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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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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1절-26절. (14. 10. 26. 일전)
지난 설교 보충.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인간에게는 신령성이 없다. 이방 종교인들이 귀신이 들려서 영험하다느니 신령세계를 갖다 왔다느니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이런 것들은 신령한 게 아니고 우리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이 인격과 성품적으로 하나님처럼 만들어지는 게 신령성의 존재가 되는 거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이 면을 두고 세상 모든 것이 조화롭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 안에는 먹이사슬도 들어 있고, 우주의 천체의 법칙도 들어 있다. 인간은 이런 가운데 살면서 무엇을 하던 말씀을 기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신령세계를 누리게 하려는 것인데, 믿는 사람이 진리말씀을 붙잡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려는 노력에 따라 각자가 차등적으로 성장을 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개인적인 체험을 성경처럼 여기면서 자기의 체험을 성령님의 역사라고 하며 자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령님의 역사는 그런 게 아니다. 성령님께서는 믿는 사람 속에서 말씀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줘서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 그리고 도덕성이 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로 만들어가는 일을 하신다. 그리고 만물도 성도들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일에 쓰여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따라서 믿는 우리가 신앙의 목적을 이 면에 두지 않는다면 헛 믿는 거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할 때의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이고, 이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예수=구원’이니 한 마디로 예수님 속에는 그리스도가 원료뭉치로 들어 있는 거고, 예수님의 모든 언행심사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게 들어 있기 때문에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으면 우리에게 이룰구원이 되는 거고, 이룰구원이 된 것은 신령성에 속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성품화 되면 이 사람의 모든 언행심사, 가치판단, 평가성, 활동성 등 모든 게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늘의 것으로 되어진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을 외우고 율법의 문자대로 하는 것을 신앙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은 문자적으로 행하는 게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의 사람으로, 즉 주님처럼 만들어지는 게 신앙이라고 하는 거다.
오늘날 보면 인격과 성품적으로 주님처럼 만들어지는 것은 모른 채 예수님의 만능의 능력을 받아서 세상을 가지려는 목적으로 믿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냥 예수라는 사람만 따르는 게 아니라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몸까지 의의 병기로 쓰여지면서 점점 예수 그리스도로 인격화 성품화 되는 거다. 이렇게 되는 게 신령화로 되는 건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다.
그러면 ‘진정’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주님의 말씀, 즉 영생수를 먹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격화 되면 신령한 사람이 되는데, 이렇게 된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언행심사는 ‘진정’이 된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성품을 입는 게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는 거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님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는 것을 무당이나 점쟁이가 귀신을 받는 식으로 생각을 하는 기독자들이 많다. 교회 안에서 펄펄 뛰고 감정과 흥분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이 아닌 잡신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주님처럼 인격의 사람으로, 신의 사람으로 성품화 되길 원하신다.
성경에 보면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라고 했다. 귀신들린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 줄 잘 안다. 오늘날 교인들도 예수님이 누구인 줄을 역사적으로 잘 알면서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향해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 것처럼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기도를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로 표현을 하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는 사상이 되는 거다. 우리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은밀한 뜻을 봐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감정과 흥분이 아니라 이치적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사람을 볼 때도 상대의 모든 언행심사를 이치적으로 봐야 하는데, 하나님의 본질의 기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이치적으로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면 판단 구별이 안 된다. 하나님을 연구하면 예수가 보이고, 예수가 보이면 나를 인간으로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보인다. 이것을 알고 주님을 보면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고, 모든 사물이 보면 성도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는 사물의 이치가 보인다.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하는 성인들이 좋은 말을 많이 했는데, 말씀의 이치를 가지고 보면 이런 것에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인격화 되는 바탕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성경을 통해 이 그리스도를 배우면 그리스도로 성품화 된다. 일반세상에는 이게 없다. 하나님이 없다. 말씀이 없다. 그래서 일반세상이나 기독교 종교적으로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여기에는 사람이 변화되는 게 없다. ‘기독교 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들고 하는 말이라도 해도 그 근원이 영적이 아니라 세상성으로 나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영적이다.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영성과는 다른 거다. ‘영적’ 하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성품화 되는 것을 말하는 거고, ‘영성’은 신기한 것을 보고 듣고 하는 신비적 개념이다. 우리는 신비적인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성품이 자기 인격화로 되는 거다. 자기 인격화로 된 하나님의 신비성은 모든 것을 판단 구별케 하고, 자기 속을 죽음 저 너머 세계에서도 변치 않는 것으로 이뤄간다. 이게 신의 사람이다. 성경을 통해서만이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다.
세상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갉고 닦는 과정이 있다. 바닷가의 돌 같으면 파도에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모가 난 부분이 깎이는 과정을 거쳐서 보기 좋은 몽돌이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이치를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는 목사님들이 영적인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 이것을 발견을 못하고 목회를 하게 되면 교인들에게 충성봉사만 강조하게 되니 교인들은 중노동이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우물가에서의 예배는 헌금도 없고, 식순도 없고, 찬양도 없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하신다. 그러면 여자의 입장에서는 이 예배를 통해 무엇이 해결이 되어 나왔느냐? 첫 번째는 ‘이 물을 나에게 주어서, 신령한 생수를 나에게 주어서 여기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해 주옵소서’ 라고 했는데, 신령한 생수는 야곱의 물질신앙에서는 못 먹는다. 거기에는 영생수가 없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있는 곳에 영생수가 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서 이것이 해결이 되었다.
두 번째는 예배장소가 해결이 되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율법이 있으니 예배는 이것이 있는 곳에서 드려야 한다는 거다.
세 번째는 남편이 해결이 되었다. 즉 참 의지자를 찾았다. 인간의 바른 의지성을 말해주기 위해 남편을 들어서 말씀을 하시는 거다. 그래서 여자가 다섯 남편이 있었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했지만 이 말을 영적으로 돌려서 들으면 이 여자에게 참 의지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 말을 인정해 주셨다. 그러니까 야곱의 물질적 신앙사상, 즉 하나님 덕으로 세상에서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 정신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거다. 참 의지자가 없다는 거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점점 좁혀지면서 여자가 예수님을 딱 만난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여자는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들고 있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세상의 소원 목적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고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이게 바로 예배다. 그러니까 예배는 시간 땜이 아니고, 헌금을 내는 게 아니고 예수의 사람으로 바뀌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이렇게 된 사람을, 즉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러면 세상적 종교적으로 돌아가는 세상 속화된 기독자들은 ‘신령과 진정’을 뭐라고 해석을 할까? 힘쓰고 애쓰고 공 드리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찾느냐? 말씀을 깨달아서 말씀이 자기 인격화 되고 사람이 바로 안착이 되는 게 신령과 진정의 예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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