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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6:2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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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에배 |
6장 29절-30절.
29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사람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기의 뺨을 때린다면 가만있을 사람은 없지요? 그렇지요? 뺨을 때린다고 하는 것은 맞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인격에 모독이요 수치요 자존심이 완전히 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모욕적인 감정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라 그 말이요. 한 쪽 뺨만 맞아도 그런 것인데 양 쪽 뺨을 그렇게 다 돌려 대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기 참 힘듭니다. 어렵다 그 말이요. 혹시 바보멍청이는 이 쪽 저 쪽 계속 맞고 있을 수 있겠지만 바보멍청이가 아닌데 자기 뺨을 이 쪽 저 쪽 돌려대라는 것이지요. 이해가 가겠습니까? 이 말씀을 듣고도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안 될 거란 말이요.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임을 생각하면서 잘못이 없이 뺨을 맞을 때에 잘못이 없이 뺨을 맞는 수가 혹 있을 거란 말이요. 있을 수 있어요. 예수 믿다보면 나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딴 사람이 잘못한 것을 말하자면 나로 착각을 하고 나인 것처럼 말을 할 때에, 들을 때도 그렇게 들리고 그런 경우가 혹 있어요.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보면 전혀 아니거든. 그럴 때에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잘 알지도 못하고 생사람 잡으려고. 똑바로 좀 알라’ 이러면 저 쪽에서 ‘미안하다’ 이러고, 계속 이러면서 그만 싸움이 되거든. 예수 믿으면서 그런 경우가 혹 있어요. 저도 그런 경험을 한 두 세 번 당했나? 그래도 ‘몰라서 그렇구나. 오해를 했구나. 진실은 지나가면 밝혀지겠지’ 그런 식으로 다 흘려버렸어요.
잘못이 없이 뺨을 맞을 때에, 뺨을 맞는다고 하는 그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인격에 수치와 모욕을 주는 것.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 말이요. 뺨은 그 사람의 얼굴이란 말이요.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 말이요. 그런 경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속에서 뭐가 올라옵니까? ‘그거 잘못이다. 모르는구나. 덜 깨달았구나. 아직까지 옛사람이 살아있구나.’
오늘부터 분명히 깨달으세요. 잘못했을 때 맞는 거는 당연한 건데 ‘아, 얼굴 때리지 말고 딴 데 때려라’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어. 때리는 자는 아무 데고 때리고 싶거든? 맞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을 하고. 자기 인격의 수치감 부끄러움 이런 것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잘못 없이 육신의 수치를 당할지라도 이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 잘못 없잖아요. 근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고난을 받았거든. 그러니까 인간 자기가 잘못 없이 뭐냐 하면 뺨을 맞을 때에 말하자면 자존심을 건드릴 때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란 말이요. 그 다음 세 번째는 그렇게 되니 마음에 여유가 나오지요. 마음에 여유가 나와야 돼요. 여유를 보여줘야 돼.
그 다음 네 번째는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너의 구원을 빼앗기지 마라. 그게 들어있어. 성질 팍 부리면 이미 그건 지고 들어간 거요. 사단 마귀는 그런 걸 노려요. 상대는 그런 거 저런 거 모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을 붙잡고 누가 보냈나’ 그게 들어있거든? 그 다음에 다섯 번째는 예수님의 교훈을 헛되이 하지 말고 진리성도의 품위를 지키라는 겁니다. 예, 뺨을 대라고 하는 것은 품위를 지키라. 하나님의 자녀 또는 오래 믿었다 많이 믿었다 집사다 장로다 목사다 할 때 예수님의 교훈을 헛되이 하지 말고 진리성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만큼 마음이 넓어야 되겠지요? 품위를 지켜라. 여섯 번째는 그 면에서 이제 온전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해들 했습니까?
그러면 싸울 때에 성경구절을 생각을 하면서 왼쪽 뺨을 맞으면 얼른 생각하기를 ‘오른뺨도 돌려대라고 그랬지. 요 쪽도 때려요. 때려’ 지금 그런 말입니까?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글자 그대로 보면 그 바보 병신 아니냐 그 말이요. 일반인간으로서 이해 못할 그런 표현을 왜 하느냐 그 말이요. 그 표현 자체냐 그 말이요? 그건 아니거든. 인격에 모멸감 수치감. 잘못했으면 그건 회개하면 되지. 맞아야 싸다. 스스로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되면 ‘내가 잘못을 모르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잘못을 알라고 보내주셨구나. 감사합니다’ 그게 나올 거라고. 그 인격의 수치감을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이겨내라. 그러면 그 내용 면에서 제가 다 말씀드린 거지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고난을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겉옷을 빼앗기면 속옷이 나오지요? 맞잖아요? 속옷마저 달라고 하면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겉옷만 빼앗겨도 사람이 다 쳐다보게 되지요. 내복바람으로 나가봐요. 걸리지? 파자마바람으로 길로 나가면 다 걸리지요. 신식 유행 옷이라고 다 자기 따라할 줄 알아요? 그런데 이게 요즘은 색깔만 다르다뿐이지 내복이야. 그런데 잘 입고 다녀. 대낮인데도. 무슨 말인지 알지요? 내가 어제 말씀 드렸나? 안양 1번가에 가면 그거 흔히 볼 수 있어. 밤중이면 거기는 이제 시작이야.
이 겉옷만 빼앗겨도 사람이 다 쳐다보게 되고 그 수치심이란 부끄러움이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도 속옷마저 주었다고 하자. 그럼 그 사람 자신이 어떻게 돼요? 알몸이 다 드러날 것 아니요? 적나라하게 다 노출입니다. 그렇지요? 숨김없이 다 노출이 되지요? 옷은 사람의 몸을 보호요, 옷은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지요. 그리고 옷은 몸에 부끄러움을 감추기도 합니다. 그런 역할들이 있습니다. 비싼 옷을 입을수록 그 사람의 인격 면에서 결점이 생기게 되면 비싼 옷으로 자기를 들어내려고 하는 그 사람은 더 추해집니다. 알겠어요? 참 희한하지요?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겉옷이라고 한다면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입는 옷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물질적 요소들. 예, 그 물질이 이런 거 저런 거 많으면 자기를 위해서 활동적으로 쓸 수 있는 이런 요소들. 옳은 일을 했으면 옳은 일이, 의를 행했으면 선을 행했든지 했으면 그 사람의 옷은 선한 사람이라. 의로운 사람이라. 그렇게도 활동으로 나타났다 그 말이요. 의를 입었다 그 말이요. 선을 입었다.
이제 그런 것들을 빼앗겼을 때에 속옷까지 금하지 말라는 것은 ‘너의 진리 인격화된 참 실상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자기를 보호를 하는 자기의 옷. 그리고 좀 더 나아가면 자기가 자기의 소유물로 이제 행동 활동을 해 나갈 때에 활동적으로 보면 그게 자기 옷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그걸 가지고 어떤 일을 하면서 자기의 의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또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출 수도 있고. 활동적인 면을 물질적인 그런 것이 있으면 할 수 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더라. 그런데 그걸 빼앗겼단 말이요?
그 쉬운 예를 들자면 제일 다가올 수 있는 말은 돈은 그 사람을 보호를 하고 있지요? 생활적인 면에서나 삶의 영역에 보호를 하고 있어요. 근데 어떤 사람이, 뭐 아는 사람이든 어쨌든 아는 사람이 사기 치는 이런 건 빼앗아 가는 거지요. 아는 사람이 빼앗아 간다. 모르는 사람은 이건 도둑이고, 이제 빼앗아 간다. 안 뺏기려고 하는데 빼앗아 간다. 그럴 때에 너의 진리 인격화된 참 실상화를 보여줄 수 있겠느냐? 자기의 모든 활동은 자기의 옷이요. 상대가 그런 의나 선을 빼앗아 갈 때에 그 다음에 너의 속사람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그 말이요. 그게 너의 참 실상인데. 그러니까 그것이 안 되면 실상화가 안 된 것만큼 그 예수 못 닮은 사람이요. 그 예수 닮은 사람으로 안 돼 있으면 빼앗긴 것만 가지고 싸우게 돼요. 그럼 실상은 벌써 어찌되나? 너의 속사람은 어찌 됐냐? 참 힘들지요?
그런데 요런 게 있어. 저 번에도 내가 말씀을 드렸지만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그냥 주는 마음으로. 그냥 주는 마음으로. 받을 마음이 있으면 문서를 만들어라. 법적 자리까지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받을 마음이 있으면 문서를 남겨라. 받을 마음이 없으면 그냥 주고. 그럼 빌린 사람 입장에서는 ‘옳다. 잘됐다’ 하고 어떻게 먹고 땡? 이건 하나님 앞에 아니다. 그러면 상대측에서 거저 주었다 하더라도 받는 입장에서는 마음에 고마움과 감사함을 가지고 그 돈을 갚아주는 거. 갚아줄 때에 받는 입장에서 ‘아니다. 나는 너에게 거저 주었다. 그러니 나에게 주는 돈을 가지고 너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베풀어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먹고 땡 해버리면 그 무슨 마음이지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구나.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될까? 이제 그런 거.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은 특히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자기의 참 실상,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예수님의 정신 도덕성을 닮은 이것은 자기의 참 실상이다. 이것을 보여줄 때는 언제냐? 보여줄 만한 기회가 언제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해코자 할 때에 그것을 보여줄 수 있다. 이해가요? 이해가 쉽게 되시냐고요? 일대 일로 잡고 싸워요? 너 죽고 나 죽고? 둘 다 죽으면 좋은 게 뭐요? 참 어렵다. 그렇지요? 아니요. 안 어렵다. 예수님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 마음을 가지면 이해타산을 가지면 쉽게 쉽게 되는 거다. 그게 안 되면, 사람이 자기 것만 알고 들어가면, 나올 줄 모르고 인색하고 이러면 사람이 쪼그라져 있다 인격 면에서 넉넉하지 못하고 쪼그라져 있어. 쪼그라져 있는 그것이 얼굴로 나타난다. 마음이 불편하니까.
물질로 인해서 손해 본 것이 원통하고, 물질의 것은 사실 엄밀히 들여다보면 다 하나님 것인데 누가 가져갔다고 해서 그 사람 죽을 때까지 가질 수 있나? 없어요. 다 빙빙 돌아요. 쉬운 예로 돈 같으면 계속 돌아요. 가만있지를 않아. ‘이미 빼앗긴 것 가지고 싸우면 이게 참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느낌도 들어요. ‘싸우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느낌도 들어요. 싸우면 아닌 말로 가져간 사람이 주려고 하겠어요? 안 준다. ‘내가 주나봐라.’ 그리고 받을 사람은 계속 법적 동원을 시켜서 법에 걸려고 그럴 거고. 이게 덕이 되는 게 뭐냐? 하나도 없다. 사람 잃고 돈도 잃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물론 사전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게 분명히 법정에서 이길 수 있다고 그러면 싸우기 전까지 뭐 변호사비 대고, 이거 돈 안 들어가요? 물질이 조금 손해가 나더라도 사람을 얻어서 주님께로 밀착을 시킨다면 그거 한 번 생각을 해봐라. 법적으로 이겼다 그래도 그 사람과 죽을 때까지 이건 원수다. 그러나 좀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죽는 건 아니잖아요? 좀 고생이 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그러면 나중에 또 그 사람과 만날 때 ‘아, 요즘 어떻게 사느냐?’ 그러면 그 사람이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어떻게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 수 있겠나? ‘미안하다’고. ‘그래, 돈 되면 갚으라고.’ 돈 됐는데도 안 갚고 있다면 이거 어떻게 되지요? 이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없어진다.
‘속옷까지 벗어주라’는 것은 ‘너의 실상을 보여주어라.’ 참 실상 그 말이요. 예수님의 성품을 말하는 거요. 예수님의 성품. 자기의 선한 활동 의로운 행동에 손해를 보여주는 자가 있느냐? 그리고 내가 의와 선을 행했는데 그럴 수가 있거든. 자기가 했다고 그럴 수가 있어요. 자기가 했다고. 그걸 알지만은 주님의 실상이 자기로부터 주님의 마음 지혜 도덕성 능력성이 나갈 때는 그건 항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옳은 것은 드러나게 된다. 반드시 그렇다.
30절: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성경을 보면 이거 참말로 바보가 되라고 그러지요? 바보 되라는 말 아니요? 그래서 우리 집 밑에 좀 내려오면 예배당 창문에다가 ‘진정한 바보가 되자’ 그랬더라고요. 창문에다 그렇게 써놨어요. 지금 지웠는지 모르겠어. 진정한 바보가 뭔지를 아는지도 모르겠어. 그 사람들은.
‘무릇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너의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그렇다면 구할 것이 나에게 있으면 줄 수 있는 것이고 없으면 못 주는 거지요. 맞잖아요? 상대가 나에게 구하는 것이 나에게 있으면 내가 줄 수 있는 거고 없으면 못 주는 거 아니요? 맞지요? 그러나 구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으로 알고 늘 준비해두어야 한다. 준비성. 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늘 준비해두는 것. 왜? 주는 자가 복되다고 했으니까. 늘 준비성의 마음. 그렇게 생각해요? 돈 좀 생기면 비싼 가구부터 탁 들여놓지요? 안 그래요? 거기서 돈 생기면 외국으로 비행기 타고 여행가고 그러지요? 그런 마음 말고 살만 하면 되는 거고, 먹고 마시고 집 있으면 사는 거 아니요? 맞잖아요?
세상을 이런 행복에다가 자꾸 그렇게 물질적 그런 요소에다가 두면 사람이 한이 없어요. 그 사람은 무저갱에 빠진 사람이다. 무저갱은 끝도 한도 없어요. 그걸 우리가 잘 알아야 돼요. 사람이 마음 가지는 이거 안 믿는 사람은 물질욕심 소욕을 많이 갖고 있는데 그건 무저갱에 들어있어요. 끝이 없는 항아리라. 채울 수 없는 욕심이 많이 들어있구나. 그건 채워지지 않는 거다.
구하는 자가 있는 것을, 세상은 가난한 자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구하는 자가 늘 있을 것을 알고 준비를 늘 해두어야 한다. 주는 자가 복되다. 내가 군대얘기 했어요? 군대 훈련받고 기다보면 단추가 많이 떨어져요. 옷이 찢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럼 내가 이렇게 훈련 받으면서 또는 쉬는 시간에 길을 가다보면 막사 안에서 가다보면 단추 파란 거, 군인단추 파랗잖아요? 그럼 내가 주워서 주머니에 넣어놔. 나는 항상 조그만 주머니를 하나 달던지 파란 실하고 바늘 하나 넣어놔. 물론 찔리면 아플 테지. 나중에 단추 하나 떨어지면 검사할 때 큰일 나거든. 지적이 되고. 내가 봐서 ‘이거 단추 있고 나한테 바늘 있으니까 빨리 달아라’ 그럼 좋아하죠. 별 것 아닌데. 저는 뭐냐 하면 물론 내 것도 떨어지면 이게 하는 거지만 그런 거 항상 구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그런 거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거든. 그럼 웬만하면 나한테 오는 거야. 주는 자가 복 되잖아요. 나는 주워서 주고. 날 무시할 사람 없잖아.
영원한 것을 주면 영원히 복이 있는 것이다. 맞잖아요? 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복된 자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주라고 하는 겁니다. 임시 세상 것도 준비해두면 좋지요? 헛되게 쓰지 않고. 근데 남의 돈을 빌려다가 헛되게 쓰는 사람 있습니까? 카드로 막 긁어버리고. 이건 좀 고생을 해야 된다. 그 생각을 해서 나는 아껴서 빌려줬더니 빌려간 그 사람은 가전제품 비싼 거 다 샀구나. 이건 아닌데.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주면 안 돼. 목사님들 중에서도 있었단 말이요. 여기는 안 계셔. 오해는 하지마. 진짜 여기는 안 계셔요. 딴 데 있어. 딴 데. 그래서야 쓰겠냐? 이거 정말 이거. 그래도 어렵다고 해서 어느 목사님이 주면 자기는 신발은 2, 3만 원짜리 사 신고, 주면 자기애들은 나이키니 아주 가방도 비싼 거. 그런 사람은 도와주면 안 돼요. 못써요. 그건 사람 버려버려요. 그래서는 안 된다.
구하는 자는 자기가 구하는 것이 있는 자에게 가서 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맞지요? ‘내가 구할 게 누구에게 있더라’ 하는 걸 알고 가서 구해야지. 말하자면 이치가 그렇단 말이요. 그 다음에 지금 이게 성도보고 하는 말씀이거든. 제자들보고 하는 말씀이거든요? 그러니까 성도로서 무엇을 구해야 될는지? 사막에 가서 물을 구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주는 자는 있는 것으로 주는 것인데 구하는 자가 무엇을 구하며, 구하는 자가 왜 구하는지 이유가 있다 그 말이요. 맞잖아요? 구하는 자는 이유가 있어요. 그러면 ‘그 이유가 타당한지?’ 그게 있는 거지. 이제 상호간에. 그래서 여기서는 지혜가 필요하더라. 구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턱턱 줍니까? 우리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이 돈 좀 달라고 그러면 그냥 푹 줍니까? 세상에 그런 부모가 어디 있어요? 그럼 자식 망가져 버려요. 자식 못써요. 어디다가 쓰려고 하느냐? 그 이유가 타당한지? 예, 지혜가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신앙을 빙자한 거짓된 말이 참 많습니다. 참 많아요. 지혜가 없이 하다가 자타가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자타가 망하는 수가 있어. 그 우리 김OO목사님이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 만나기 전에 많은 목사님들을 도왔어요. 한 열 교회인가? 가령 오만 원씩만 해도 열 교회면 얼마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게 아니다. 그래, 도움 받고 있느냐? 그러면 이 진리공부 하러 나와라. 안 나오거든, ‘뭐가 바쁘네. 어쩌네’ 그러면 끊어라. 이건 안 된다. 이건 도와주면 안 된다. 다 끊었어. 끊어버리니까 어떤 소리가 들리느냐? 변질됐다. 이제 누가 변질된 건데 ‘변했다.’ 나쁜 쪽으로 말을 하는 거지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니 그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 돈을 나한테 다 달라는 그건 아니거든. 돕는 것은 그렇게 도우면 안 된다.
생명 길 좁은 길을 갈 때에 가는 사람은 누가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 갖지 마라. 가는 사람은 가다보니 돕는 자도 나오고. 이 참 자연스런 일이다. 근데 ‘내가 진리길 갈 테니까 날 도와주십시오.’ 요건 속에 세상이 든 말이야. 그건 벌써 틀렸어. 고 마음은 없어져야 돼. 여기 오시는 분들은 ‘진리 길 가면 도와주겠거니’ 하고 가는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건 이게 악한 마음이요. 상관없이 가야지. 지혜 없이 하다가 자타가 망하는 수가 있다.
지금 그 목사 뭐하는지 모르겠어. 저기, 순복음 계통인데 거기서 목사 돼가지고 공부하러 와서 이거 들으니까 ‘가서 싸움 붙어야 되겠다.’ 허허. 아주 정신이 대단하더라고요. 그래, 수원에 와서 개척한다고 하는데 지하에서 개척하다가 나간 장소야. 그런 거는 얻지 않는 게 좋아. 그 가서 보니까 이미 그 때는 우리 김OO목사님이 자비를 들여서 안에 칸을 쳐주고 이래저래 하면서 아마 거금이 들어갔어. 그냥 사람 좋아하고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면 어찌든지 진리 쪽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려고 악의 없이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그 때 우리 지하실에 의자가 열 개인가? 몇 개요? 그거 이제 있었고 강대상 있었고. 그거 줬지. 난 안 가봤어. 그 후에 가봤어. 가보니까 지하실이 너무 습기가 차. 이건 안 된다. 사람이 죽어요. 사람이 병들어 버려요. 그 뭐 지하인데다 그러니 사람이 오나? 그러니까 까먹기 시작하지. 그 이제 원금까지 다 까먹었어. 난 이제 그 의자 팔든지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여튼 어찌됐는지? 그래, 들려오는 소리가 천 상 주인은 나가라고 그러지, 원금까지 까먹었지. 그러니까 들려오는 말이 ‘왜 안 도와주느냐’ 그 말이요. ‘왜 안 도와주느냐?’ 세상에 도와줄 것 같으면 왜 그런 사람을 도와. 잘 생각을 해요.
돌아가신 스승목사님도 그 정신을 가졌어. 아니, 진리 줬고 물질 주면 누군들 못 하겠어요?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이건 뭐. 여기에는 시련 연단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스승목사님은 말하자면 발로 차기도 하고. 그래서 나를 ‘김전도사님’ 그랬다가 어느 날 하루는 ‘김집사’ 그러더라고. 그럼 이게 강등된 거 아니요?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다. 그건 당신이 부르는 거고 나는 목적은 그게 아니다. 당신 속에 있는 그 진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얼마나 들어있는지? 난 그거 가지러 왔다.’ 누가 뭐라 그래도 상관이 없어. 그까지 것 뭐.
그래, 우리가 이치적으로 보면 첫째는 물질을 구하는 자는 물질이 있는 곳으로 가서 구해야 할 것이고. 맞지요? 물이 있는 곳에 가서 물을 구해야지. 이치란 말이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는 진리생명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가서 구해야 될 것이고. 안 그래요? 돈 구하려면 어디 가서 구해요 은행가서 구해야지. 은행가면 돈 많잖아요? 그리고 담배 구하려면 담배피우는 사람에게 한 가치 구하던지 그래야지. 조그만 어린 애기보고 어른이 ‘너 담배 있냐’ 그럴 거요? 학생들 간혹 가다 그래요. 내가 머리를 스포츠로 해놓으니까 머리 하얀 건 미처 못 봤는지 ‘저 실례지만 담배 있습니까?’ ‘나 담배 안 펴요.’ 얼굴 보면 늙은 표시가 확 나니까 ‘아이고, 미안합니다.’ 어떤 사람은 늙은 사람이 담배 입에 물고 ‘실례지만 라이타 있습니까?’ ‘전 담배 안 태웁니다.’ 예, 구할 수 있는 곳에 가서 구해야 되지.
그리고 세 번째 보면 의를 구하는 자는 의가 있는 곳으로 가서 구해야 될 것이고, 그 다음에 악을 구하는 자는 악한 자에게 가서 악을 구해야 될 것이고, 목마른 자는 물을 찾아서 구해야 할 것이다. 산에 가서 ‘목이 마른데 물이 어디 있습니까?’ 산등성이에 있습니까, 산꼭대기에 있습니까, 골짜기에 있습니까? 골짜기에 있지요? 골짜기에. 물 먹으러 갈 때 지혜를 써야 돼. 사방에 뭐가 있는지? 피해를 입을 수가 있으니까. 고로쇠 물을 먹는 사람이 어떻게 나무도 없는 곳에 가서? 그거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지혜를.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명령이든 권고성이든 주라고 명령하실 때는 여기에는 너의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맞잖아요? 자기 거 어디 있어요? 태어나면서 뭐 갖고 나왔어요? 자기 것이 어디 있냐? 그래서 첫째는 물질의 것은 너의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태어날 때 가져온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몸도 주님께서 만들었으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것도 다 주님의 것이요. 자기 것이라면 죽을 때 다 가져가야지. 그런데 못 가져가지요? 다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쓰라고 주셨는데 그러나 현재 나에게 없으면 주지를 못하는 겁니다. 구하는 자가 있어도 없으면 못 주는 거다.
그 다음 두 번째, 깨달아 알아지는 것.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말씀을 깨달아 가진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다. 이 면에서도 아는 것이 없으면 못 준다. 깨달아 안 것도 없으면 못 준다. 모두 없어서 못 준다고 하면 그 면에 대해서 오는 관계성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알겠어요? 물질이 없으면 못 주고 깨달은 거 진리이치 말씀 깨달은 거 없으면 못 주고. 그럼 어떻게 자기 혼자 살아야지요?
남에게 빌렸느냐? 고마움을 알면 자기도 남에게 빌려주는 것이 사람 아니요? 맞잖아요? 빌리기만 하고 빌려줄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관계성을 가질 수 있어요. 안 그래요? 사람이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구하는 자에게 주며’: 주라고 하시는 것은 주는 것을 보아서 더 풍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주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는 사람 보면 참 그 마음이 풍부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이웃에 부침개라도 부쳐서 이렇게 나눠먹으면 그 마음이 풍부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 참 아파트에서 가만 보면 이게 분명히 나이 든 옛날사람 집에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무슨 말이냐? 시집에 갖다오면 시집에서 고구마니 감자니 싸준 거야. 또 보면 밤도 싸준 거고. 예, 그런 걸 우리 아파트 앞에 밭에서 종종 보거든. 그런데 가만 보면 그걸 버렸어. 이게 나이 많은 사람은 잘 안 버려요. 어찌든지 먹을 만하면 그저 주워다가 먹는 거지. 내가 볼 때도 참 아까워. 아직 생생한데.
이게 아마 모르긴 해도 무식하면 그러지를 않을 거다. 무슨 말이냐? 요즘 대학교 안 나온 사람 어디 있어요? 대학교는 나왔지. 그런 걸 삶아서 식구들에게 줄줄 모르지, 맨 그저 감자도 이렇게 잘 반찬을 해서 요리할 줄 모르지, 고구마 삶아서 오순도순 먹을 줄 모르지, 삶아서 이웃집에 건너가면 아, 그 얼마나 풍부해요. 그 마음이. 밭에다 버려버렸어.
예, 생각을 합니다. 여자는 그렇다 치자. 도대체가 어떤 남자새끼가 저런 여자를 데리고 살까? 자꾸 궁금해져요. 이제 남자새끼가. 참 한심하다. 살아갈수록 저건 한심한 가정이 되겠구나. 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 아니요? 해먹을 줄 모르면 내버리고, 남에게 나눠줄 줄 모르고 그냥 썩어서 다 내버리고. 참 이게 아파트에서 주로 그래요. 가만히 보면. 그러니 그 속마음이 쭈그러질 대로 쭈그러진 사람이다. 이건 앞길이 훤하다.
만일 줘놓고 도로 달라고 한다면 의롭고 선한 것은 무효화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는 끊어지고 사람과도 단절이 된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사람과 단절이 되면 어떻게 그게 사람이 사는 건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하루 온 종일 하나님의 의를 주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는 역시 나중에 주는 자로서 풍부하게 돼질 수 있구나. 이치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는 역시 자기도 풍부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도 주는구나. 물질 뭐 구태여, 그러니까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은 물질에서 점점점점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제가 주로 많이 가요. 빨리 깨달으라고.
주는 것도 있어야 주고, 나에게 구한다고 해도 없으면 못 줍니다. 혹 무엇이 있더라도 줄 마음이 없으면 못 줘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지요? 첫째는 자기 욕심 차리느라고 안 주는 사람이 있고, 두 번째는 사람이 못돼먹어서 주기 싫다는 거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쓰기 위해서 지혜롭게 하느라고 안 주기도 하고.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못 쓰게 만들고 사람을 버리게 됩니다. 물질도 낭비되고 사람도 원수 되고 배반하고 떠나가게 되고.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러나 진정 구원에 관해서 구한다면 이런 면에서는 안 주면 안 돼요. 구원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거 깨닫는 거 이런 면에서 안 주면 안 된다.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자타가 받게 되는 것이다.
근데 여기에 가만 보면 전도사들은 참 뭐 자꾸 묻지요? 신학교에서 보면 상당히 많이 물어요. 그럼 이건 대답을 다 해 줄 수가 없어. 대답을 곧이곧대로 해주면 그것이 다인 줄 알아. 그건 왜 그런가 하니 밑에 깔려 있는 건데 그 깔려있는 것은 몰라요. 그러니까 말한 그것만 딱 알아요. 말한 그것만 딱 알면 또 다 안 것처럼 딴 데 가서 냅다 하면 이게 비딱해질 수 있어. 그래서 묻는 대로 다 답을 해 줄 수가 없어요.
스승목사님은 묻는 대로 답을 해 줄 수 없으니까 ‘예배시간마다 설교나 잘 들어라. 따지지 말고.’ 그럼 해답이 나온다 그 말이지. 축척되면서 ‘아, 요렇구나’ 이렇게 나와야 될 텐데 밑에 깔린 건 없고 고것만 똑 떼서 알려고 그러니까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그럼 판단만 자꾸 하게 된다. 못써진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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