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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3:2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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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3장 23절-4장 2절.
23절-38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아무리 봐도 자기 이름은 없어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사람들의 아는 대로 30세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사람을 가르치기 시작하니까 보고 듣는 사람마다 ‘저 청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어떻게 30세쯤 되면 가르치고 싶어요? 60살이 돼도 골 백 살이 되어도 못 가르치는 자가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해놓으면 이거 참 큰일이다.
예수님 오심하고 자기가 세상에 태어남하고는 달라요. 사실 교회에서 가르친다 하는 이것이 어떤 면으로 보면 예수님을 따라간다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아요.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따라간다. 그런데 따르면서 그 과정에서 얼마나 열심히 따르느냐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느냐에 따라서 자연생명이 끝나는 날 그 때에 참 우리 인간욕심으로 본다면 백 프로 되었다면 그 참 예수님과 같이 온전하게 만들어진 어떤 그런 것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가르친다고 하는 게 어떤 학교선생처럼 어떤 그것보다도 이게 더 배움을 받는다. 가르치는 것 같으나 배움을 받는다. 또 사실 그런 것도 들어있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평신도고 직분을 가진 자고 목사고 간에 ‘하나님의 그 일에 만들어지는 일에 우리가 수종들면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봐야 아마 옳을 겁니다. 신앙정신은 그렇게 돼야 될 것 같아요. 그 해석이 저는 참 좋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따른다면 이제 만들어져야 되는데 따른다 하면서 자기 고집적으로 이렇게 산다면 이건 말밖에 안 된다. 누가 알아 주냐? 주님이 알아줘야 할 텐데 주님이 알아 주냐? 그건 안 알아줘요. 일반세상도 그렇듯이 역시 진리신앙 생명 길 하나님의 본질로 걸어가는 성도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본질로 걸어가지 않고 하나의 기독교인 하나의 종교인으로서 산다면 이건 정신이 아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소속감을 가지고 예수형제들의 소속감을 가지고 하늘의 백성의 소속감을 가지고 옳은 진리 길 그 구원운동에는 같이 해야 된다. 변명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변명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또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목사라고 하는 목사를 통해서 나갈 때에 이 하나님의 명령이 변질될 가능성이 많아요. 요걸 이제 조심히 보아라. 대적하고 싸우지 말고. 대적을 일으키지 말고 그 때는 더 좋은 참 하나님의 인도자를 찾아 나가야지 대적 일으키고 나가면 역시 똑같은 꼴을 너도 또 보게 된다. 요게 들어있어요. 반드시 그 면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 보고 듣는 사람마다 ‘저 청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관심을 갖게 되니 예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사람들의 아는 대로’ 했으니까 소문에 소문 소문에 소문 이게 들어있다 그 말이요. ‘사람들의 아는 대로.’ ‘경험해서 아는 대로’ 이런 게 들어있단 말이요. ‘어디 사는 누구의 아들이냐’ 자꾸 알려고 했던 거지요. 그도 그럴 것이 세례 받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많은 백성들이 그 신비로운 것을 목격을 했을 테니까요.
누가는 더 연구를 하고, 누가라는 사람. 이름이요. ‘누구냐’ 하는 누가가 아니고 사람이름이 누가입니다. 더 연구를 하고 조사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족보를 읽었지만 그 이상 그 이상 이상 쭉 올라가니까 맨 위에 누가 계시죠? 하나님.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인간은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는 바대로 밑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인간은 그래요. 아는 바대로. 집도 그렇지요? 밑에서 위로 올라가지요? 그 건축자들이 시멘트를 이겨서 벽을 바를 때에 어떻게 자기 바르기 좋다고 위에서부터 발라서 내려옵니까? 그러면 하루 온 종일 발라도 붙었다가 떨어지고. 제가 실제 실험을 한 사람이에요. 밑에서 발라가지고 올라가야 밑에 것이 받쳐져 있고 밑에 것이 받쳐져 있고 그래야 바를 수 있어. 위에서 바르면 툭 떨어지고 툭 떨어지고 안 된다. 몰라, 껌은 되겠지요? 껌은 천장에 붙였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떼서 씹어도 되지요? 옛날에 그랬지요.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은 밑에서 태어났다. 성경을 보면 그렇지요. 그래서 인간이 아는 바대로 자꾸 알아서 올라간다. 올라가서 최종적으로 누구를 발견한 거요? 하나님. 그래요. 안 믿는 사람들은 땅에서 났지만 그걸 그렇게 볼 줄 몰라요. ‘그 이상 그 이상 조상의 뿌리 뿌리’ 하고 올라가니 ‘아, 백두산 굴속에서 우리 조상.’ 하하하. 곰의 후손이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 그래, 더 세계적인 학계적인 인류로 올라가면 원숭이가 아닌가? 인간의 조상. 이건 정말 참말로 기가 막히는 소리요.
혹시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그러거들랑 한 마디 하세요. “아직 신문에는 안 났는데 산에서 사는 원숭이가 어제 시청에 가서 ‘내가 인간 됐소’ 하고 호적 하러 왔더라” 그렇게 한 번 해봐요. 무슨 말이 나오나? 인간은 타락이 돼도 그렇게 타락된 지식을 가졌을까? 그래서 학계에서 학교에서 배우는 이 진화론 그냥 공부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아니요. 신앙사상적으로 보면 그게 마귀의 활동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려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보니까 그 이상 그 이상 누가는 정말 끈질기게 연구를 했구나. 결국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또 내려오면서 그 족보를 보는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구나.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아담을, 우리 모두는 아담의 그 자리에 선 겁니다. 계시적으로 보면 그렇게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아담을 창조하신 원인 동기 목적이 무엇일까?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요. 두 번째는 한 사람만 아니고 많은 사람을 왜 태어나게 한 것일까?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왜 많은 사람을 태어나게 한 것일까?
세 번째. 부모 밑에 자식 또 그 밑에 자식 또 그 밑에 자식 왜 자자손손으로 내려가도록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면서 ‘자자손손 자자손손’ 하는 여기에는 한 집에서 살면서 배우고 듣고 가르치고 ‘이래라 저래라, 할래요 안 할래요’ 뭐 이런 게 보이지 아니하는 무엇이 전달되고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그게 들어있거든요. 네 번째. 죽고 나고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죽고 무엇이 나야 하는 것일까? 죽은 것은 끊어집니까? 맞습니까? 산 것은 이어집니까? 다섯 번째. 내 위에 부모이다. 그 위에 또 부모. 끝에 가서는 누구의 명령이 제일 큰 것일까? 이해갑니까 누구의 명령이 제일 커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면 부모 부모 자식 또 그 자식 그 부모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인간본분의 교육이 흘러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근데 그게 없지요? 우리는 머리는 조그만 할지라도 앉아서 하나님의 의지를 보는 거요. 앉아서 세상사람들의 머리통을 보는 거요. 앉아서 세상사람들의 생활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를 다 하는 겁니다. 해야 돼요.
여섯 번째. 우리가 족보를 보면 익히 아는 사람도 있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있습니다. 아까 무슨 이름이 있었지요? 아니, 나는 처음 들어봐요. 구약시대 족보 아니요? 있어요? 내가 잘못 봤는지 ‘아니요’는 여기서 나오지요? 딴 데 아니요? 있어요? 하여튼 ‘아니요’가 있으면 ‘기다’ 이것도 있을 텐데. 어쨌든 ‘아니오’로만 살았나? 어찌된 거요? 예,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갔으며 누가 거역하고 살았을까? 상벌을 받은 사람은 없을까? 일곱 번째.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무엇을 가르쳤으며 아담은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본문이 아무 의미와 뜻도 없이 이름만 쓴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아담에게 뭐 가르친 거 없어요? 뭐라고 가르쳤어요?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 먹지 마라. 그리고 따먹으면 네가 정녕 죽는다. 그리고 생명과 따먹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땅에 편만하라.’ 큰 축복이요.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그게 들어있는 거요. 그 말씀대로만 순종하면. 그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딱 만들어놓고 ‘생명과 따먹고 선악과만은 따먹지 마라. 죽는다’ 했는데 자기 아기가 태어났을 때 듣는지 안 듣는지 모르지만 ‘너는 생명과만 먹어라. 선악과 따먹지 말아라’ 그 말 했어요? 안 했지? 했어요 안 했어요? 선악과 말도 안 했고 생명과 말도 안 했고.
여덟 번째. 누가 천추만대에 영원히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갔으며 누가 천추만대에 영원히 후회스러운 삶을 살고 갔을까? 아홉 번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서 왜 인간족보에 끼어들어서 태어났을까? 예수 당신은 인간족보에 안 끼어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도 있고 구름을 타고 올 수도 있고 밧줄을 타고 내려올 수도 있고 소낙비 속으로 올 수도 있고 ‘우르르 쾅쾅’ 하는 번개 속에서 태어 날수도 있고. 맞잖아요? 땅에서 태어난다면 그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 산에서 내려올 수도 있고 큰 지진을 일으켜서 땅 속 깊은 곳에서 쑥 올라올 수도 있는데. 못할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인간족보에 끼어서 태어났을까? 뭘 의미하는 것일까?
예, 그 다음에 열 번째. 나는 인간 편에서 보면 수많은 인간들 중에 하나다. 맞지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언행심사 속에 하나님을 발견하고 가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열한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신 것이 그 목적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란다면 인간 자기의 창조 원인 동기 목적을 그 분으로부터 배우고 듣고 깨닫고 그 분처럼 만들어지자.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리라. 이해가 됩니까? 모든 인간들의 교훈은 절대로 하나님의 교훈중심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 절대로. 이건 절대로다. 모든 만물은 모든 역사진행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다. 맞잖아요?
이제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에 많은 차이를 느끼는데 그 차이점은 연구를 많이 한 책들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참고해 보십시오. 간단히 말해서 마태복음의 족보는 어디서부터? 위에서부터인데, 어떤 사람으로부터? 아브라함. 그렇지요. 그럼 왜 그 분으로부터 말을 하고 있느냐? 그 차이점은 별 것은 아니요. 문제는 그 속에 계시의 정신을 가지느냐 이게 문제지. 그 이상은 그 정도로 해두고, 사실 제가 11가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한 번 이렇게 가만히 보면서 ‘아, 이게 인간의 세계구나. 아, 이게 성도의 세계구나. 인간의 소원 목적은 어떻게 가지고 살아야 되겠구나’ 이게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럼 지금 읽었지만 자기 이름은 아무개 이름 석 자 이건 없지만 그러나 4장으로 들어가서 보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시는 그 말씀이 ‘너도 하나님의 족보에’ 또 이렇게 들어있어요. 신앙사상적으로 들어있어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다운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세상자녀 세상백성은 세상정신 사상을 가지고 있는 거다. 그건 명백하다. 예수 믿어도 그런 것은 금방 금방 드러나게 돼 있다. 그러니까 자기 인격에 수치가 드러나기 전에 부지런히 빨리 빨리 바꾸고. 자기 후대로 내려가면서 디모데는 누구에게 믿음을 받은 거요? 외할머니. 그 가만 보라고요. 그런 걸 왜 무시하나?
4장.
1절-2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우리는 이 본 절을 읽고 바로 앞 절에서 아담을 만나서 아담은 어떤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건지 그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인류 대표적 조상 아담은 성령충만 되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까? 아담이 성령충만 되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그 점을 잘 알아야 돼요.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하라 그랬으면 에덴동산 꼭대기에 망대를 세우고 쳐다보던지, 뱀이 기어오는 건지 그걸 잘 봐야 될 것 아니요? 안 그래요? 그리고 아담은 어디에서 시험을 받았지요? 에덴동산. 예수님은 어디서 시험 받았어요? 광야. 에덴동산하고 광야는 이건 정 반대요 상황적으로 정 반대요. 에덴동산은 정말 행복하고 행복하고 행복의 극치의 동산. 그런데 시험에 넘어가 버렸어. 참 이거.
이런 걸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먹는 것도 풍부 돈도 풍부, 하여튼 넓은 집에다 자동차 비행기 할 것 없이 다 주면 어떻게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까? 아담 외에 또 딴 사람 있었어요? 복덕방이 있었어요? 온 세상이 자기 차지야. ‘땅에 편만하라. 세상 끝까지.’ 그 명령은 이제 생명과 따먹고 자라나는 성장되어 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명령이 들어있어. 그걸 알아라. 왜 쪼그랑망탱이로 살려고 그러냐? 첫째 왜 마음이 그러냐? 왜 성격 성질이 그러냐? 사고발상이 어째 그 모양이냐? 그래가지고 어떻게 그게 통치성이 돼 나가겠느냐? 안 된다. 앉기만 하면 ‘하나님, 내 형편 잘 아시지요?’ ‘그래, 잘 안다. 어쩔래?’ ‘이런 거 이런 거 필요합니다.’ 뭐 부흥강사는 구체적으로 기도하라고? 그래서 자기는 구체적으로 했어요? 뭐 왜 그런 마귀장난에 춤을 추느냐 그 말이요.
‘지키고 다스려라’ 하실 때는 뭔가가 빼앗는 자가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인데 ‘잘 지켜라. 아버지 어머니 어디 갔다 올 테니까 나가지 말고 집에 꼭 붙어있어서 방안에서 문 잠그고 잘 지켜라. 불장난 하지 말고.’ 누군가가 침범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타락 후에 엄청나게 일어날 일을 만일 아담이 미리 알았더라면 생명과부터 따먹고 볼 일인데 그것을 몰랐구나. 참 안타깝다. 정말 안타깝다. 사실 우리도 몰랐고 안 가르쳐줬으니 몰랐고 성경의 그 역사 그 사건을 보면서도 몰랐고 이제 또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이가 뼈가 갈리도록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구나. 아담 하와의 그 실수가 바로 자기 일인데 자기보고 하는 말인데 계시적으로 보면 그것이 와 닿지를 않는구나. 참 슬프고 통곡스러운 일이다. 이게.
그리고 작은 시험에도 시험인줄 모르고 그냥 넘어가니 그 시험에 그냥 넘어가니. 시험이라도 그래요. 아, 먼저 백기부터 들고 이렇게 넘어져서 밑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이런 꼴이 어디 있냐? 그냥 넘어가니까 오늘날 아담의 생각이나 자기 생각이나 인간생각은 다 비슷해요. 거기서 거기요.
그런데 오늘날 인간 자기를 천지창조 때처럼 에덴동산에 딱 갖다놓으면 안 따먹을 것 같지요? 내가 에덴동산에 있었더라도 별 수 없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성격 성질을 가지고 있구나. 맞잖아요? 지금도 모든 인간들이 공통으로 보이는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여서 그것이 하나님처럼 자기를 기쁘게 즐겁게 행복하게 존귀 영광스럽게 해 줄줄 느껴진다면 이미 그 사람은 선악과 따먹었다. 근데 영의 눈을 가지고 보는 신앙사상적인 면에서 선악과인줄 모르면 따먹고도 모른다. 왜? 영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그저 우리 입장에서 얘기를 한다면 나쁜 놈들이 ‘오늘 누구 집이 빈다더라. 명절에 누구 집 빈다더라. 며칠 빈다더라. 어떻게 털러가자.’ 그 선악과 따먹은 생각이요 생명과 따먹은 생각이요? 생명과지? 선악과 따먹는 생각 맞습니까? 근데 이 도둑들은 무슨 과인 줄 그걸 압니까?
생명과 선악과는 자기 속에서 열리는 거다. 그 정신 사상의 마침 끝 결과는 자기 속에서. 그걸 안다면 참 영의 눈이 밝은 사람들이라. 그러니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사실 마귀가 시험을 칠 것도 없어요. 뭐 마귀도 실력이 있는데 자기보다 실력이 없는 사람을 잡고 시험을 치기는 무슨 시험을 쳐. 그러니까 부려먹는 거지. 마냥 부려먹는 거지. 맞잖아요? 마냥 부려먹어. 부려 먹힘을 당하고 있는데도 모른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냐?
우리는요, 물론 하나님도 사람을 억압 강압적으로 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돌이키게 하는 그 역사는 계속 끊임없이 해요. 역시 우리 인간도 아는 입장에서 본다면 모르는 저 사람을 강압적으로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가만히 보면 저게 지금 넘어가고 있는데 말을 하면 들을 것 같아요? 안 그렇다. 반드시 그렇다. ‘그래, 네 자유로 어디 한 번 해봐라.’ 우리가 절대 정확한 진리이치의 사고방식과 그 결과를 알고 있으면 그건 점쟁이가 아니라도 답은 나오게 돼 있어요. 답은. 그래서 우리가 세상사람들의 소원 목적을 갖는 그 사상이나 정신을 이겨야 돼요. 다시 말하면 정복을 해야 돼요. 정복을 할 수 있는 권이 있고 지혜가 있고 지식이 있고. 예, 그 뒤에는 하나님이 돕는 거요. 하나님이 역사하는 거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 준비도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니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기는커녕 자기 마음도 자기 속에서 혼돈을 일으켜서 고통을 일으키는구나. 맞잖아요? 남을 정복하기는커녕 자기부터 속에서 야단이 난 건데. 예수 믿는 것을 교회 다니는 것을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일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 문제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기 전에 무엇으로 충만해졌지요? 성령으로 충만이 됐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오늘날 교인들이 ‘아, 저 사람 성령충만이다’ 그러면 뭘 보고 그런 소리 하지요? 간단하게 방언하고 또 안수하고 돌아다니는 거. 또 뭐가 있어요? 또 그 현상이 벌벌 떤다거나 뜨겁다거나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흔히들 어떤 것으로 충만이라고 말하는 건가? 방언하고 있는 상태, 환상을 보고 있는 상태, 음성을 듣고 있는 상태, 꿈을 꾸고 있는 상태, 밤새도록 방언기도하고 있는 상태, 떨고 있는 상태. 자기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면 옆의 사람보고 ‘나 떨고 있니?’ 하고 물어봐요.
그러면 이런 상태로 광야에서 마귀시험을 받았다는 말이냐? 아니라고 한다면 또 어떤 상태가 있겠느냐? 어쨌든 여기서 이제 몇 가지 말씀드린 그런 상태가 성령충만 상태입니까? 아니요 기요? 그럼 어떤 상태일까? 성령충만이 또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배가 부르다’ 그러면 어떤 상태를 말하지요? 밥 먹었다. 밥 먹으면 배가 부르잖아요. 그럼 밥 안 먹었는데 배가 불렀다 하면 소화가 안 되거나 여자들은 아기를 뱄거나. 그러면 배가 부르는데 자꾸 커지는구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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