은 무의미하니 불성실하게 살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각자의 인생을 백척간두에 올라선 것처럼 경험해보신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드리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성경이 말하는 회개이고, 거기서만 우리는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내용 중에서 두 가지만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백척간두의 경험이며, 그런 경험에서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명이 실질적으로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즉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기독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다 아는 게 아니지만 아는 데까지만 설명해보겠습니다. 사실은 여러분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가장 분명한 토대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군,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무(無)를 생각해보셨는지요. 스피노자부터 시작해서 하이데거까지 계속되는 질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무는 더 이상 없는가?’ 제가 사는 원당 마을이 광주리 모형이라서 그 안에서 날아다니는 새들이 잘 보입니다. 얼마 전에 마을 앞으로 고속도로가 뚫려서 방해를 받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새는 존재하고 사람도 존재하는데, 새와 사람의 중간쯤 되는 것은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헬라사람들은 그걸 상상하면서 신화를 썼습니다. 우리는 지구 안에서만 생명체를 경험하기에 다른 것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의 것들에 묶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당장 외계인을 만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외계인은 눈 없이 특별한 음파로만 세상을 인식하거나 소리 없이 촉감으로만 의사소통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만날 때의 느낌이 바로 백척간두와 같은 것입니다. 완전히 이질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영혼이 상투성에 떨어집니다. 영혼의 상투성이야말로 죽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은 악한 현실이 없지 않습니다. 악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이게 역설적인 관점입니다. 악마저 선의 힘에 포획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병들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마저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선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너무 나이브하게 대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보존하십니다. 이미 그 선한 힘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것들에게 길들여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 경험입니다. 여기서 메타노이가 필요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일상이 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유대교와 우리 기독교가 같습니다. 그들과 구별되는 점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은 곳곳에서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가 속량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골 1:14절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속량은 속죄를 가리킵니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구절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해 불가입니다. 또 어떤 기독교인들은 죄 용서 받았다는 사실 앞에서 감격해합니다. 2천 년 전 십자가에 처형당한 30대 초반의 한 사람에 의해서 오늘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실제로 말이 될까요? 문자 그대로 단순하게 믿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만으로는 백척간두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부도덕하거나 파렴치한 행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사회법정에서 단죄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능력으로 완성시켜야 한다는 강요와 갈망에 떨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신을 완성시키려고 세상의 방식을 동원하면서 크고 작은 악행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자유롭게 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완성시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애를 쓰는 것은 노예의 삶입니다.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자녀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는 더 이상 애를 쓰지 않아도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물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은총이라고 합니다. 마틴 루터가 솔라 그라티아를 외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속으로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세상을 봐라,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인생이 풀리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사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되고, 불행하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당연히 그렇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만 세상에서 큰소리치면서 삽니다. 큰소리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을 우리가 완전히 무시하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구원 문제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부족해도 숨을 쉴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연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다 알 겁니다.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 나무를 한 번씩 안아주는 것, 산수유 꽃을 바라보는 것, 빵집 지나면서 빵 냄새 맡는 것은 돈이 없어도 됩니다. 역설적으로 돈이 들지 않는 것들은 백척간두에 올라서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기에 몰입하는 삶이 바로 속량이고, 하나님 경험이고, 회개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교우들에게 공명을 얻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현대인들은 백척간두를 크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거기 올라갔냐, 하고 묻는다면 확신을 갖고 대답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을 말하기에 이런 방식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 노하우, 처세술, 심리적 안정은 여러분이 다른 데서 얻으면 됩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하나님만을,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할 뿐입니다. 백척간두에 서서 하나님만 대면하고 싶은 거룩한 갈망을 안고서!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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