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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4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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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8.12.25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다시 ‘마리아의 찬가’를 읽다
눅1:46-55
21세기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보다 먹고 죽는 사람(과체중)이 더 많은 시대로 기록될 것입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하거나 당뇨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경험과 기술과 지식으로 인류는 지금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 태어나는 아기의 기대수명은 140살이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대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 (Yuval Harari)는 이렇듯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을 극복한 인류의 다음 목표는 인류를 신적인 존재로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유전공학, 인공지능, 재생의학, 그리고 나노기술의 발전의 힙 입어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Homo Deus), 즉 신적 인간으로 바꾸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모두가 성인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아니 모두가 어쩌면 사이보그가 되어버리는 세상 속에서, 아니 인간이 신이 되어버리는 세상 속에서 크리스마스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냉정하게 말해 성서는 예수의 탄생을 그리 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기사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탄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예수의 탄생이 워낙 하찮은 기사라 눈에 보이지도 않지 않았나.
예수의 탄생설화를 포함하고 있는 두 복음서의 상황도 그리 녹녹치는 않습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크리스마스 기사를 읽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가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아기 예수 탄생기사는 주된 스토리가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오는 가운데, 헤롯왕에게 잠시 들렀다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마치 신문기사를 쓰는 것처럼, 6H 원칙에 의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적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에 갔다는 이야기,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방을 구하러 다녔는데 못 구했다는 이야기, 아기를 구유에 눕혔다는 이야기, 천사들이 목동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아주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복음서의 말이 진정한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일까요. 이런 것을 목사님들에게 물으면 믿음이 부족하다, 는 답변만을 할 뿐입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최종결론은 서로 다른 마태와 누가의 판본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하여 동방박사와 목동을 다 같이 모아 놓고 양들과 선물들도 다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중앙에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정말 한가운데 아기예수가 있는 모습입니다. 그 풍경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입니다. 과연 이 모습이 진정 예수가 태어나던 그 날 밤 광경이었는지는 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크리스마스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탄생 기록이 마가, 요한복음에는 왜 없는지,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탄생의 목격자는 다른지? 목격자가 다를 뿐 아니라 이야기도 전혀 다릅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는 발생하는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복음서의 장르적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전기가 아니죠. 위인전이나 자서전, 요즘 유행하는 평전도 아닙니다. 즉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그의 생애를 추적하며 분명하고 정확한 역사적 예수의 정보를 남기려고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복음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독자들을 상대로 들려준 서로 다른 예수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2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복음서들을 읽는 독법은 복음서에 적혀있는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에 각기 다른 그 이야기들이 지금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추적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서를 바라보는 해석의 기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대목이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마태와 누가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다르지만 공통점, 즉 교집합적인 요소가 있죠. 마리아와 요셉, 베들레헴, 그리고 동정녀 탄생입니다. 그 내용은 사도신경에 분명하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태와 누가 어디에도 동정녀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동정녀는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전하면서 인용하는 이사야 7장 14절 내용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마 1:22-23).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복음서보다 훨씬 앞서 쓰여진 바울의 서신에는 동정녀, 처녀를 뜻하는 ‘파르테소스’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라디아 4:4) 이때 쓰인 여자라는 단어‘구네’는 여자 일반을 뜻하는 말입니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크리스마스의 오래된 주제는 교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앙의 산물, 믿음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복음서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바울서신에도 없었던 내용이었고, 복음서가 쓰여지던 시기에는 어느 정도 초기교회의 형태들과 움직임들이 조성되던 시기였다는 점, 나중에 만들어진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산물이라는 점 등 그런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오히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복음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보다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누가 1:35)
누가복음에 보면 아기 예수 탄생할 때 한 밤중에 나타난 천사들이 나타나 이렇게 찬양을 했다고 하죠.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눅2:14)"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전에는 이 찬양이 그저 신비롭고 아름답고 목가적이고 평온한 노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서는(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천사들의 노래가 달리 들렸습니다. 로마군의 살육으로 쌓인 시체들 앞에서, 어떤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던 그 참혹한 땅에서, 지옥같은 나날들을 살아야만 했던 민중들 가운데서 조용히 아기 예수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고지를 한 후에 등장하는 마리아 찬가입니다. 예수가 태어나던 무렵 역사적 정황을 생각하면 마리아의 찬가도 달리 읽힙니다. 흔히 우리는 마리아를 순종의 대명사로 여깁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직접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눅1:30-31) 이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한 순종의 화신이 마리아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정말 천사의 말대로 은혜였을까요?
당시 유대 사회 상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남자없이 미혼모로 아들을 낳는 박복한 팔자가 되는 것 아닌가요. 평생 주홍글씨가 마리아에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마리아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리아의 다짐은 절대로 순종적인 당시의 여성라면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 질서를 뛰어넘어 파국으로 가겠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 찬가’는 순종적이고 신앙적인 글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모럴과 관습과 이데올로기의 강제를 뚫고 나가겠다는 반역의 구절로 읽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마리아 찬가를 가만히 읽어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과 이스라엘의 운명을 동류항으로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제국의 힘과 논리속에서 휘둘리는 억압받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노래 중에 나오는 “힘센 분이 내게 행한 큰 일”은 단순히 아기를 잉태한 것, 이라고 축소적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 큰일이란 뒤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끌어내리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 큰일이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힘센 분이 행하는 큰일입니다. 이 얼마나 위험하고 반역적인 정치적 메시지입니까. 노골적으로 체제전복적인 노래를 지금 마리아가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순종의 노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마리아의 찬가가 담고 있는 당시의 유대사회를 향한 사회 정치적 차원의 메시지를 생략한 채, 단순히 신앙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마리아 찬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마리아 찬가는, 아니 어쩌면 복음서에 예수의 탄생 기사가 배치되어 있는 이유는, 무수한 정복과 학살과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던 시절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유포하기 위한 성서 저자들의 교묘한 전략 아니었을까요.
성서에 있는 예수 탄생의 기사는 놀랍게도 당대의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오늘 여기"의 사건으로 끊임없이 해석되면서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재현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리아의 노래는 어느 한 시골 소녀의 신을 향한 순종적 메시지라기 보다는, 과격하게 말하면 어느 여전사의 체제전복을 향한 권력의지로 읽어내는 것이 더 문맥상으로는 맞습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낭송되고 묵상되고 노래로 불려지면서 마리아 찬가는 변혁을 소망하는 전 세계 모든 인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이 물음이 크리스마스를 지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로마의 폭정 앞에 공포에 떨었던 우리들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이후의 우리는 주께서 행하시는 큰일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이전과는 다른 우리들입니다.
주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은 분명합니다. 그가 오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줄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며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 이후를 보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가 되게 하였고,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크리스마스날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할 수 있게 한 것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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