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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3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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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그럼 신령성으로 만들어지는 게 뭐냐? 임시성에다가 소원 목적을 결과를 놓았다면 그건 신령성이 아니지요. 이건 물질의 것이니까. 하나님의 소원 목적으로, 시간적으로 영원히. 결과가 소원 목적이 그렇다면 그 사람의 정신 사상 모든 신앙성은 신령성이요. 그게 신령한 것이야. 그게 그 신령한 사람이요. 왜 그러냐? 그 사람의 인격 성품 정신 사상이 말을 해주고 있단 말이요.
제가 이 자리에서 머리 하얗고 하얀 두루마기 입고 꼬불꼬불한 지팡이 짚고 나타나면 신령하게 보일까요, 악하게 보일까요, 추하게 보일까요? 세상사람들은 모양새를 가지고 그래요. 나는 이발할 적마다 이게 눈썹이 길어있어. 나이 들면 눈썹이 상당히 많이 긴 사람이 있어요. 자꾸 눈썹이 길어. 그럼 우리 애들은 보기 싫다고 자꾸 자르자고 그래요. 나는 ‘가만 두어라. 산신령이 돼야지.’ 허허허. 다 잘라버리고 없어. 이제 산신령 되기는 다 틀렸어. 눈썹 몇 개 안 남은 거 그거마저 잘라버리면 그거.
하나님 앞에 죄는 교인이든 일반적이든 상관없이 선악과 먹은 입장에서 보는 죄인이 있고,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입고 가야 할 이룰구원 그 차원에서 보는 죄가 있는 겁니다. 어떻게 따졌던 우리는 죄인이요.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할 때에 의인이라고 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 우리 모두가 당신처럼은 절대 완전은 아니다. 자기를 죄인 시 하나님 앞에 죄인 시 하는 것. 인간 앞에 죄인 시 이렇게 하고 오그라들어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 죄인 시 하는 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절대 완전하신 분이요, 내가 그 앞에 섰을 때에 부족하고 연약하고 강하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게 너무 많아. 너무 많아. 그 면을 염두에 두면서. 염두에 둔자는 하나님의 좋은 것을 자꾸 욕심을 부리고. 그 참 하나님 앞에 의로운 죄인이야. 그건. 참 그 좋은 사람이요. 그러나 ‘나 죄 안 지었다. 거짓말 안 하고 뭐 나눠주기를 잘하고, 내가 딴 데 가서 얻어맞았으면 얻어맞았지 남 안 때렸다. 나 죄 안 지었어.’ 그 사고방식은 기준이 이미 틀려버렸어. 기준을 잘 가지라 그 말이요. 많이 들으면 질적인 면에서 많이 알면 판단을 금방 금방 할 수 있고 자기를 쳐다보고 사람을 세울 수도 있는 그런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죄로 인해서 모든 육적 정신적 영적에 속한 병을 앓고 있는 우리 인간입니다. 몸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지요. 정신면에 또는 신앙 면에 앓고 있는 우리 인간입니다. 모두 우리 인간이요. 앓고 있지요? 모두? 사람이 앓고 있으면 신음소리가 나요. 그러니까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은 어느 한 구석이 아프구나. 뭐가 일이 안 돼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건지, 몸이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건지, 사업이 안 돼서 그런 건지, 자식이 애를 먹여서 그런 건지, 시집장가를 못가서 그런 건지, 오래 살고 싶어서 그런 건지? 신음소리가 다 있어. 우리에게 신음소리. 그만큼 부족성이 있다는 거지요. 앓고 있구나. 앓고 있는 그 면이 아프거든요. 육신적으로는 병원에 가기도 하고.
그러나 신앙 면에서 앓고 있는 신음소리를 듣지를 못하는가? 그걸 볼 줄 알아야 돼요. 그걸.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앓고 있는 자들을 고쳐라.’ 근데 이게 글자적으로 봐가지고 이게 ‘몸에 병든 자만 오라.’ 왜 오라 그러나? 큰 광고를 해서 ‘서울운동장에 다 모여라. 그럼 내가 낫게 해 주마’ 이래야 옳지. 만능의 능력을 가졌다면 그 말이요.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을 가졌어도 그러지 않았어요.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복음을 전하시며 ‘앓는 자를 고치라.’ 고치기 위해서 내보낸다. 그럼 어느 나라에 대한 병입니까?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게. 근데 오늘날 교회목사님들이 천국의 병하고 연결이 돼 있느냐 그 말이요? 영적 면에 전부 빗나가고 그냥 다 어그러져 있고 패역하고 그냥 세상 밑에 가서 종노릇하고. 문제가 심각한 거요. 이게 지금.
죄로 인해 모든 육적 정신적 영적인 면에 속한 병을 앓고 있는 우리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을 죄인시하고 자기를 의인시하는 사람은 주님이 부르지 않는다 그 말이요. 이해가요? 생각을 해봐요. 이치가 벌써 빤하게 나오는 건데. 선악과 따먹은 세상도덕성 기준으로 살면서 성경구절을 씌워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인정을 하는 자들이 예수를 죽이는 것처럼 오늘날도 세상인본주의 육본주의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비뚤어진 줄 모르고 세상이방인들만 죄인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구나. 자기 식으로가 아니면 죄인이라고 착각을 하는구나. 물론 이방인들도 죄인이지만 진리본질에서 이탈된 신앙사상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는 말에는 자기들은 스스로가 ‘나는 아니라’ 그러고 있는 거지요. ‘죄인이 아니다’ 스스로 그러는 거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도덕성적으로 도둑질하고 그건 없지요? 남 좀 미워하고 보기 싫은 건 뭐 저녁에 잠자면서 ‘누구 미워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 용서가 되는 거고. 그렇지요? 그러면 ‘그래, 안다. 그런 걸 가지고 그 말 안 해도 내가 용서해줬다’ 그러지요? 워낙 친하기 때문에. 허허허. 그러니까 그들은 천국에 속하는 신령한 은혜 이치를 못 받는 겁니다. 못 깨닫는다. 자기 죽을 때까지 못 받고 영원히 못 받고 가는 거다. 영원히 못 받고 가는 거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죄인을 어떻게 부릅니까? 예수님이? 죄인을 어떻게 불러요? 예수님이 사람 앞에 가면서 가슴을 들여다보고 ‘너 죄지었구나. 너 나 따라와라’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죄지은 자들 다 나와라’ 그러면 나오겠느냐 그 말이요? ‘변비 걸린 사람 손들어라’ 그래도 손을 안 드는 판인데. 허허허. ‘죄인 나오라’ 그러면 누가 나오겠어? ‘나 죄지었다’ 그래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요.
우리는 사람 인격 면에 성품과 마음 면에 대해서 이게 느낄 줄 알아야지 뭐 똥오줌 그거 나오는 거 아무렇지도 않은 거요. 옛말도 있는 거요. 일반적으로. 똥을 옆에 놓고 밥을 먹었으면 먹었지 사람을 옆에 놓고 밥 먹기는 참 어렵다. 똥 더러워요? 바꿔놓고 말하면 이게 다 자기 똥인데 똥 더러워요? 냄새가 나서 조금 그렇지. 안 그래요? 자기 속에서 나온 거요. 예, 물질 이게 더러운 게 아니에요. 물질은요 다 그것도 땅으로 들어가면, 옛날에는 인분을 밭에 많이 쏟았는데 그러면 거기에 참외 수박 길러놓으면 어찌 그리 맛있는지? 정말 맛있어요. 예, 지금 기술가지고 이렇게 해도 옛날 맛은 아니야. 이 맛은 아니야. ‘아, 이 맛이야’ 이게 나와야 되는데.
나 군대 가서, 저는 똥 같은 거 더럽다고 하지 않아요. 유용하게 잘 쓰면 되는 거고, 더러운 거는 정말 사람의 마음이 더러우면 똥보다 더 더러워요. 똥보다 더 더러운 사람의 마음이 있지요? 생각할수록 이게 뭐 잡아 죽이지는 못하고 죽일 수도 없는 거지만 생각할수록 자꾸 뭔가가 생각나면 ‘에이.’ 또 조금 있다가 ‘에이.’ 자꾸 그런 사람 있습니까? 똥보다 더 더러워서 그래요. 똥보다 더러운 사람 많아. 참말로 더러워.
‘죄지은 자 다 나와라’ 그러면 나오겠냐? ‘너 죄 지었지?’ ‘나 죄 안 지었어요.’ ‘그러냐? 내가 실수했구만’ 그런 겁니까? ‘너 죄지었지?’ ‘예, 죄지었어요.’ ‘회개하라.’ 그럼 어떻게 회개할 거요? 그거 알아야 돼요. 죄 지으면 회개해야지요. 죄 지었으면. 맞잖아요? 가령 일반적으로 죄를 지었으면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지요? 그러면 그 죄를 또 안 지을까요? 그러니까 뭐가 문제요? 사람의 마음속을 바꿔야지. 옳은 지식을 넣든지. 엊그제 지은 그 죄 지식은 내버리고, 그 지식에 따라서 양심이 움직이니까 옳은 지식이 들어가면 옳은 양심이 돼요. 판단도 달라지고.
예, 이 이치가 있는 것처럼 기독교에서 죄지은 거 회개하려면 옳은 지식을 알기 전에는 회개가 안 되는 거요. 알겠어요? 예수님 보고 ‘나 죄 지었으니 날 구원해 주옵소서.’ 진리지식이 들어가야 그 사람이 구원이 된다. 알겠습니까? 사람 만들어짐에 있단 말이요. 사람 만들어짐에. 사람 만들어지는 것은 우리에게 다각적으로 오각의 오감성을 움직이게 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하려고. 그러니까 다각적인 면에 ‘요건 병이다. 요건 귀신들린 정신이다’ 다 가르쳐주는 거요. ‘요 면에서는 소경이다. 이 면에서는 너 앉은뱅이다. 너 옷 잘 입었느냐? 아니야. 너 발가벗었구나’ 이런 게 다 나온단 말이요. 영의 이치가 아니면 그거 어떻게 알겠어?
예, 이 죄인을 어떻게 부르느냐? 일반적으로 죄인은 감옥에 다 있어. 그렇지요? 그럼 감옥에 안 간 죄인은 죄지어 놓으면 숨어서 다니지요? 그럼 예수님이 숨어서 다니는 고런 죄인을 ‘요놈’ 하면서 딱 잡아다가 가두어 회개시킨다 그 말이요? 죄인을 어떻게 부르느냐?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려주면 이게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여기에는. 듣고 보니 ‘아, 내가 내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하고 회개가 이제 지식적으로 들어가고, 오각의 오감성적으로 들어가고. 들어가는 거요. 이제 소원 목적적으로 바꾸는 거요.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의 것, 땅의 사고방식을 하늘의 사고방식으로 고쳐지는 것이 회개되는 것. 회개는 그렇게 돼 있어요.
아무리 예수 믿어도 교회 나왔다고 해서 회개냐? 아니에요. 설교 들어보면 아는 거고, 기도 들어보면 아는 거야. ‘이 사람 아직 회개 안 했구나.’ ‘내가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내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나는 헛살았구나.’ 깨닫고 보니 ‘나는 주님 앞에 기대에 어긋난 죄인이로구나.’
베드로가 고기 잡힌 걸 보고 예수님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랬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고기를 못 잡았어. 근데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고기를 잔뜩 잡았어.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기가 많이 잡힌 걸 보고 알았지요? 맞아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바다라면 도사인데, 어릴 때부터 바다에서 손발이 굵어지고 바람 부는 날씨만 봐도 ‘고기가 어디서 논다. 아침에는 무슨 고기 저녁에는 무슨 고기 밤에는 무슨 고기가 어디서 논다’ 이거 빠삭한 건데. 그런데 베드로가 잡아도 안 잡혔습니까? 자기의 고기 잡는 지식을 총동원했습니까? 근데 예수님은 어부가 아니잖아요. 근데 귀신같이 압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그러니까 가만히 봐요. 뭘 보고 ‘나는 죄인이라’ 했나? “이제는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과 출생의 목적과 재세기간 동안에 나그네 생활하는 기간 동안에 나의 존재목적을 깨달았다. 이제는 옛날처럼 세상 넓은 길 사망 길로 가지 말고 ‘축복, 복복, 세상 복’ 그렇게 가지 말고 내가 갈 길은 생명 길 좁은 길 구원을 이루는 길이다. 내가 주님처럼 닮아지는 길이다.” 그렇게 됐을 때에 산천초목은 주님의 말을 듣고 바다의 고기도 주님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건 안 쳐다봤지. 버렸지. 그럼 그거 버렸으면 베드로가 죽을 때까지 고기 못 먹었어요?
‘이제는 하나님의 선의 사람으로 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살자.’ 그게 거룩의 사람이라. 그냥 ‘내가 죄 안 짓고 살아야지’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요. 공부 잘 할 수 있는 이치를 주면 그거 잘 보고 듣고 깨닫고 활용하면 되는 거지. 근데 이치는 주지 않고 공식은 주지 않고 ‘공부 잘하라.’ 아침에 선생님이 만나가지고 ‘너희들 이놈들아, 공부 잘해라’ 하며 탁자 한 번 탁 두들기고 ‘조용히 공부하고 있어’ 하고 가버렸어. 다음 날도 또 그래. 숙제 내주고 ‘숙제해왔냐?’ 어떻게, 무슨 답을, 무슨 공부가 어떻게 돼가는 거요?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얼렁뚱땅 믿는 게 아니란 말이요. 하나님 앞에 의의 사람으로 선의 사람으로 바로 만들어지자. 이게 내가 존재하는 기간 동안에 만들어질 기회다. 배우는 기간 동안에 많이 배우고 많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써먹고, 써먹으면서 또 깨닫고. 우리는 백 프로 완전은 아니니까.
동생보다 실력 있는 건 형이지. 동생보다 실력 있는 것은 언니지. 언니 오빠들이 동생의 교육을 시키는 거야. 그걸 알아야 돼. 형아 오빠 누나 언니들이 밑의 동생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거요. 그 교육은 어디서 받았어? 부모한테 받았지. 계속 내려가는 거요. 그걸 알아야 돼요. 대학공부를 해도 뭐 동생들 안 가르치고 그럴 바에야 그거 뭐요? 선생이 학생들 안 가르칠 바에야 공부한 가치가 뭐요?
하나님 앞에 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살자고 각오 결심하여 사는 것이 이게 회개입니다. 회개의 삶이요.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닫지 못하면 요건 회개가 안 된다. 깨닫지를 못하면 회개가 안 된다. 사람이 바꾸어지는 것이 회개. 이제 간단히 말하면 방향과 목적을 바꾸지 않았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교회 다녀도 방향과 목적을 바꾸지 않았으면 회개가 안 된 사람이다. 여전히 세상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란 바람 부는 곳인데 이 바람 저 바람에 날려가고 넘어지고. 잘 살고 잘 먹어도 사람이 고통을 면할 수가 없는데 그런 삶을 살면 어찌 되겠냐?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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