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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96 추천 수 0 2020.11.04 05: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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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0:19-2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19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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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부활절 둘째 주일, 2020년 4월19일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 나타나심


신약성경의 앞부분에 네 권의 복음서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입니다. 복음서들의 시작 부분은 적지 않게 차이가 있지만, 마지막 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마지막 부분은 바로 예수의 부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부활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부활 이야기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묻었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죽었던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빈 무덤과 예수 현현은 독립적인 사건으로 다뤄집니다. 빈 무덤과 현현 사이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원래의 몸으로 복귀한 사건이 아니며, 가사 상태에 떨어졌던 사람을 눈치 빠르게 살려낸 사건도 아닙니다. 예수 부활은 오늘의 CCTV 카메라로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인식 범주에 들어오지 않기에 사람들은 예수 부활을 믿기 힘들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표적인 제자가 도마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도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 20:19절은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오늘 시간표대로 하면 주일 저녁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사흘 전 금요일에 십자가에 처형당해서 묻히셨으니 제자들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갑니다. 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갔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추종자들은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어 무덤에 안장되었던 예수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겁니다. 제자들은 말문이 막혔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의 인사인 ‘샬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뒤에 자신이 누군지를 알리기 위해서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예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 처형이 집행될 때 받은 깊은 상처가 있었을 겁니다.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을까요? 예수의 손과 옆구리를 본 제자들은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더 나타나십니다. 26절에 따르면 여드레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이때도 제자들은 집 안에 있었고 문은 닫아두었습니다. 그리고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본문이 말합니다. 굳이 도마를 짚은 이유는 예수님이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보았다는 동료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25절입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면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예수의 손에 난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옆구리에도 넣어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라는 도마의 주장은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를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며칠 전에 죽었던 사람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번째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7절입니다.

 

네 손가락을 이미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도마가 예수님의 몸에 실제로 손을 댔을까요? 이에 관해서 본문에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만 손을 대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에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묻혔던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 20:17). 부활의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서로 악수를 할 수 있듯이 접촉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손과 옆구리


오늘 본문에서 약간 특이한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수의 손과 옆구리입니다. 손에는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습니다.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있다는 말은 예수가 우리와 똑같이 살과 피를 지닌 존재였다는 의미입니다. 귀신에게는 그런 자국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의 신성만 강조했습니다. 예수는 신이기에 실제 인간처럼 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먹고 마신 일은 실제가 아닙니다.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뿐입니다.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믿음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더 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강했습니다. 예수는 신이기에 배가 고프면 안 되고, 아파도 안 됩니다. 우리와 똑같이 육체적으로 인간적인 약점이 있는 존재는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밥을 먹는다거나 병이 들어서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살았던 부분과 우리와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에게 나타난 삶은 실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신의 겉모습에 불과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와 달리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의 상처 난 손과 옆구리는 예수의 삶이 우리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렇게 전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했고, 그의 손과 옆구리에 깊은 상처가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관념(이데아)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실질적인 몸으로 살았던 분이십니다.


중세기 기독교는 인간의 몸을 낮춰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청교도 신앙이 그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영향을 많이 끼친 영성입니다. 청교도 영성에 기울어진 이들은 남녀사랑을 부정하다고 보았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는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으나 하나님을 위해서 순결한 삶을 선택했다가 요양원에 외롭게 죽은 한 여자의 비참한 운명을 다룬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녀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동성애자들을 매도하는 기독교인들이 우리나라에 많은 이유도 인간의 몸을 부정적으로 보는 청교도 신앙의 영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도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살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낮춰볼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인간의 몸을 자기 욕망의 실현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다룬다는 데에 있겠지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


도마는 예수에게 대답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베드로의 고백(마 16:16) 못지않은 위대한 신앙고백이 도마의 입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라는 별명을 듣는 도마에게서 이런 대답이 나왔다는 게 대단합니다. 이어서 도마에게 주신 예수 말씀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29절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도마도 보고서야 믿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보지 못하고 믿으라는 말이냐, 또는 보고도 믿기 힘든 마당에 어떻게 보지 않고도 믿으라는 말이냐, 그렇다면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믿는 광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들어 있으니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보통 인식의 확실성을 오감에서 찾습니다. 오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입니다. 과학적인 판단도 이런 오감을 기본으로 합니다. 인간은 더 정확히 보기 위해서 망원경과 현미경을 만들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우리는 바이러스에 관해서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전자 현미경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함으로써 우리는 미몽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귀신의 작용이라고 생각할만한 것을 이제는 과학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해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눈이나 귀, 또는 과학 도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만이 참되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궁극적인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 후반부의 배경은 중국 간도 지역입니다. 일제 식민 시대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와 친일세력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박경리 선생은 소설을 쓰기 전에 그 지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보니 자신이 소설에 묘사한 지리적 배경이 실제와 놀랍도록 비슷했다고 합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보지 못한 지역을 생생하게 살려낸 것입니다. 40대의 젊은 나이로 죽은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을 가장 깊이 있게 전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영래 선생은 전태일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인처럼 영혼이 맑은 사람은 보지 않고도 더 깊은 세상을 찾아냅니다. 영혼이 무딘 사람은 현장에 있으면서도 엉뚱한 말을 합니다. 정말 근본적이고 소중한 일은 직접 봐야만 아는 게 아닙니다.


이런 설명보다는 성경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더 익숙하겠지요. 하나님을 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관한 가장 적합한 성경 이야기는 모세의 시내산 전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고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말씀을 하나님에게서 들은 모세는 용기를 내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했습니다(출 33:18).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모세였지만 하나님을 직접 본 적이 없으므로 답답했겠지요. 그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 하나님은 모세를 손으로 덮어서 보호하시고, 손을 거두면 모세가 하나님의 등만 볼 뿐이지 얼굴은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직접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삶은 부분적이면서 잠정적이고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 알고 계실 겁니다. 하나님의 등만 본 모세처럼 우리도 생명을 직면하지 못하고 등만 보면서 삽니다. 역설적이지만, 이 땅에 사는 한 이게 오히려 복 있는 삶입니다.

 

복된 자


오늘 본문 29절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기원후 90년 어간의 기독교에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이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예수 경험이 제자들보다 훨씬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본 제자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그들을 향해서 “아니다. 예수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믿는 당신들이야말로 복된 사람들이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보지 못하고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예수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위에서 예로 든 모세 이야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본 것처럼 오늘 우리는 예수의 등만이라도 봐야 합니다. 예수의 등을 본다는 말은 예수를 직접 보는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그 매개는 교회에 전승되어 내려온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모두 그 전승만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일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게 실제로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십자가에 처형당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다시 제자들 앞에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그 대답입니다. 그 사실이 바로 믿음의 대상이고 내용이고 실체입니다. 예수는 죽음을 극복한 자입니다. 죽음에 머물지 않고 살아난 자입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토대는 예수를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되다고 했습니다.


고전 15장에는 예수 부활에 관한 증인 명단이 나옵니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예수 부활 경험은 똑같지 않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아주 특이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이후 지상에서 40일을 머물다가 승천했다는 시간표를 전제하면 바울은 승천 이후에 예수를 만난 겁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가는 도중에 큰 소리와 빛으로 부활의 주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오늘 우리 역시 고전 15장의 명단에 나온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의 예수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죽음을 극복한 예수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경험이 실제로 있으십니까? 그런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릴 겁니다.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런 문제를 아예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가 여러분에게 ‘주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경험되었는지를 보면 됩니다. 너무 흔하게 들었던 말이라서 시시하게 느껴지는지요. 더 간략하게 말하면, 예수를 통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루 일을 끝내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드는 이유는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뜰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게 끝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장이라면 죽음은 정말 우리에게 절망이고 지옥입니다. 죽음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라면 현재의 삶 자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더 살아서 뭐합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눈이 뜨이는 아침의 희열을 미리 맛본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전통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와 똑같이 손과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지녔던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바로 그 예수를 믿는 여러분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보지 못하고도 믿는 여러분과 저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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