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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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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예배의 정의.
예배의 정의가 무엇이냐? 예배순서가 많을수록 좋은 예배고, 예배순서가 적을수록 가짜냐? 예배란 의식이나 순서나 절차가 있고 없고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거다. 우리교회는 예배순서가 거의 없는데, 어떤 사람은 우리교회가 예배순서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이단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 몇 마디를 하고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라고 하심으로써 예배의 정의를 내려주셨다. ‘이 때’란 장소적으로는 야곱의 우물가인데, 이곳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 몇 마디를 하신 게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하신 거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이 우물을 계속 길어먹어도 계속 목이 말랐다. 그래서 여전히 물을 길으러 온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상당히 부지런한 거다. 그런데 이것을 영적으로 돌려서 신앙적으로 보면 이 여자는 영적인 면에서 부지런하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이 여자는 남편 다섯을 갈아치우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편을 둔 지저분한 사람으로 보이지를 않는다.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하시는데, 야곱은 물질적 소원 목적으로 살았다. 예수를 믿으면서 야곱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 욕심의 신앙 정신 사상을 가지게 되면 세상 것 중에 더 좋고, 더 행복하고, 더 많이 가지는 것으로 자꾸 갈아 치우게 된다. 믿는 사람이 세상 육적 부패성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환경에 따라 세상 것에 대한 요구조건이 자꾸 달라진다. 이게 남편을 자꾸 갈아 치우는 거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거쳐서 갈릴리로 가는 중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마리아 여자를, 영적으로 말을 하면 남편을 자꾸 갈아치우는 성도 사마리아 여자를 깨우쳐 주려고 사마리아로 올라가신 거다. 이 사마리아 여자를 단순히 지저분한 여자로만 보셨다면 예수님은 절대로 그곳으로 가시지 않는다. 구원을 이루게 해 주고 싶고, 말씀을 깨닫게 해 주고 싶은 성도라야 당신이 그곳으로 가시고, 아니면 당신의 종을 그곳에 보내시거나, 아니면 성령님의 감화로 그 사람에게 말씀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도 한다. 이런 일이 다 현실에서 되어지는 거다. 이룰구원은 현실을 벗어나면 의미가 없다.
예수를 믿는다면 주님께서 ‘이 때다’ 라고 하신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신앙 사상적으로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예배순서가 별로 없는 우리교회를 이상하게 생각을 한다. 예배순서가 많던 적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깨닫는 게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 이게 예수님을 만나는 거다. 참 예배는 모양새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예배를 통해 인격적으로 진리이치의 깨달음을 받는 거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예배를 드린 곳은 무슨 화려한 건물 안이 아닌 우물가였고, 예배순서도 없고, 헌금을 드리는 시간도 없고, 찬양대도 없고, 표면적으로 보면 남편 대여섯 명이 있는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뿐이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몇 마디 안 되지만 사마리아 여자는 이 예배를 통해 생명수를 받아먹었다. 그래서 이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참 예배가 되는 거다.
성경을 일반적 역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즉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는 절대로 못 푼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교인들은 로마 밑에서 로마황제를 하나님처럼 여겼으니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의 율법과, 강대국 로마의 지식 중에 어느 게 더 높은 거냐? 로마의 지식이다. 그러니 유대나라가 로마에 정복을 당한 거다. 그러니까 그들의 수준과 로마의 수준이 질적으로 서로 통하고 있으니 이런 지식으로 신앙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게 된 거고, 로마에 정복을 당한 거다.
신앙의 이치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신앙의 이치는 하나님의 공의다. 이 절대는 하나님에게만 있지 세상에는 없다. 따라서 믿는 내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 지식, 선, 사랑, 거룩 진실, 의와 주권을 발견해서 이것을 내 인격화 성품화 시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된다. 이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야곱의 삶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겠다는 정신을 말해준다. 이런 정신을 가지면 형님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고, 외삼촌을 속이고 돌아오는 등의 얄팍한 수작들이 막 나오게 된다. 이렇게 살아온 야곱이 요셉으로 인해 애굽의 왕 앞에 가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실토를 했다. 그렇다면 세상축복을 목적으로 별의 별 수단을 다 쓰면서 험악한 세월을 살아온 야곱과, 애굽을 통치하며 누리고 있는 애굽의 왕을 비교해 봐라. 뭔가 깨달아지는 게 없느냐?
하늘나라에는 예배순서가 없다. 모든 게 기쁘고 즐겁고 행복의 극치다. 현세에서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삶을 통해 그리스도로 인격화 성품화 자체화 실상화 되어진다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과 같이 하신다는 약속이 되어 있고, 여기에는 성령님의 감화의 깨달음이 들어 있다. 그리고 말씀이 깨달아지면 자기의 과거가 깨달아지고, 과거가 깨달아지니 현재에 잘못된 게 알아지고 고쳐나가게 된다. 이게 온전을 이뤄가는 성도의 생활이요 예배의 생활이다.
예수 믿으면서 이것도 없고, 예배의 정의도 모르고, 신령천국의 본질도 모르면서 우리교회 예배에 참석해 보고 예배의 순서가 자기가 그동안 다니던 교회들보다 적다고 해서 ‘이상하다. 이단이 아닌가?’ 라고 한다면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상한 거다.
다른 교회들은 대부분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예배를 마치지만 우리교회는 그렇지 않은데, 주기도문은 교인들에게 외우라고 준 거냐, 주기도문과 같은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라고 준 거냐? 후자다. 그런데 예배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고서는 아버지 하나님처럼 만들어지는 것은 없이 썩고 불타지고 없어질 세상 것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면 이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고 있는 거냐? 누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겠느냐?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이치를 모른 채 말을 하게 되면 심한 말로 미친 사람이 되고, 이런 사람은 말이 일관되지 않고 이랬다 저랬다 하기 때문에 이치가 없는 말을 하게 된다. 자기의 분수와,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신분도 모른 채 함부로 날뛰면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왕따가 된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예배순서와 의식이 거의 없고, 또한 예배 전에 미리 예배당에 와서 성경에 대해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한다. 아무렴 미리 와서 잡담을 하는 것보다 성경을 배우는 게 더 낫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 좀 달라’고 하셨는데, 이 대화를 매개로 성경을 깨닫는 쪽으로, 말씀이치를 깨닫는 쪽으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실지로 여자에게서 물을 얻어먹었느냐? 안 얻어먹었다. 여자는 물을 길으러 왔는데도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니까 물을 뜰 것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오신 의도성을 놓고 본다면 예수님께서 표현적으로는 ‘다시 목마를 물을 얻어먹자’ 라는 것 같으나 실은 이 여자로부터 얻어먹을 물이 없다. 무슨 말이냐? 인본주의 교회에는, 물질 이해타산으로 나가는 교회에는 성도가 먹을 신령한 물이 없다는 거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주님을 발견한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받아먹고, 동네사람들에게 가서 이 생명수 영생수를 나눠주었다. 이게 전도다.
일반적으로 안 좋은 물 속에는 여러 가지 잡균이 들어 있는데 사람이 이것을 마셔서 이 균들이 피를 타고 돌게 되면 그 몸이 어떻게 되느냐? 공기도 마찬가지다. 깨끗하지 못한 공기를 계속 마시면 생명이 단축된다. 음식에 독성이 들어 있으면 몸에 해가 간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면에서 우리들에게 영생수 생명수가 꼭 필요함을 말해준다.
우리가 생명수를 마시려면 하나님과 의사단일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진리본질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 인도자가 석가모니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의 말을 가져와서 성경에 붙여서 해석을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도의 신앙생명을 죽이는 독극물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인간 누구의 말을 끌어다 이용을 했느냐?
석가가 예수님보다 앞서 왔기 때문에 석가가 진짜고 예수는 가짜냐? 성경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고 했다. 아브라함이 석가보다 뒤에 왔느냐? 아브라함도 선재적 그리스도로부터 지은 바 되었고, 석가도 그 분으로부터 지은 바 되었다.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다. 그럼에도 믿는 사람이 세상의 역사나 철인들의 말을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이 본다거나 성경말씀처럼 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거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무슨 지식을 가지고, 무슨 감화로 말을 하는 건지 그 뿌리를 캐는 게 성경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찾는 거다. 인간에게는 절대가 없다. 교회에서 진리이치는 안 주면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하는 건 안 된다. 룻에 대해 말을 하면서 ‘룻처럼 시부모를 잘 섬기라고 설교를 한다면 이건 해석이 틀린 거다. 룻에 대한 말씀이 시부모를 잘 섬기라는 거라면 시부모가 죽은 사람은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킬 거냐? 성경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된다.
성경을 들고 가르치면서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이용해서 ‘누가 이 말을 했고, 누가 저 말을 했고’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쓸 데 없는 말이다. 이치가 없는 말이다. 성경을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데서 나온 지식으로 해석을 하면 바른 해석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생일축하 예배니, 어버이주일 예배니, 어린이주일 예배니’ 이런 게 있는데, 예배에 왜 이런 게 왜 필요하냐? 이건 인본주의 사랑으로 아가페 사랑을 둘러엎는 짓이다.
성경에서 여자를 말하던, 남자를 말하던, 아이를 말하던, 노인을 말하던 전부는 교회에게 주는 말씀이니 말씀의 이치에 밝은 사람은 어떤 말씀에서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보거나, 일반 도덕성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무엇을 하건 주 안에서 해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주님 밖에 있으면서 주님 밖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믿는 사람이 아무리 일반 도덕성적으로 완벽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본질을 자기 인격화 자체화 실상화 성품화 시키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떨어진다. 남이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못 따라오니 쳐지는 수밖에 없는 거다. 이방 불신자들은 세상에서 부자가 되겠다고 앞서 달리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은 무슨 경주를 해야 하느냐? 사도바울은 죽을 때까지 믿음의 경주를 했다.
◆ 예배의 정의는 하나님을 만나고 만들어지는 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거다. 자기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지식이 들어가야 자기의 인격도 공의로운 신앙으로 나온다. 사람은 무엇을 배우던 그 지식으로 주격화 되어 있으면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래서 잘못된 지식을 받으면 그 삶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유교나 불교나 이방 종교인들은 잘못된 지식을 받아서 그 종교인이 된 거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무슨 지식이 없다는 거냐?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생을 아는 지식, 이룰구원의 이치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인격적으로 망하고, 성품적으로 말하고, 희로애락적으로 망한다. 결론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기준으로 살면 사람이 망한다. 이렇게 살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오신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잘못된 지식을 가진 교인들이 참 많다. 표면적으로 보면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등등의 잘못된 자들이 있고, 기성교회 안에도 보면 잘못된 교훈을 받아서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다.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영을 주님의 구속으로 살리신 게 기본구원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된 거다. 이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은 살아난 영이 자라야 하는데,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고 깨달으면서 사건 환경 가운데서 깨달은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영이 성장을 하게 된다. 이건 이룰구원이다.
이 영인성장을 위해서는 사단 마귀도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거짓 종들을 허용하셔서 이 거짓 종들이 교인들에게 예수이름으로 세상을 가지라고 유혹과 미혹을 하는 거다. 이런 것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을 구해야 한다.
주일을 왜 지키는 거냐? 날짜 개념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날로 지키는 거다.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상고하는 거고, 진리이치를 깨닫는 거다. 이게 없이 날짜만 지키는 것은 주일성수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의 예배도 아니다.
안식교회에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목숨을 다해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면 이 날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 보았느냐?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을 잘 지켰는데 주님을 못 만났다. 우리는 날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을 한다면 이 사람은 날마다 안식일로 사는 거다.
예수님께서 성육신 때에 사마리아 여자에게 주님을 만나는 게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어떤 거냐?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무리 좋아도 야곱이 가졌던 물질성적 신앙이라면 다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것, 속에서 솟아나는 것, 진리 깨달음은 속에서 솟아나는 거다. 물질에 관계없는 것. 신령한 하늘나라의 것을 소원 목적하며 영 위주로, 영인성장 위주로 살아가는 게 신령과 진정의 예배의 삶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으로 이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자꾸 육 쪽으로 기울고, 세상을 구하면 영적인 면에서 물이 마른 사람이다. 이런 마음은 귀신이 들어와서 장난을 칠 수 바탕이다. 자기 것은 다 버리고 자기를 예수님으로 성품화 인격화 시키는 게 신령과 진정의 예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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