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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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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14절-15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아버지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영광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존재적으로만 나타나고 주는 효력이 아무 것도 없다면 소용이 없다. 무슨 말이냐? 예수님 당신이 오신 것은 ‘자 봐라.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창조한 목적은 너희들을 나처럼 만드는 거다’ 이걸 알려준다. 주님의 하나밖에 없는 영광,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그 분의 영광을 나에게 주겠다는 거다.
세상에 속한 교인들은 하나님은 뒷전이고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온 영광은 얼마 못 간다. 이 영광성은 세상이라는 바람을 타기 때문에 나에게 왔다가도 얼마 안 가서 가버리고, 또 내가 그 영광을 잡으러 가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내 것으로 삼으면 삼느니만큼 나도 영광스러워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라고 하는 것은 믿는 우리들에게 선악과 따먹고 죽은 사고방식, 죽은 지식, 죽은 취미성과 간구성과 영광성에서 하나님 쪽으로 먼저 일어나라는 거다. 먼저 앞선 자가 가르치게 되고 깨우치게 되고, 먼저 아는 자가 가르치게 되고 깨우치게 된다. 이러면 머리가 된다. 믿는 우리에게는 이게 먼저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 썩고 불타질 것을 제일 첫째로 가지지 않고 하늘의 것, 아버지의 것, 영원히 존귀 영광이 될 것을 가지셨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믿는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하는데 속화된 기독자들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을 가지려고 하니 주님께서 그걸 주시지도 않을 뿐더러 주신들 간수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자기 목숨마저 간수할 수 없게도 된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을 입는다면 그 신앙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질적으로 믿는 사람은 선악과 따먹은 죽은 지식, 그 영광성, 세상의 소원성을 예수님께 자꾸 채워달라고 한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는 게 아닌데 어떻게 채워주시겠느냐? 예수를 믿는다면 신앙의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열심 이전에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하고, 신앙의 이치가 바로 상태에서 열심이 나와야 빨리 상승하고 존귀 영광케 된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믿는 사람이 아버지의 영광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너는 내 독생자의 영광이다’ 라고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나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믿는 내가 인격과 성품이 주님처럼 되면 나에게도 ‘너는 영능의 실력적으로, 영모의 미모적으로 나를 닮았으니 교회를 맡아라. 하나님 나라를 맡아라’ 라고 하시게 된다. 그런데 세상에 살면서 영능의 실력은 닦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도 없으면서 하늘나라에 가서 영광자가 된다? 이건 이치가 아니게 예수를 믿는 거다.
비교를 해서 판단을 해 봐라.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낙원에 가게 된 한 쪽의 강도와,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사도바울이 천국에 들어가면 그 영광이 같겠느냐? 성경은 같지 않다고 한다. 해와 별과 달과 별들의 영광이 다르고, 별과 별들의 영광이 다 다르다고 한다. 영능의 실력을 말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예수를 믿어도 자기의 성격 성질을 하나도 못 고치고, 전도도 못하고, 교인들과 대화도 안 하다가 달랑 천국에 가는 게 믿는 거냐? ‘너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했는데, 빛 앞에서는 사물의 크기나 모양이나 색상이 다 드러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이런 역할을 한 것은 전혀 없이 밥 먹고 교회만 다닌다면 무슨 가치가 있느냐? 이러면 연관성에 있어서 무재미다. 예수는 이렇게 믿는 게 아니다.
세상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의 장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연관을 맺으면서 사귀기도 하고 먹고 살기도 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나 이건 허황된 거다. 세상의 존귀 영광은 올라갈수록 사람이 허해진다. 사람은 영육 결합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적인 면이 채워지지 않으면 육신적으로 기쁨과 만족을 영광을 누리면 누릴수록 마음의 허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 이게 인간 자기다.
믿는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하늘의 창고이니 이런 후회감이 오기 전에 가는 곳곳마다에서 ‘이 사람에게는 이게 필요하구나’ 하는 걸 알아서 영적인 면의 필요를 채워줘야 한다. 물질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물질을 퍼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내가 아무리 퍼주더라도 하나님께서 계속 채워주신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가 가치판단 평가적으로, 인격과 성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있느냐?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실상적인 것을 가지고 있느냐? 현상세계의 것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언젠가는 다 없어진다. 또한 현상세계에서 아무리 지식이 많고, 세상이 다 알아주는 철학자요,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것도 시간과 함께 다 날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안 날아간다.
하나님의 것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는 ‘네가 죽어도 살겠고’ 이게 들어간다. 네가 살아 있을 때 네 속에 영원히 가는 것으로 채워 넣었으니 ‘네가 죽어도 살겠고’ 이게 들어가는 거다. 이게 거짓말로 들리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 동안 이 땅에 사시면서 인간의 표현으로 당신 속에 안 죽을 것으로만 채워 넣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렸지만 ‘죽어도 살겠고’가 되었다. 이것을 단순히 육신이 부활한 것만 보면 안 된다. 역사만 아는 것은 껍데기만 아는 거다. 껍데기 속에 든 알맹이를 알아야 그 알맹이를 잡을 수 있다.
믿는 자기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있다면 가지고 있는 그것은 천국에서까지 효력을 낼 수 있는 자기의 실상이다. 자기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것을 가진 것이라서 주님의 사랑의 대상자다. ‘내 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네가 가졌구나. 그러니 너도 나의 아들이다’ 이렇게 된다.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독생자에게는 금덩어리가 충만하더라’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자의 영광이요, 사랑이요, 그래서 신령계와 물질계를 다 가지셨다. 실력이 있는 자가 다 가지는 거다. 비유를 든다면 강도의 두목이 가만히 앉아서 명령만 하면 부하들이 사람들에게 빼앗은 것을 전부 가지고 오고, 가지고 오는 것은 다 자기 것이 되는데, 이걸 깨닫는 면으로 좋게 말을 하면 이것도 실력이다. 이런 자는 감옥에 가서도 왕 노릇을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과 권세를 가지셨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는 이질인 세상에 속한 것에 소원 목적을 가진 자가 많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의 것으로만 가지면, 즉 인격적 성품적 능력적 주권적으로 실상적인 주님의 것을 충만히 가지고 있으면 입만 열면 하늘의 것으로 나온다. 세상의 물질은 성도를 위해 만든 것이라서 당신이 알아서 성도를 위해 주기도 하고 빼앗아 가기도 하신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귀 영광자가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누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네 영광을 삼아야 하겠느냐? 주님의 거다. 주님은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천국에서 오셨다. 당신의 것을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고 그대로 천국에 가지고 가봐야 소용이 없다. 주님은 당신의 것을 이 땅의 당신의 신실한 종을 통해 주신다. 그러니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주님의 종들을 통해 주님의 것을 많이 받아가져라. 주님의 것이 너의 인격화 되고, 성품화 되고, 실상화로 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뭘 안 맡기시겠느냐? 그러니 주님을 위해 자꾸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주신다고 할 때 순종만 해 봐라.
하나님의 본질의 것은 썩지 않고, 불타지 않고, 변질되지 않고, 진동되지 않고, 바람에 날려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영능의 실력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우리들에게 주시겠다는 거고, 또한 신령세계 천국에 우리가 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날마다 새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우리들에게 다 주겠다는 거다.
그리고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본질의 것으로 충만하면 자기 마음의 창고에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능력성이 가득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만나면 그에 맞는 도덕성이 나가고, 어른을 만나면 그에 맞는 도덕성이 나가게 된다.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같이 있겠다’ 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란 예수님의 본질의 인격을 가진 것을 말한다. 이걸 가지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모였어도 진리본질로 모인 곳이 아니면 그곳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 참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 독생자의 영광밖에 없다. 우리가 진리본질의 사람이 되는 게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는 거다. 그래서 성경에 독생자를 자랑하는 거다.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안 줄 것 같으면 뭐 하려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겠느냐?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세례요한보다 6개월 뒤에 오셨는데 세례요한의 말은 ‘이 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다’ 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보다 먼저 어디에 계셨던 거냐? 신령천국에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셨다.
세례요한이 누구를 증거하느냐? 그 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면 누구의 말을 해야 옳은 거냐? 보낸 분을 말을 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아들이 가서 말을 할 때 소리는 제 말이지만 그 말의 내용은 아버지의 뜻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이 말씀은 인간 나이에 관한 말도 아니고, 나보다 나이는 젊지만 아는 것이 나보다 앞선다는 말도 아니라 인간 내가 생겨나기 전에 그 분은 그리스도로서 먼저 계셨다는 말이다. 세례요한의 이 증거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세례요한의 증거가 참 증거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실한 종은 모든 인류의 근원자이신 선재적 그리스도를 말하게 된다. 예수를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분은 세상을 만들기 전, 영원 전서부터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는 교훈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 증거를 들은 사람은 예수님이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지막 시대에는 넓은 길, 사망 길,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많다고 했는데, 만일 내 앞에서 설교를 듣던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설교를 듣고서 ‘아, 우리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엉터리였구나’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세례요한이 주님보다 먼저 와서 세상적으로 가르친다면 세례요한으로부터 교훈을 받은 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다면 ‘세례요한은 순 가짜로구나’ 라고 하게 될 것이니 세례요한의 정체가 들통이 나게 된다.
마지막 시대에는 교회 안에 워낙 거짓이 많기 때문에 교인들은 활동의 방법에 신경을 쓸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적중성의 교훈인지를 봐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열심이 문제가 아니라 적중성이다. 예수 믿는 나의 생각이 질적으로 주님께 적중이 되지 않으면 이룰구원은 허탕이다.
믿는 우리는 진리이치를 깨달아야 자타의 구원에 활용성이 많게 되는 거지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 되자’ 라고 하는 것은 활용성도 없고, 신앙의 이치도 없고, 사람이 못 쓰게 된다. 예수를 이렇게 믿으면 정신 사상에 허점이 많아서 사단 마귀가 얼마든지 파고 들어온다. 이게 믿는 자기의 흠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못 다스리고, 남과 바른 관계도 안 되고, 전도도 안 되고, 신앙도 성장이 안 된다. 사람이 허황되다.
나중에 또 나오겠지만 이름이 ‘세례요한’이 아니라 세례요한이 한 일이 ‘세례요한’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세례요한이 한 일은 세례요한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따라 한 것이니 말하자면 그 사상이 세례요한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세례요한의 그 사상을 만난 자는 그 다음에 하늘의 통치, 진리통치를 받는 사상이 그대로 들어온다. 역사적으로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왔는데,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을 먼저 보낸 것은 성경에 ‘사자를 앞서 보내노니 내 길을 닦고 예비한다’ 라고 했으니 세례요한의 사상을 받아들이면 이 사람은 주님이 오시면 오신 주님을 대립이 없이 맞아들일 수 있게 되는 거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는데,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 산 이유는 하나님 한 분으로만 살았다는 거다. 오늘날 교회도 영적으로 보면 광야생활을 하는 거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진리말씀으로 훈련을 받지 못하면 언제 신앙 믿음이 영능의 실력적으로 자라겠느냐?
초림 예수님 앞에 세례요한이 먼저 왔듯이 마지막 시대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보혜사 성령을 가진 신실한 종을 먼저 보내신다. 교훈을 하는 자가 ‘나를 따르라. 내가 구세주다’ 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는 거고,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 되라’고 하는 것은 거짓 종이고, 이 거짓 종은 이단과 통한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한다면 이 분은 주님의 신실한 종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한 마디로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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