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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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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3장 5절.
5절: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누구보고 하는 말씀이요? 예수 안 믿는 저기 길가는 사람보고 하는 말씀이지요? 사람보고 하는 말입니까 저기 산보고 하는 말입니까? 사람보고. 어느 사람? 나보고. 이것이 지금 자기의 이룰구원에 관한 말씀이요. 구원에 관한 말씀은 사람의 몸 밖의 임시성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이라’ 그럴 때에 사람 자체에 관한 거요. 사람 자체. 인간 자기 나보고.
우리가 지금 기본구원을 얻은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이루어가는 구원이 있어요. 이 말씀이 지금 그 말씀이요. 이게 다. 그런데 이루어가는 구원은 없고 세상 속화된 교회는 예수이름으로 뭘 자꾸 하자는 거요. 세상에 이미 있는 일들인데 교인들끼리 모아가지고 뭘 자꾸 하자는 거요. 그건 구원이 아닙니다. 종교단체를 만들어가지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이 질적 본질로 돼가지고 그 너의 삶속에서 너의 있는 처소에서 뭘 하든지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꾸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을 끌어당겨다가 예수이름으로 뭘 자꾸 크게 만들자는 이것이 거짓 종들이요 거짓적인 가르침이요.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머리가 되는지 압니까? 아니요. 하나님의 형벌이 와요. 형벌이. 머리가 되려면 많은 사람들의 두뇌적인 그 지식보다, 그건 사망적인 지식이거든요? 그들의 이해타산 평가성은 그들의 철학은 죽음 이편에,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러나 우리의 철학은 이 신앙철학은 천국의 것 영원한 것 영원한 그 지식의 이해타산 평가성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려나가는 것. 이것이 영원 전서부터 창세전서부터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우리의 구원으로 들어가 있단 말이요. 그게.
근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 근본적으로 그게 쏙 빠졌어. 없어. 마귀가 어쩜 그렇게 성경을 가지고 거짓 종들로 하여금 철두철미하게 그걸 봉쇄를 해놨어. 그래서 유형적인 눈으로 보이는 이 외형적인 교회는 엄청나게 이렇게 좀 많습니까? 그런데 왜 이러냐? 예수 믿는 사회가 왜 이러냐? 그러니까 아니다 그 말이요. 제 얘기는 아니다. 복음이 아니다 그 말이요.
천국복음은 천국에 관한 거지. 세상복음은 세상에 관한 거지. 세상의 것을 구하면서 가르치면서 기도로 구하면서 그게 어떻게 천국복음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자기가 말을 해놓고 금방 말을 해놓고 천국복음 이래. 뭐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세상을 구해놓고 천국복음이란 말이 어디 있어요. 그게? 본문이 지금 구원에 관한 말씀이요. 인간 나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된 말씀이라.
사람이 신앙사상적으로 보는 영의 눈을 가지고 보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듣고 똑바로 깨달은 자는 질적 본질적으로 정통적으로 깨달은 자는 모든 골짜기가 메워진다. 골짜기는 어디 있어요? 쉽게? 산에 있잖아요. 불도저가 밀어버리면 골짜기가 메워지지요? 산 하나가 그냥 날아가 버려. 골짜기가 메워지면 굴러 떨어질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어둡고 침침한 것도 없어지고. 골짜기는 어둡고 침침해요. 올라온다고 낑낑거리는 것도 없어질 것이라.
골짜기는 사실 일반적으로 가보면 가시나무도 많고 큰 돌도 많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고 물 고인 데도 많고 길도 없고 비 오면 금방 물이 불어나고 산사태가 나고 순식간에 다 쓸려갑니다. 사람이 골짜기로 한 번 떨어지면 올라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그 자연적인 것을 들어서 우리에게 신앙정신 면으로 보는 그 면을 가르쳐주고 있는 거요.
첫째는 그런 지형적 산골짜기가 있는 걸 우리는 아는 거지요. 지식적으로? 두 번째는 세상은 사람이 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곳이니 사람 사는 세상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래요. 사람이 타락되고 저주받은 세상은 절대로 정확하고 영원에 속한 삶을 알 수 있는 그런 진리생명의 빛은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곳이고 악령과 악하고 거짓된 흉포한 자들이 많은 곳이 이 세상의 골짜기입니다. 맞지요? 골짜기라면 사람이 피해가 많단 말이요. 굴러 떨어지면 못 올라오고. 세상이 그런 곳이라.
세 번째는 사람 자체가 골짜기 정신 사상 골짜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저질적인 인격이 많다 그 말이요. 예, 저질적인 인격이 많다. 선악과 따먹은 그 인격은 그래요. 진정한 의미에서 인격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근데 일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인격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그 인격의 이해타산 평가성은 전부 세상에 다 놓여져 있어요.
세상에 놓여져 있는 타락되고 저주받은 그 수준이 세상성의 것을 받아먹으면 너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구원의 사람으로 너는 못 올라온다. 못 올라온다. 그 수준을 받으면 못 올라온다. 너는 거기에 묻혀버리고 그 수준의 지식가지고 이해타산 평가성 가지고 그 수준의 그 도덕성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바람 부는 곳이고 변질되고 요동되고 거기에 너는 휘말리게 돼있다. 안 한다가 아니고 네가 가지고 있는 이해타산 평가성 그 사고하는 그 지식이 너는 휘말리고 있는 지식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그 인격 성품 이해타산 평가성의 그 지식하고 예수님을 안 믿는 이방사람들의 고 이해타산 평가성의 그 저주받은 지식하고 같아요? 다르지요? 그리고 또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 유대종교들 그들의 지식의 수준은 어땠어요? 성경은 쓰지만 쓰는 그 사고방식은 전부 외식운동, 이 세상에 종교적인 의미로서 다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화인 받을 자들이라고 그렇게 저주를 하는 거예요.
오늘날 기독교 안에 성경구절가지고 전부 세상에다가 쓰지 않는가? 그 전부 화 받을 자들 아닙니까? 화인 받을 자들. 예수 믿는 사람들 억지 한 번 피우면 정말 못 당해요. 이치도 아닌 것을 가지고 억지 한 번 피우면 정말 똥이 목구멍까지 찬 사람 같아요. 화인 맞았구나. 양심이 화인 맞았구나. 자기의 인격적 수준도 높고 밝은 데로 나오지 못하고 골짜기 낮은 수준에서 다른 사람을 또 골짜기로 끌어들여 온갖 고통을 주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그런 골짜기 수준이 많다. 기독교 안에. 그걸 왜 못 볼까?
기독교 안에 우리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이단보다도 아예 사교에 가까운 그런 자들이 온갖 더러운 일반도덕성적인 면으로 보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그런 더러운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더 올라가서 그렇게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건전하게 보이는 그런 도덕성이라도 우리는 절대로 그것을 보지 말고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그건 신적 도덕성이 아닐 수도 있으니, 무슨 말이냐? 그 가르침을 보면 그건 세상성적 도덕성으로 들어가 있는 가르침이라. 제 얘기는 그런 수준은 받지 마라 그 말이요. 네가 못 올라간다. 예수님처럼 성장적으로 못 올라간다 그 말이요. 이성적 눈도 밝아야 되지만 영의 눈은 더 밝아야 돼요.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일반 도덕적 수준가지고 많이 가르치는데 사회봉사하고 일반 도덕성적 수준의 개념가지고 가르치는데 왜 진리에는 팡팡 튕기고 왜 그게 정반대가 돼요? 옳은 이치인데도 왜 정반대가 돼요. 누가 틀린 거요? 주님이 틀린 거요? 말씀이 틀린 거요? 자기가 틀린 거요?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이게? 결국 사망적인 죽음에 이르는 골짜기 수준.
그 한 번씩 텔레비전에 나오는 개미귀신 있습니까? 개미귀신 봤어요? 개미가 귀신처럼 생겼어요. 그래서 개미귀신이지? 분화구처럼 딱 파가지고 그 가운데에 개인귀신이 딱 있지요. 그러면 이제 벌레들이 지나가다가 분화구처럼 돼있으니까 자꾸 떨어지는 거라. 올라오려고 할수록 자꾸 내려가는 거지. 그러면 그 개미귀신은 암만해도 땅의 어떤 진동을 알기 때문에 싹 이렇게 집어넣어가지고 알맹이만 쏙 빨아먹고는 껍데기는 어떻게 차기도 잘 차데. 탁 차버리니까 분화구 바깥으로 팍 튕겨나가더라고. 예, 알맹이만 싹 빼먹고 껍데기는 탁 튕겨버려. 아, 세기도 세데.
맞다. 목사도 그런 개미귀신 같은 목사도 인도자들도 많다. 그런 교회도 많다. 네, 알맹이 싹 빼먹고 재산 다 탈취당하고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재산탈취 그런 거 아니라도 충성봉사 다 시켰는데도 이룰구원 차원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빈껍데기다. 빈 껍데기다. 껍데기가 들었으면 아무 것도 없는 거요. 증거도 할 수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그럼 뭐요? 세월 지나고 종교적인 하나의 명칭밖에 없어. 껍데기야. 그것 갖고 올라갈 건가? 아니요. 못 올라가요. 껍데기 갖고 어떻게 올라가요?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된다는 의미가 뭐요? 그 껍데기보고 하는 소리요? 예수 믿는 걸 자연이치로 따지던 물질이치로 따지던 이치적으로 다 돼있으니 신앙이치로서 좀 끌고 들어와서 이해타산 평가성을 좀 가지라. ‘믿사오니 믿어놓았사오니’ 그것 가지고 안 돼요. 이치에 안 맞으면 너는 틀린 거다. 진리이치에 안 맞으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진리이치의 사상이 안 들어가면 너는 신앙은 없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자기의 신앙양심이 그걸 증거를 하게 돼있다.
죽음에 이르는 그런 골짜기 수준이 있는데 그런데 이런 것이 다 메워진다고 하는 것은 그런 골짜기 같은 사망적인 것은 다 없어지고 하나님이 인격과 성품으로 다 채워지니 인간이 골짜기 같은 낮고 저질적인 수준이 안 된다는 말이요. 그 수준이 골짜기 같은 수준이 안 된다는 말이요. 세상광야에서 참 선지자 만나면 이렇게 사람이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현실이요 이게 자기 실상이란 말이요.
아무 것도 안 만들어지거들랑 헌금도 내지 말아. 밥이 아닌데 어떻게 돈을 낼 거요? 이치적으로 한 번 생각해봐요. 독극물을 먹고 어떻게 돈을 낼 거냐? 세상식당에는 파리만 하나 들어가도 그 밥값 안 받잖아요? 그런데 교회면 다 교회고 교훈이면 다 교훈이고 똑같은 양 생각해서 예수님의 교훈과 바리새인들의 그 뭐요? 율법사 서기관들의 교훈과 똑같으냐? 똑같더냐? 성경구절을 똑같이 쓰니 똑같습니까? 그 성경구절을 쓰는 그 사람의 소원 목적이 들어있는데 어떤 강조점이 들어있는데?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이 산을 누가 깎았어요? 불도저가 깎았지? 뭐 그래요? 모든 산을 올라갈 때 쉽게 평탄한 길로 가듯이 올라갈 수는 없고 어떤 산이든지 올라갈 때는 숨이 가쁘고 힘이 들더라. 힘들지요? 예배당 계단이 많으면 나이 많은 사람이 못 올라와요. 교회 잘 못 와요. 힘이 들어서. 다리 아프면 더 그래요. 예, 아무리 좋아도 가파르면 이게 힘이 들어. 그래서 안 올라. 그러고 못 올라온다 그 말이요. 쉽게 말하면. 그런데 모든 산이 낮아지면 높고 낮은 산은 없으니까 힘들지 않고 쉽게 갈 수 있다 그 말이지요? 낮아졌으니까 쉽게 갈 수 있잖아요?
첫째는 지형적으로 보는 산. 요것도 영적이치를 깨닫게 하려니까. 첫째는 지형적으로 보는 산. 산으로 오를 때는 꼭대기만 보고 갑니다. 그렇지요? 올라가서 보면 저 멀리 높은 산이 또 있습니다. ‘다음에는 저 높은 산에 올라가봐야지.’ 산에 올라가면 그런 참 신비로운 매력이 있는 거요. ‘저 산 높지. 저 산에 뭐가 있나? 또 한 번 가봐야지.’ 그래서 산타는 사람들이 산에서 많이 죽어요. 참 신비로워요. 그 우리에게 뭔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요. ‘저 높은 산에 올라가봐야지’ 하고 갔다 와서는 뭐라 그래요? ‘아이고, 다리야’ 하면서 더 높은 산을 올라갈 마음을 또 먹더라고요. 참 이상해요. 그런 걸 가만 보면 우리 인간은 올라가기를 좋아하는구나. 그거 있잖아요. ‘저 넘어 또 무엇이 있을까?’ 사실 올라가봐야 별 것 아닌데 그래요. 사실은.
그런데 높은 산에 올라가면 하루 만에 갔다가 올 산이더냐?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갑니다. 특별히 나침반과 지도는 빠뜨리면 안 돼요. 절대로. 예, 저는 김OO목사님하고 어디 가려면 꼭 지도책을 갖고 가요. 그 네비게이션 그것도 못 믿어요. 그것도 금방 뜬 거 아니면. 저번에 춘천 새로 난 길 있지요? 분명히 네비게이션에 잡혀야 되거든. 그런데 길이 나기 전에 이게 돼있는 거라. 그러니까 주로 보면 안내해주는 사람이 아가씨지요. 그래, 가만 보니까 아가씨가 성질이 나서 안 나와버려. 아무 소리도 안 해. 자기가 지시하는 대로 안 간다 그 말이요. 지시하는 대로 가만 보면 새 길은 분명히 고속도로 쭉 나 있는데 우리는 골로 가고 있는데 아가씨는 ‘가다가 우측으로 도시요 좌측으로 도시요.’ 가만 보면 옛날 길을 자꾸 지시하고 있어요. 옛날 길을.
그러나 3, 4천 원짜리는 새 도로가 났어요. 당진에서 공주로 가는 거. 거기서 또 군산으로 가는 거. 새 도로가 또 있어요. 어디로 가든 지도가 있어야 돼요. 네비게이션 갖고 다니려면 새로 금방 된 거 갖고 다녀. 아니면 길이 딱 막아져 있어요. 더러 보면 가다 보면 낭떠러지가 나오더라고. 그거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지도책을 갖고 다녀요.
그리고 제 취미가 지도 보는 취미라서 잠이 올 때 지도 보면 잠이 싹 달아나요. 그러니까 지도책에 점이 딱 하나. 군대 갔다 오신 분들, 지도책에 점 하나가 몇 가구요? 집이 몇 집이요? 열 집입니까 다섯 집입니까? 있을 거요. 하여튼 군대 가면 그런 표시가 있는데 지도책에 있다. 근데 이상하게 강원도 쪽을 가만 보면 길도 없는 것 같은데 하나 딱 있는 점은 집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동이래요. 생각하건데 여기 도대체 누가 사나? 여기에 좀 내려와서 살지. 참 하늘에서 다 보고 찍은 걸 거란 말이요.
이 지도와 나침반 빠뜨리면 안 돼요. 나침반. 산에 오르는 사람들 먼 길 가는 사람들 나침반 휴게소에 가면 조그마한 거 팔아요. 돈 만 원이면 될 거예요. 물론 핸드폰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혼자 가면 절대로 안 되고요. 이것이 일반상식이요. 그러면서 우리가 신앙의 정신으로 보면 계시 면을 또 발견할 수가 있어요.
두 번째는 우리 인간 삶을 산으로 비유해보면 ‘저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이 있겠지’ 그러지요? ‘여보, 우리 결혼해서 집 한 채 사고 요 월급 얼마씩 타면 요거 얼마면 집 하나 사겠다. 얼마짜리 사겠다.’ 그거 다 계획이 있잖아요. 그런 꿈을 안고 무슨 보험아줌마에게 보험 많이 들지요? 내가 볼 때는 참 어리석다. 그 참 요즘도 아마 나올 거요. 텔레비전에. ‘입원하면 하루에 얼마씩 나오고’ 그런 거 있데. 입원 많이 해요. 하루에 얼마씩 나온 데요. 그러니 참 나 원.
그리고 보험아줌마들이 ‘어디 들어라. 어디 들어라. 늙어서 얼마 나온다’ 하는데 그거 바라지 말고 현재 잘 먹고 병들지 말고 살아라. 제발. 그러니까 ‘아이고, 살다보면 어떻게 병이 안 들 수가 있습니까?’ ‘그래 맞다. 네 생각 그대로 네가 그렇게 되게 생겼다.’ 병 안 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기 몸을 다스려야지 ‘병들면 병원에 가야지’ 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병드는 식으로 살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어리석으냐 그 말이요. 왜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그 말이요.
암보험 다 들어놨어요? 들어놨으면 ‘그래, 네가 날 안 믿고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는데 암 들면 네가 오래 살려고, 암수술하면 돈 나오고. 그래, 너를 암 걸리게 해 줄게.’ 없을 것 같아요? 암보험 들라 그래도 이상하게 나한테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난 못 넣어요. 암 들어서 죽을 값에 난 그런 생각 안 해요. 암 안들 게 살고 몸을 잘 관리해야지 뭘.
근데 사람이 참 희한해요. 그 사람은 이유는 없어. 무슨 병이 들었던 그 사람은 꼭 병이 들게 살고 있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꼭 그 병들게 살고 있구나. 이게 또 유전이라 그러지요? 아니요. 예수 믿으면 유전을 확 바꿔놔요. 바꾸는 거예요. 바꿔요. 예수 믿는 속에는 바꾸는 게 있어요. 바꿔요. 바꿔. 일반 사고방식 가지면 그대로 유전이에요. 하늘의 사고방식을 가져. 그러면 예수님으로 유전이 되게. 그런데서 예수 믿는 맛이 나는 거지요. 그런 게 다 어떻게 보면 기적이기도하고 그런 거요.
자기의 신앙사상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야지 어떻게 마귀가 와서 항상 역사를 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요? ‘저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이 있겠지. 저 정상에 올라가면 행복이 있겠지.’ 과연 자기가 원하는 참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오늘날 많은 인생의 걸음걸이를 목표도 많이 설정하고 올라왔을 거요. 근데 행복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그 행복 딱 붙잡고 있으면 안 되던가요? 잡은 것 같으나 그것도 잠깐. 그것 때문에 목숨 잃고 병들고 한 사람도 많고 이루지 못하고 쳐다만 보다가 애만 쓰다가 죽은 사람도 많고 모두 각자가 세상에서 올라가려고 정해진 산들이 많더라. 여전히 올라가느라고 허걱거리고 있어요. 모두 자기 행복을 위해서. 그래서 마음부터가 가만 보면 참 사는 게 힘들게들 살고 있구나.
광야로 나가 선지자 만나 회개하면 자기에게는 그런 산들이 없어진다. 성경은 뭐라고 말했느냐? 해 봤느냐? 모든 산들이 다 낮아졌으니까 숨 가쁘게 올라갈 일들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요? 타락된 인간세상에는 참 행복이란 것은 없는 겁니다. 올라가서 그게 정상인 거 같습니까? 아니요.
사실 요런 이치도 있어요.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면 아주 해하고 가까워서 따뜻합니까, 어떻게 눈보라가 그냥 쌩쌩하게 붑니까? 어때요? 해하고 제일 가까우니까 제일 따뜻하고 뜨겁고 제일 해하고 가까우면 그 모든 과일나무 모든 꽃들이 필 것 같은데 왜 눈만 쌓여있고 눈보라만 부는 거요? 왜 그래요? 좀 자연물을 보고도 깨달아라. 인간세상에는 참 행복이란 없어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사람이 마음이나 성격 면에서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사귀기가 참 힘든 사람이 있어요. 왜 이렇게 힘이 드냐? 산에 오르는 것처럼 왜 이렇게 힘이 드냐? 그런 사람은요 자기 스스로도 참 힘들게 살아요. 그러니까 자기 성격이 지금 이렇게 돼있어. 이거 낮아져야 되겠는데 이렇게 돼놓으니까 자기도 힘들고 남도 그렇게 힘들고. 왜 그렇게 살기가 힘드냐? 성경 보면서 뭘 깨달아요? 뭘 깨닫는 거요? 자기 마음 자기 성격 자기 소원 목적 자기 취미 자기 추구성 성경에 다 나오는 건데 그 면으로 안 깨닫고 뭘 자꾸 어쩌겠다는 거요? 예수 믿는 걸 어떻게 믿는 거요? 예수 믿으면 확실히 자기 짐이 부려집니까? 가벼우냐 그 말이요?
선지자 만나 회개가 되면 이것도 고쳐집니다. 자기의 성격과 성질도 고쳐진다. 마음만 먹으면. 안 고치려면 예수 믿어도 죽을 때까지 해도 죽어도 고 성격 성질은 네가 못 고치고 가는구나. 그게 있어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모가지부터 뻣뻣해지나 봐요. 모가지가 얼마나 뻣뻣한지 저 밑에 다리 딱 잡고 고개 잡으면 명태처럼 빳빳하게 산 사람은 그렇게 안 돼요. 물론 용을 쓰면 되지만.
그 다음 네 번째. 신앙사상 면에서 하나님의 진리본질에서 이탈되어 세상육적인 이질로 나아가는 신앙은 참말로 힘든 신앙이다. 이질적인 신앙사상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무난하게 보이니 그것이 옳은 신앙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들어오기란 참말로 어려운 신앙사상이다. 넓은 길로 가면 많은 사람과 통하거든요? 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질로 되어있지 않고 세상성으로 돼 있어요. 그러니까 재밌게 보이는 모양이요. 재밌다 그걸 떠나서, 알아준다 안 알아준다 그걸 떠나서 이 신앙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야 돼. 아무리 세상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준다 그래도 하나님 한 분에게 밉보이면 너는 끝난 거다. 끝장이다. 그게 신앙이다.
우리 모두 다 세상에게 잘 보이려고 여기 왔어요? 하나님 앞에 그 분 앞에 잘 보이려고 여기 온 거요? 인간고집 자기 고집으로 믿는 사람이 참 많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당시의 그들처럼 오늘날 또는 언제든지 자기에게 오는 진리이치로 오는 성령의 감화 감동을 죽이게 되니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들어가기가 참 힘든 신앙사상이다.
사실 산은 아무리 높아도 하늘 아래입니다. 산은 높을수록 사철이 없어요. 늘 사시사철 밤낮으로 눈만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바람만 세차게 불고 눈사태가 수시로 일어납니다. 높을수록 그래요. 꽃이 피는 계절은 꼴도 볼 수가 없어요. 늘 죽음의 그림자가 감도는 분위기요. 삽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 늘 전제가 돼 있어요. 그게 높은 산이요.
사람이 광야로 나가 선지자 만나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 사시사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요. 다. 이렇게 보다보면 ‘굽어진 것이 곧아지고’ 하는 이런 게 뒤에 나옵니다만 이 모두 자기보고. 고칠 거요 안 고칠 거요? 안 고치던 고치든 자기 된 데로 세상을 살게 되니까. 잘못 만들어지면 비딱하게 되면 못 받아요. 맞잖아요? 받으려면 텅 비어가지고 또 그릇이 커야 되고. 크던 작던 비딱하게 놓이면 엎어버리면 하나도 못 받잖아요?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 충만하심이 광야에서 옳은 선지자 만나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자 소원 목적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 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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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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