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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2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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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22절-24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14절: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주님께서 주시는 물은 생명수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다.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그 속에서’란 ‘사람 속에서, 또는 성경 속에서’ 이 말이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몸 밖에 있는 물질의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마귀의 말이다.
15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기’란 야곱이 준 우물을 말한다. 이 여자는 지금까지 조상 야곱이 준 우물을 계속 퍼먹고 있었는데 이제는 다시 목이 마르지 않고 다시 물을 푸러 오지 않도록 해 달라는 거다. 그러니까 주님은 영적인 뜻으로 말씀을 하시는 건데 이 여자는 물질적인 뜻으로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한 거다.
그런데 이 여자의 말을 108도로 돌려서 영의 눈을 가지고 영적인 이치로 보면 여자의 이 말 속에는 신령한 뜻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여자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을 영적으로 돌려서 보면 ‘야곱과 같은 물질축복 중심으로 믿는 그 물을 먹지 않게 해 주옵소서’ 라는 말이니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찾아오신 목적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 여자를 영의 눈으로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왜냐? 남편을 갈아치울망정 참을 찾겠다고 자꾸 물을 길으러 왔으니까. 주님께서 여자의 이 마음을 아시고 생명수를 주려고 찾아오셔서 구원해 내는 거다.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가 자기의 평소 신앙의 심성이 어떻게 작용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건을 잡고 찾아오시기도 하고, 사람을 잡고 찾아오시기도 하는 등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찾아오신다. 모든 만물은 지금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주님이 만들어 놓은 법칙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만물을 들어서 성도의 구원을 위해 얼마든지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
야곱의 신앙, 즉 물질중복 중심의 신앙에는 생수가 없다. 자기 속에 생수가 흐르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늘 시원하다. 다른 말로는 편안하고 기쁘고 즐겁다. 주님의 역사는 사람 속에서 되어지는 것이니 내 속에 들어 있는 게 나의 신앙을 증거한다. 자기의 지혜지식이나 모든 관계성은 자기 마음 속에서 나는 것이니 내 속에 세상성이 들어 있으면 늘 마음이 찔리고 고통스럽다. 이러면 얼마나 불행하냐? 자기가 사랑받을 짓은 자기가 하는 거다.
16절-17절: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니까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했다. 남편 다섯을 갈아치우고 지금은 한 명이 있는데도 없다고 했으니 말 그대로 들으면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거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여자의 말이 맞는 거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한 것은 참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다.
18절-19절: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주님께서 여자의 말에 ‘네 말이 참되도다’ 라고 하셨듯이 주님이 오늘날 나의 양심을 보시고, 내 마음을 보시고 나의 신앙을 알아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내가 주님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할 때 ‘거짓말하지 말아라. 너는 남편이 여럿이 있다’ 라고 하실 수도 있는 거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여기서 여자가 주님을 선지자로 알아보았다.
20절-22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이제 예배문제가 나오는데, 여자의 말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라고 하니까 주님의 말씀인즉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라고 하셨다. 그러면 어디가 예배장소라는 거냐? 이 말은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예배의 질을 말하는 거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너희들이 나를 만나고 싶으냐? 그러면 여기서 만나자’ 라고 하셨다. 그 때로 보면 장소를 말씀하신 거지만 이 말씀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계시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신앙의 질을 말하는 거다. 즉 성전은 인간의 설계가 아닌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어졌고,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된 그 신앙 안에서, 그 말씀 안에서, 그 이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다.
우리가 이런 신앙정신과 사상을 알지 못해서 이방신당이나 우상을 섬기는 정신으로 하나님을 믿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오지는 않았는지? 이런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게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오로지 진리이치가 나오는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한 이치라도 깨달을 수 있고, 세상에 없는 하늘의 이치의 깨달을 수 있고, 깨달은 것을 세상에서 써먹으면서 정복을 할 수 있는 거다.
세상의 것은 전부가 임시적이요, 땅 아래의 거다. 이것을 정복하고 뛰어넘고 능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지식성을, 도덕성을, 능력성을 가진다면 공의의 사람이 되고 깨닫고 성장하고 자라게 된다. 생각을 해 봐라. 자기가 이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해주겠느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니 너를 통해서 나의 뜻을 나타내리라’ 이렇게 되는 거다. 그리고 모든 만물도 이런 나를 높여준다. 이런 게 있기 때문에 믿는 우리가 이룰구원의 신앙사상을 놓고 씨름을 하는 거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서 존귀함을 받아야지 짓밟힘을 받는다면 어디를 간들 사람노릇이 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가시나무에게나, 사람에게나 햇빛을 비취듯이 세상 어디에도 은혜를 베푸시지만 자기 속에 하나님의 것이 풍부하게 들어 있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특수은혜 가운데 살게 된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유대인이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의 말이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는 거다. 말씀이 없으면 이 약속이 없다.
본 설교.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헛 믿는 거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른 채 드리는 예배, 인간 나그네로서 제세기간 동안에 무엇을 하고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는 다 헛 거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충성봉사를 하고 전도를 해도 헛 거다. 이런 사람은 깨달음이 없다. 속에서 생수가 나오지 않는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 몸 밖의 것을 자꾸 끌어들이고 키우려고 하는 것은 생수가 아니다. 이건 타락된 종교인들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모르고 예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뭘 안다는 거냐?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그러니까 구원이 어디서부터 나는지를 알고 예배를 한다는 거다. 주님께서 여자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배가 뭔지 모르면서 하는 예배가 있고, 알고 하는 예배가 있다는 거다. 그러면 우리는 뭘 알고 예배를 하고 있느냐, 모르고 예배를 하고 있느냐? 깨닫고 알아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예배를 하느냐, 그냥 듣고만 있는 거냐? 그냥 듣고만 있는 사람은 성경도 안 볼 거다. 반대로 듣고 깨닫고 알아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성경을 볼 거다.
세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예배를 드린다면 이는 헛 예배다. 사마리아 여자와 같다. 이런 사람의 예배의 목적은 세상 것을 많이 가지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당신을 가지라는 건데 이게 아닌 불타고 썩고 진동되고 없어질 거, 가견적인 거, 현상적인 거, 그림자 같은 것을 가지려고 한다면 이것은 헛 예배요 신앙이 아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유대라는 국호는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유다지파의 세력에서 자연스레 나온 이름이다. 남북으로 갈라질 때 남조 유다에는 두 지파가 갔고, 북조 이스라엘에는 열 지파가 갔다. 그런데 유다 지파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다. 이걸 지금으로 가지고 와서 보면 가령 교회 안에 분열이 생겨서 교인들이 갈라질 때 ‘성전이 어느 쪽에 있느냐? 즉 진리가 어느 쪽에 있느냐? 하나님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고 그 쪽으로 움직여야지 물주가 많고 권세가 큰 쪽으로 가면 안 된다.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맏아들인 르우벤이 아닌 넷째 아들인 유다로부터 왕이 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그 전에 애굽에 팔려간 요셉의 사건 때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이 때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자기 자식을 죽이라고 했다. 이게 아버지에게 할 말이냐? 그러나 유다는 아버지 야곱을 잘 설득하여 애굽으로 모시고 가서 요셉을 만나게 함으로써 한이 맺힌 아버지의 슬픔을 풀어드린 일이 있다. 아버지 야곱이 이런 성품을 가진 유다의 후손으로부터 왕이 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우리는 유다의 이 성품을 가져야 한다.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있었는데, 차남인 에브라임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지적하실 때 되돌아보고 고치고 했으니 마음이 풍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야곱이 눈이 어두워도 이미 에브라임의 성품을 알았기 때문에 양손을 어긋 맞겨서 에브라임에게 미래의 축복을 예언했다. 에브라임은 차남이면서도 장자가 가질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걸 보시고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신 거다.
장자란 일반적으로 육적 혈통적으로 큰 아들을 말하는 거지만 이건 가견적인 비유이고, 신앙적으로는 유다나 에브라임을 통해 그 마음 씀씀이나 신앙의 심성이 장자와 같은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목사의 입장에서 교인들도 보면 ‘아, 이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마음이구나’ 하는 게 보인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유다지파에서, 그리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왔다. 이걸 보면 신앙에는 라인이 있고, 이 라인 속에 실질적으로 메시아로서 길림을 받을 수 있는 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들레헴’의 뜻이 ‘떡집’인데, 이것을 영적으로 새김질을 해 보면 의미가 크다. 즉 말씀의 떡이 있는 곳에서 홀이 나온다는 거다. 지도자가 나온다는 거다. 맨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며 예언 방언을 하고 펄펄 뛰는 곳에서 지도자가 나오는 게 아니다.
유다로부터 메시아가 나왔고,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고, 이 율법대로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인도와 보호와 축복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는 영적 신앙사상이 어디로 흐르고 있느냐? 구원이 약속된 천국복음의 사상이 어디로 흐르고 있느냐? 아무 교회나 나가지 말고, 인정정실로 흐르지 말고 어디에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흐르고 있는지를 보고 그런 교회로 나가라.
자기가 수 년, 수십 년을 예수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가 없는 예배,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나왔다면 지금까지 모든 이단과 거짓과 사단 마귀의 짓을 하며 산 게 아니겠느냐? 예수 믿으면서 지금까지 야곱의 우물을 퍼먹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진리이치를 하나도 못 깨닫고 죽은 목사와 교인이 얼마나 많을까?
마귀는 세상 것을 자랑하고 구하라고 하고, 세상에게 절을 하라고 한다. 절을 하라는 것은 세상을 돋보고 따라가라고 하는 걸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디서든 입만 여시면 천국복음을 전하시더라. 하늘나라를 말씀하시더라. 주님께서는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니 하는 말마다 천국의 이치요, 영적 이치요, 영원히 가는 이치가 나온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자들이 무엇을 알고 예배를 하느냐? 예배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예배를 하느냐, 알지 못하고 예배를 하느냐?
이방인들은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살고,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세상 소원 목적으로 섬기고, 이방 종교인들도 세상 소원 목적으로 믿고,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도 세상 소원 목적으로 믿는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이방인이나, 귀신을 섬기는 사람이나, 이방종교인과 무엇이 다른 거냐? 이런 정신으로 예수를 믿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른 것을 바로 알지 못한 채 예수를 믿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니 헛 믿고 헛 예배를 드리는 거다.
23절-24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한다. 나보고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성경에는 하나님이신 영만이 아니라 ‘아들의 영, 양자의 영’이라는 말도 있는데, ‘아들의 영’이란 하나님과 질적으로 다른 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100% 하나님과 같은 온전이요 완전이다. ‘양자의 영’이란 구원 얻은 성도의 영을 말하는데, 이 영은 하나님의 본질인 아들의 영과 질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육신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양육을 받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아들처럼 양육이 된다는 면에서 ‘양자의 영’이라고 하는 거다.
아들의 영이 하나님의 본질에 100% 온전 완전이라면 양자의 영은 아들의 영과 같은 질로서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길림을 받게 되는데, 믿는 자기가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말씀을 따라 살면 이 영이 성장을 하는데, 영능이 성장된 실력만큼 실상세계에서 그 나라를 누리고 다스리고 쾌락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실력에 따라 세상을 누리고 다스리는 활동범위가 넓어지듯이 믿는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자기의 영능의 실력이 성장된 것만큼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되는 거다.
롬: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라‘ 라고 했는데,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말라는 것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따로 있고, 즐거워하는 종의 영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믿는 우리는 천국의 유업을 받을 자이니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고 담대히 양육을 잘 받으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영능의 실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학생이 공부를 못하면 선생님을 보면 무섭고 싫지만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선생님이 안 무서운 것과 같은 거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신령한 것은 물질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에 속하는 것도 아닌 인격과 성품에 속하는 거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거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신령한 분이요, 만능의 능력자요, 창조자요,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신 분인데 이 분이 우리를 당신처럼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길 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보내주셨고, 또한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된 살아서 역사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당신을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영능의 실력자로 만드는 신령한 역사를 하고 계시니 인격적으로 주님의 이 정신, 이 사상, 이 성품이 담겨져서 드리는 게 신령한 예배요, 신령한 사람이다.
‘진정의 예배’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받으면서 세상 것에 소원과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영적인 신앙사상과 정신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봉사를 하면서 진리진실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소원하며 드리는 게 진정의 예배다. 성품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져서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이 사는 게 진정한 사람이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런 예배자를 찾으신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을 구하는 사람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라는 말씀을 해석을 할 텐데 뭐라고 해석을 하겠느냐? ‘신령’은 맨날 금식기도나 하고 굴속에 처박혀서 기도하는 거라고 할 거고, ‘진정’은 자기 양심에서 하나님 앞에 최대한으로 뭘 하는 거라고 할 거다. 그러나 이런 건 종교성일 뿐이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기가 치성을 드릴 때 부정탈까봐 추운 겨울에 찬물로 목욕을 하기도 하고, 자식을 낳으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새 옷을 입고 십 리 이십 리 길을 걸어가서 큰 바위 앞에서 빌기도 하는데, 이런 걸 신령과 진정이라고 한다. 그러면 인간이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귀신이 들어줄 것 같으냐? 성경은 이걸 말하는 게 아니라.
23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사람이 이방인들처럼 세상 것을 요구하고 세상을 자랑하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자는 찾지 않으신다는 거고, 이런 예배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거다. 이건 가인의 예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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