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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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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모친이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히실 때 모친에게 사랑하는 제자를 지목하며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라고 했는데, 모친에게 ‘여자여’ 라고 한 게 모친을 무시한 말이냐, 아니면 존칭이냐? ‘어머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할 수도 있는 건데 왜 ‘여자여’ 라고 했을까? 예수님이 모친을 무식해서 그런 거냐, 아니면 그때는 사회 통념상 모친을 ‘여자’라고 부른 거냐? 이것을 글자적으로만 해석하면 다 틀려진다. 같은 말이라고 해도 말의 억양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듯이 예수님께서 ‘여자여’ 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친이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한 것은 ‘예수 너는 만능의 능력자니까 이걸 해결해 봐라’ 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포도주를 먹고 좋아진 기분을 연속시켜 달라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에 대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육신과 세상의 행복을 위한 일을 하러 온 분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까 이런 사상은 예수님께서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고 안 믿는 사람 취급을 해버린다는 거다. 목사고 성도고 간에 일반적인 이해타산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 취급을 해 버린다는 거다.
주님께서 같은 말이요 같은 용어를 썼다고 해도 말의 억양이 따라 ‘주님이 어떤 마음으로 말씀하시는구나’ 하는 게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눈치챌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도 때에 따라 적절한 표현이 되어야 사람의 마음을 끌 수 있다. 그래서 자기가 말버릇이 나쁘면 고쳐야 한다. 말버릇은 사람의 성격에서 나온다. 사람의 마음의 질이 더러우면 더러운 말이 나온다.
성격이 급하면 참을 줄 모르고 말을 함부로 내뱉는다. 공이 부드러워야 누구나 가지고 놀 수 있지 딱딱하면 누구나 가지고 놀지 못한다. 사람의 성격도 모가 나면 사람이 붙지 않는다. 이러면 자타의 연관구원 면에 덕이 안 된다. 그러니 안 좋은 성격은 고쳐라. 성도는 질적인 면에서 거룩한 신앙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사람과 깨끗하고 정결한 관계가 된다.
‘이방인들이 너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은 연관구원 면에서 일반적인 도덕성이 아닌 속성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인관계를 가지라는 거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반적인 도덕성을 초월해야 한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일반적인 차원도 안 된다면 어떻게 이성과 몸이 성화가 되겠느냐?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사람은 남을 말하기 전에 자기부터 본다. 남부터 보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들어간 거다. 도둑이 자식에게 ‘착하게 살아라’ 하면 그 말이 먹히겠느냐? 믿는 사람은 먼저 자기부터 옳은 진리이치로 일어나야 한다. 안 좋은 것에서, 죽은 것에서, 변질되는 것에서, 썩은 것에서 먼저 일어나야 먼저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야 하고, 세상의 소원 목적에서 천국으로 향해 일어나야 한다. 땅에 그대로 있으면 잠자는 사람이다. 잠이 덜 깼다. 그러니 구별 분별이 안 된다.
귀 밝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척’ 하고 알아듣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에는 캄캄하고 남의 일에는 어찌 그리 빠른지?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느냐? 이런 걸 다 바꿔야 한다. 안 그러면 재앙이 자기 머리 위로 찾아간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려고 ‘이놈을 남이 다 보는 데서 어떻게 부끄럽게 할까?’ 라고 하신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간기준의 칭찬을 듣고 이게 기분이 좋아서 이걸 기준으로 살면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칭찬받는 사람은 남들이 다 알아주기 때문에 고치기가 더 힘들 수도 있다. 예수 믿는 사람 속에 이런 요소가 많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은 이런 것을 알게 한다.
예수 믿는 것은 ‘헛 살고 가느냐, 내 영광을 만들어 가느냐?’ 이게 들어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믿으며 사는 것은 죽은 것과 산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가는 거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내 언행심사만 기록되는 게 아니라 구원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까지 다 기록이 된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을 쳐다만 보고 말씀을 자기 자체화 시키지 않으면 소용없다. 자체화 시켜야 신적인 지혜도 나오고 신적인 기능과 지능도 나온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모셔왔고,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두 분을 똑같이 주님이 보내신 사자로 취급을 하고 비슷하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 요셉이 아버지를 인도해서 자기가 있는 곳으로 맞아들인 것과,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빨리 영접하도록 길을 닦는 회개의 세례의 의미가 같은 거냐, 다른 거냐? 다르다.
사람의 마음이 때로는 넓어졌다가 때로는 송곳처럼 나갈 때도 있는 거다. 육의 개념으로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마음이 넓지 못해서 말마다 꼬챙이처럼 나가면 어떻게 될까? 사람을 교육할 때 그 방법이 늘 두들겨 패는 말만 하면 교육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될까? 남을 때리기를 좋아하면 그 자녀도 자라서 남 때리기를 좋아할 거다. 자식을 낳아놓고 그 자식을 때릴 거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학생들이나 청년들의 문제가 많은데, 사람의 성격과 성질에 따라 부드럽게 말해야 할 사람이 있고, 강하게 말해야 할 사람이 있고, 큰 소리로 말해야 할 사람이 있고, 소곤소곤 말해야 할 사람이 있다. 잠:에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라고 했다. 성경에서 이런 마음을, 주님의 마음을, 인격과 성품을 배우는 거다. 세상에는 이런 게 없다. 일반학식을 많이 아는 것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은 다른 거다. 하나님을 많이 알면 사람을 알게 된다. 세상공부는 아무리 많이 해도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그래서 심판이 있는 거다.
용어가 같다고 해서 뜻이 같은 게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같은 용어라고 해서 똑같이 해석하면 안 된다. 용어의 앞뒤를 보고 해석을 하면 뜻이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그 장면에서는 그 용어라야 계시를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래서 같은 모친이지만 ‘여자여’ 라고 할 때도 있고, ‘어머니여’ 라고 할 때도 있고, ‘마리아여’ 라고 할 때도 있는 거다. 사람이 사람을 부를 때 말로, 아니면 옆에 바싹 가서, 또는 사람을 직접 접촉해서, 또는 전화로, 또는 직접 찾아가서 부르는 게 있다.
◆ 요:에 제자들에게 ‘이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 표적이 많이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성경에 기록이 안 된 표적도 많이 있다는 거다. 표적은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의 역사가 거쳐 간 흔적들이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표적도 많다고 한 말씀이 어디에 표적을 남겨놨다는 거냐? 하나님의 역사가 지나간 표적이 어디에 남아있으면 제일 좋을까? 자기 몸 밖일까, 몸 안일까?
예수를 믿다 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 되어 지나가셨구나. 주님이 오셨다가 흔적을 남기고 가셨구나’ 하는 있는 거다. 예수를 바로 믿다 보면 병원에도 안 갔는데 언제부터인가 자기의 병이 서서히 나을 수도 있고, 상대가 나를 볼 때 깜짝 놀랄 정도로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킨 흔적을 남길 수도 있다. 이런 게 다 주님이 남기신 표적이다. 이런 흔적을 깨닫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이 되지만 못 깨닫는 사람은 자기에게 되어진 주님의 역사를 모르니 그만큼 성장이 늦다. 이런 것은 일일이 성경에 기록이 되지 않는 거고, 받는 자밖에는 모른다.
자기에게도 주님이 구원적으로 표적을 남기고 간 게 있다. 성격 성질이 고쳐졌다든지, 구원이 아닌 것이 나에게서 떠났다든지, 마음이 고쳐졌다든지 하는 게 주님의 표적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되어진 주님의 이런 역사를 생각한다면 남을 말할 새가 어디 있느냐? 남이 나의 말을 할 때는 내가 듣기 싫어도 내버려 둬라. 나에게 고칠 게 있으면 고쳐야지 ‘누가 그러더냐? 증거를 대라’ 라고 하면 사단 마귀 짓이 나오게 된다. 세상은 시험이 많은 곳이니 덕스럽지 못한 말은 하지 말아라.
우리가 성경을 많이 깨달아야 많이 만들어진다. 이러면 나를 더 잘 만들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사건 환경을 가져와서 ‘이것도 써봐라. 저것도 써봐라’ 하기도 하고, 세상 것을 가지고 오기도 하고 빼앗아 가기도 한다.
자기가 좋아서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파도 잘 참는데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게 되면 배가 고픈 것은 똑같은데 더 배가 고프다. 똑같이 배가 고픈 건데 마음이 다른 거다. 우리의 이룰구원도 자기 스스로 이룰구원에 대한 애탐이 강하면 그만큼 더 이룰구원에 매진하게 된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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