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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요한복음 궁극이............... 조회 수 67 추천 수 0 2023.03.05 19:03:41
.........
성경본문 : 요4:40-42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440-42: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지난 설교 보충.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제자들이 넉 달이 지나야 추수를 한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장 추수를 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보는 눈과 주님이 보시는 눈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이 보는 눈은 육의 눈이요, 가견적인 것만 보는 눈이요, 임시적이고 현상적인 것만 보는 눈이요, 금방 있다가 없어질 것만 보는 눈이다. 주님은 영의 눈이요, 절대 정확하게 보는 눈이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은 육의 추수를 하고, 주님은 영의 추수를 하신다.

 

예수 믿는 나는 영 주격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건지, 아니면 자기의 기존적인 육의 지식으로 세상을 보는 건지?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러도 물질적 가견적인 생각을 가지고 하는 거다.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을 보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를 때 예수님의 시각과 시감으로, 즉 영적 시각과 시감성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영을 주목적으로 임시적인 물질의 육체 속에 영원한 영을 넣어서 지으셨다. 만일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이 아닌 물질적인 분이라면 우리 인간을 이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지으셨을 거다. 우리 인간이 영과 육의 결합체로 지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물질세상에서 임시적으로 살지만 우리의 영은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육신을 벗고 신령세계에 가서 영원히 살도록 지으셨다. 지상세계에 영과 육으로 결합된 존재는 인간 외에는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을 주목적으로 지으셨으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영을 주격으로 살아야 하는 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영 주격이 아닌 육 주격으로 생각을 하고, 이해타산을 하고, 가치판단 평가를 하면서 산다면 이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떻겠느냐? 이런 정신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낼지라도 속사람은 깡그리 망하고, 썩고, 냄새가 나는 상태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하루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자기의 육신은 물론이고 자기의 세상적인 모든 소유도 날마다 잃어버려지는 거다. 나무를 보면 싹에서 나뭇잎으로, 낙엽으로, 조금 있으면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찬바람에 바들바들 떨게 된다. 이런 걸 볼 때 마음 속에서 뭔가가 재촉이 안 되느냐?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만사를 보고 자기 기분에 맞춰 사는 거지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 두고 생각을 해야 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마리아 여자가 진리로 전도해서 데리고 나오는 장면을 말하는 거다. 사마리아 여자가 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데리고 나온 게 하루 만에 된 일인데, ‘추수하게 되었도다라는 말씀은 전도를 듣고 나온 사람들이 하루 만에 신앙이 잘 여물어졌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사마리아 여자가 진리본질을 전했고, 듣는 사람들도 진리본질에 적중적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추수하게 되었도다라는 말씀을 지금의 우리들에게 적용을 해서 생각을 하면 오늘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전도요, 설교요, 씨를 뿌리는 건데, 씨를 뿌릴 때는 그 어떤 사건 환경 가운데서도 변질이 되지 않는 진리본질에 적중이 되는 생명의 씨앗을 뿌려서 성도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신앙이 잘 여물도록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신앙의 깊이가 얕고, 엷고, 진한 게 있는 것이니 어떤 신앙을 가져야 세상의 바람에 넘어가지 않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모든 존재와 사건과 환경이 이런 걸 생각을 하라고 지나가고 있는 거다. 세월은 자기의 건강도 앗아가고, 젊음도 앗아가고, 다 앗아가는데 믿는 사람이 이런 걸 생각하지 못하고 산다면 결국에는 겨울의 찬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들바들 떠는 것과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만물을 보면서 자기의 인생을 생각해야지 그러지 않고 세상을 따라 어깨춤을 추다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바닥도 없이 살다가, 기초도 없이 살다가 조그마한 사건을 만나면 그만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하는 인생으로 살게 된다.

 

추수하게 되었도다.’ 주님이 추수를 하실 때 추수를 당할 자가 누구냐?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이 추수 때에 주님이 우리를 보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 ‘3년을 두고 거름을 주며 돌봤는데 열매가 안 맺히니 잘라버려야 되겠다라고 하실 런지, ‘멀리서 볼 때는 좋은 열매가 열린 것 같아서 사람의 눈을 홀렸는데 막상 와서 보니 아무 열매도 없구나라고 하실 런지, 멀리서 보이듯이 열매가 참 잘 열렸구나라고 하실 런지, 나를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겠는지?

 

본 설교.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자의 인도로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했다. 흐뭇한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그들과 이틀을 유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과 같이 유하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오늘날 세상에서 돈 많이 버는 방법을 얘기해 준다면 이 사람을 더 머물라고 할 사람은 있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고 인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싶어서 이것을 알려주는 전도자를 찾아서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말씀을 듣고자 할 자가 있을까?

 

아합 왕 때 36개월 동안 흉년이 있었는데, 이 때 사렙다 과부가 자신의 마지막 음식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했고, 수넴여인은 엘리사를 공궤했는데, 우리가 사렙다 과부를 볼 때 상황적으로 크게 볼 게 있고, 또 그 사건 사이사이로 들어가서 좁게 보되 크게 보는 사상에서 틀어지지 않게 봐야 할 게 있다. 좁게 볼 때 크게 보는 사상을 놓치고 보다가는 그만 비뚤어진다.

 

우리가 사렙다 과부를 크게 보면 흉년의 때에 마지막으로 남은 식량을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선지자를 모시니, 진리를 모시니, 주님을 모시니, 복음을 모시니 흉년이 들지 않고 풍족했다. 그러나 과부의 집에 선지자가 들어갔으니 동네사람들이 좋게 말할 리가 없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네가 그런 소리를 들어도 선지자를 모실래?’ 라고 묻는 거다. 즉 우리들에게 네가 그 어떤 소리를 들어도 복음을 가지고 있을래? 돈이 와서 복음을 내버리라고 하고, 친한 사람이 와서 복음을 내버리라고 해도 복음을 가지고 있을래?’ 라고 묻는 거다.

 

성경에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이적이 나오는데, 우리가 이것을 그냥 예수님은 능력과 사랑이 많으셔서 이적 기사를 일으켜서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시는구나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렇게 하시는 예수님의 큰 그림이 그만 다른 그림으로 되어버린다. 즉 그 상황을 들고 말씀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의도성이 달라져 버리고 딴 소리를 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손에 들리기만 하면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 외에 5천 명과, 4천 명이 먹고도 남아서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를 거뒀다고 하는 것은 주님에게는 적다고 해서 적은 게 아니고 적더라도 많이 남을 수도 있고, 많아도 적게 남을 수도 있다는 건데, 문제는 왜 이런 이적을 행하시는 걸까? 이걸 아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오병이어에서는 열두 광주리가 남았고, 칠병이어에서는 일곱 광주리가 남았는데,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조금 더 좁혀서 들어가서 떡의 본질이 뭐냐? 곡식이 가루로 빻아져야 떡이 된다. 곡식 알갱이가 잘 빻아져야 물로 뭉칠 때 잘 뭉쳐지고,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도 있고, 기름에 튀길 수도 있는 것이니 믿는 우리도 곡식처럼 우리의 자아가 말씀에 잘 빻아져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종합해서 보면 처음에는 무엇이든 주님의 손이 들리기만 하라. 그러면 이적 기사가 나타난다. 즉 모자람이 없고, 원대로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대로 실컷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대 만족이라는 뜻이다. 주님의 손에 들리기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거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여기서 부분 부분을 좁혀서 보면 (전제가 잘못되면 좁혀서 말하는 게 잘못될 수 있다.) ‘곡식이 잘 빻아져야 떡이 되듯이 사람이 말씀에 잘 빻아지지 않고서, 즉 자기의 모든 주관성이 말씀으로 깨지지 않고서 주님의 손에 들려지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당신의 손에 붙들린 떡으로 무리들에게 대 만족을 주셨던 것처럼 지금의 나를 대 만족으로 만들어 주려고 하시는데 자기가 주님께 들림 받을 수 있게 살려고 하지는 않고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그게 제 마음대로 되겠느냐?

 

그리고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5천 명과 4천 명이 먹었다고 했으니까 남자들까지 포함하면 각각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의 떡이 남았는데, 이 숫자 안에는 장정들도 포함이 된 것이니 장정들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 쓸 수 힘이 넘치게 되었다는 거다. 이는 곧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으면 구원싸움을 힘 있게 할 수 있다는 거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놓고 오병이어 때는 떡이 왜 열두 광주리가 남았고, 칠병이어 때는 왜 일곱 광주리가 남았을까? 오병이어 때가 칠병이어 때보다 남은 떡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주님께서는 떡이 하나라고 해서 2만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떡을 못 만드시는 것도 아니고, 떡이 열 개가 있어도 모라자게 할 수도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주님의 주권을 놓고 보는 거다.

 

떡이 다섯 개이던 일곱 개이던 당신의 손에 들림이 되면 무엇인들 못하시겠느냐?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먹더라도 원대로 먹고도 남게 하실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주님의 이 이적은 당신에게는 창세 이후로 마지막 날까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먹고도 남을 수 있는 말씀의 떡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계:에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이 일곱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니 먹고 남은 떡이 일곱 광주리가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는 지상의 모든 교회가 다 먹고도 남는 말씀을 주신다는 거다.

 

영적 이스라엘은 열두 광주리의 떡을 먹을 수 있고 일곱 광주리의 떡을 먹을 수 있는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나도 이 떡을 먹을 수 있는 교회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을 구하는 교회는 여기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 천국에 못 간다는 게 아니라 이 라인 안에 들지 않는다. 질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본질에 적중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 궁극교인들은 진리말씀을 적중성으로 받고 주님으로부터 크게 들림을 받아서 오늘날 이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보석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이걸 원하신다. 이를 위해 자기 마음 속에 늘 주님을 모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게 아닌 세상을 구하면 응답도 없고, 이 사람은 망한다.

 

우리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하겠는데, 자기의 생각이 늘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운이 달아 있게 되어서 주님의 뜻을 빨리 알아차리고 그 뜻을 따라 살게 된다. 이게 주님의 응답이다. 세상사람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그 마음이 고향생각에 운이 달아오르게 되고, 이러면 명절이 되면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고생을 해도 기뻐하면서 고향으로 달려간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어도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고, 이런 사람이 둘 셋이 모이면 그 불이 달아올라야 한다. 숯 하나에만 불을 붙이면 슬슬 꺼진다. 그러나 하나의 숯에 불을 붙인 후 이 숯불 위에 여러 개의 숯을 얹으면 자기들끼리 불이 붙으면서 활활 타오른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신앙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성경은 각자 자기에게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성경에 사건을 들어서 보여주시는 것도 각자 나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 사건 속에서 나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 하나님을 믿느냐? 이 하나님을 안 믿을수록, 못 믿을수록 일반사람들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는다. 이건 뼈와 피부와 골각은 사람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정신 사상은 짐승처럼 자연적 본능으로 사는 거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틀을 유하면서 그들과 무엇을 하셨을까? 말씀을 전하고 듣고 했을 거다.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정조가 없는 개 같은 자들이라고 했으나 사마리아인들은 주님을 모시고 이틀 동안 말씀집회를 한 거다. 주님께서 집회를 하시는데 하늘나라의 말씀밖에 더 하시겠느냐?

 

그런데 이틀 후에 주님이 떠나시려고 할 때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며칠 더 계시면서 말씀을 더 많이 들려주십시오라고 한 사람이 있을까? 목사님이 어느 교인의 집에 심방을 간다고 하면 피하는 교인이 있는 것처럼 이틀 동안 주님을 피해 있던 사람은 없었을까? 목사님이 심방을 간다고 하면 피하는 사람이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오지 마십시오라고 할까? 우리교회는 심방이 없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잘 듣고 말씀을 잡고 믿음을 잘 키워나가면 된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예수님께서 이틀을 유하면서 말씀을 전하니 믿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적 기사로 인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말씀이 인격적으로 받아지고 영접이 되어서 주님을 믿는 게 바로 믿는 거다. 보고 믿는 건 믿는 게 아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라고 하셨는데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교인들과 율법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 질투하여 죽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전도를 받아들였고, 예수님을 모시고 말씀집회를 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우리의 믿음이 말씀으로 인해 되어야지 이적 기사나 신비로운 것을 보고 믿는 것은 믿는 게 아니고, 믿는다고 해도 이런 믿음은 자기의 요구대로 되지 않으면 변질이 되는 거짓된 믿음이다. 말씀으로 인해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현실에서 겪는 사건 환경 가운데서 깨달은 말씀을 자기 지식의 기준으로 삼고 배운 말씀을 써먹으면서 이겨나가게 되면 이것이 자기의 영능의 실력이 되는 것이니 이런 사람으로 되는 것을 말씀으로 인해 믿는다고 표현을 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진리지식을 기준으로 하고 모든 사물을 바라봐야지 안 믿는 사람들의 세상적 일반적인 지식을 기준으로 사물을 보면 믿음이 안 들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기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변명만 들어간다. 이건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만 있지 가 있을 수 없다.

 

교회 안의 거짓 종들은 세상성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들으나 마나다. 이방종교의 교훈도 세상성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들으나 마나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들으나 안 들으나 그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들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잠자는 자를 벌떡 일으킨다. 그러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들어야 할 말씀이다. 마지막 때의 부활을 현재로 가지고 와서 말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사람도 듣고 벌떡 일어나는 말씀이다.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설교도 하나의 전도인데, 설교를 들었으면 그 다음에 자기가 할 것은 성경으로 들어가서 그 설교가 성경대로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그 신앙이 힘이 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거니한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 확인을 해야 한다. 목사님의 설교가 진리본질로 적중적으로 들어가게 하는 건지, 전도를 많이 해서 교인 숫자를 불리려고 하는 건지 알아야 한다. 본문은 교인 숫자를 불리라는 말이 아니라 듣는 우리로 하여금 설교를 들었으면 말씀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하라는 거다. 이렇게 볼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믿음보다 더 좋은 것 같다.

 

우리가 믿는 게 병 고치는 이적 기사가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주장하는 게 무엇이며, 예수님의 교훈의 주제와 총 결산이 무엇인지, 죄에서 해방이 무엇인지, 출생된 인간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기까지 무엇을 하고 가야 하는 건지, 왜 믿는 사람에게 크고 작은 사건을 주는 건지를 알아야 한다.

 

믿는 우리가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자기의 출생과 존재목적을 알지 못하게 되고, 이런 상태로 살면 짐승과 같다. 밥 먹고 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들도 다 한다. 그런데 짐승들은 자신들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어서 먹이시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을 걱정을 안 하는데 하나님의 특수목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먹고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산다면 짐승만도 못한 게 아니겠느냐?

 

인간 자기를 만드신 목적이 뭔지, 나그네 길에서 잠시 살다가 가는 재세기간 동안의 목적이 뭔지를 성경대로 바로 깨달았느냐? 나는 죽음의 고개를 넘어갈 때까지 무엇을 이루고 가야 할런지? 학교에 들어가면 배움의 지식을 채워서 나오는데 하물며 예수 믿는 사람이 수 년, 수십 년 예수를 믿고도 하나님의 것으로 한 이치도 못 채운다면 말이 안 된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고 했는데, 문제는 어떤 말씀을 깨닫느냐가 중요하다. 오늘날 교인들이 무엇을 해 주는 교회로 많이 몰리느냐? 목사가 치유기도를 잘 해 주면 이 교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느냐? 병자들이 많이 몰린다. 목사가 치과의사라면 이 교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많이 몰려갈까? 치아에 병이 있는 사람들이 몰려간다. 어느 교회는 교인들의 공동묘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교회에는 젊은 사람이 많이 갈까, 늙은 사람이 많이 갈까? 오늘날 자기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그리고 이룰구원과 성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 건지? 물론 믿으면서 알아가야 하는 건데, 그러려면 목사님이 바로 가르쳐야 한다.

 

어느 누가 우리교회에 교인이 많다라고 할 때 이 말을 하는 자기도 거기에 묻혀서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는 따로 나와 있는 채로 이 말을 하는 건지? 자기도 그 숫자 안에 묻혀서 그 말을 하는 거다. 그런 것처럼 마지막 때에 전체 교회가 우주적으로 들림을 받게 되는데, 이 때 예수님으로 인해 구속을 받은 사람은 어디에 있던 들림을 받는 숫자 중에 들어 있기 때문에 같이 올라가게 되는 거지 자기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도 주님과 같이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 말을 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옳은 믿음을 가졌다. 이렇게 되려면 복음을 처음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참으로 중요하다. 사마리아 여자의 신앙의 질이 진리본질에 적중성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데,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신앙으로 된 거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고서 야곱의 축복 축복하는 세상성적인 신앙을 버렸다. 처음부터 본질의 복음을 받아야 진리본질의 신앙으로 들어설 수 있고, 약했던 믿음이 예수님 쪽으로 더 굳어지면서, 확신이 되면서,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는 분임을 안다는 거고, 또 세상의 죄를 지는 분임을 안다는 거고, 사람을 구원 얻게 하심을 안다는 거고, 우리에게 지각을 주셔서 참 된 자를 알게 하심을 안다는 거고, 이를 통해 우리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진력하게 하시는 분임을 안다는 거고, 이런 우리를 당신의 품 안에 있게 하신다는 것을 안다는 거고, 이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심을 안다는 거다. 이게 진짜 믿음이다.

 

이 모든 것을 세상 어디에서 알게 할까? 어느 이방종교가 알게 할까? 이방종교가 아무리 크고 훌륭해도 인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아느냐? 모른다. 인간이라면 이걸 알아야 하고, 참 종교라면 이걸 알려줘야 한다. 교회라고 해도 이게 없고, 알지 못하면 헛 살게 되고, 헛일을 하게 된다. 이건 가치가 없다. 이런 신앙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의 약속을 다 내어버린 것이니 무슨 믿는 효력이 있겠느냐? 모든 성경은 오늘날 나에 대한 약속으로 되어 있고 나에게 하는 말씀이다. 이것만큼은 명심하라. 현실에서 역사를 들고, 시대를 들고, 사람을 들고 오는 것도 나로 깨달으라고 하시는 일종의 말씀이다.

 

:에서 마귀가 예수님께 세상을 들고 자랑한 것처럼 교회 안에서 인도자가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을 가지라고 하는데도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아멘 아멘하고 돌아간다면 정신없는 짓이다. 성경을 준 것은 거짓과 가짜를 알라는 건데 성경을 안 읽는다면 누가 참 종이고 누가 거짓 종인지를 무슨 수로 알겠느냐?

 

성경은 안 보고 기도를 많이 하면 이 사람은 악령을 받게 된다. 우리는 성경을 깨닫기 위한 기도요, 깨달은 성경의 진리지식을 자기 성품화 인격화 시키는 거다. 여기에서 나오는 감화성, 희로애락성, 오각의 오감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다. 말씀의 인격화 실상화가 없이 40일간 금식기도를 하다가는 귀신이 들리고 악령이 들린다. 창조의 목적관에서 볼 때 믿는 자기가 그런 것에 속고 갈 존재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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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 요한복음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요1:35-39  김경형목사  2022-07-25 114
1482 요한복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 요1:31-34  김경형목사  2022-07-18 56
1481 요한복음 (계시보기)예수님께서 모친에게 '여자여'라고 한 이유/(외) 요2:4  김경형목사  2022-07-16 76
1480 요한복음 신앙의 女人 요2:1-11  강승호목사  2022-07-15 143
1479 요한복음 (계시보기)길이요 진리요 생명=예수=구원이다. 요14:6  김경형목사  2022-07-11 82
1478 요한복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9-31  김경형목사  2022-07-11 109
1477 요한복음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 요1:28-29  김경형목사  2022-07-04 106
1476 요한복음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요1:14-28  김경형목사  2022-06-27 57
1475 요한복음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5-18  김경형목사  2022-06-20 213
1474 요한복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15  김경형목사  2022-06-13 117
1473 요한복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1:13-14  김경형목사  2022-06-06 158
1472 요한복음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요1:12-14  김경형목사  2022-05-30 132
1471 요한복음 (계시보기)하나님과 의사단일의 시랑이어야 한다. 요14:20  김경형목사  2022-05-28 40
1470 요한복음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1-12  김경형목사  2022-05-23 96
1469 요한복음 (계시보기)빛 앞에 서야 자기의 어두움이 드러난다/(외) 요1:9  김경형목사  2022-05-23 29
1468 요한복음 (계시보기)나사로야, 나오라. 요11:1  김경형목사  2022-05-18 57
1467 요한복음 (계시보기)남편을 여섯 번 바꾼 사마리아 여자. 요4:16  김경형목사  2022-05-18 49
1466 요한복음 (계시보기)물질성과 신령성의 구분. 요6:33  김경형목사  2022-05-18 32
1465 요한복음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요1:11-12  김경형목사  2022-05-16 105
1464 요한복음 (계시보기)죽음을 이기는 게 사랑이다. 요13:34  김경형목사  2022-05-15 42
1463 요한복음 (계시보기)영의 힘으로 육과 세상을 이겨야 한다. 요6:63  김경형목사  2022-05-15 33
1462 요한복음 (계시보기)성령, 예언 환상, 꿈에 대하여. 요14:26  김경형목사  2022-05-15 77
1461 요한복음 (계시보기)밤의 정신을 가지면 가룟유다의 짓을 하게 된다. 요13:30  김경형목사  2022-05-13 62
1460 요한복음 (계시보기)이룰구원은 정신과 사상을 바로 잡는 거다. 요12:20  김경형 목사  2022-05-10 25
1459 요한복음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1:8-10  김경형 목사  2022-05-09 76
1458 요한복음 (계시보기)영적인 후손과 육적인 후손 요8:33-34  김경형 목사  2022-05-09 40
1457 요한복음 (계시보기)유혹과 미혹이 무엇인가?/(외) 요7:12  김경형 목사  2022-05-09 74
1456 요한복음 (계시보기)참 목자와 거짓 목자. 요10:11  김경형 목사  2022-05-09 78
1455 요한복음 (계시보기)실상을 좇겠느냐, 현상을 좇겠느냐? 요1:46  김경형 목사  2022-05-08 30
1454 요한복음 (계시보기)육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의 기준. 요6:63  김경형 목사  2022-05-08 25
1453 요한복음 (계시보기)죄와 세상에 매여 사는 게 38병자다. 요5:5  김경형 목사  2022-05-07 54
1452 요한복음 (계시보기)성경을 표면으로만 보면 예수를 죽이게 된다.(외) 요7:19  김경형 목사  2022-05-05 19
1451 요한복음 (계시보기)하나님께서 왜 거짓말을 하실까?/(외) 요7:2  김경형 목사  2022-05-05 20
1450 요한복음 (계시보기)물고기 153마리. 요21:1  김경형 목사  2022-05-04 157
1449 요한복음 (계시보기)인간에게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한 이유 요5:23  김경형 목사  2022-05-04 15
1448 요한복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4-7  김경형 목사  2022-05-02 58
1447 요한복음 (계시보기)신령과 진정의 예배.(외) 요4:24  김경형 목사  2022-05-02 75
1446 요한복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1-3  김경형목사  2022-04-26 86
1445 요한복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1:10-18  정용섭 목사  2022-04-03 176
1444 요한복음 성전을 회복하라 요2:13-22  강승호 목사  2022-03-16 244
1443 요한복음 나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노라 요4:27-38  허태수 목사  2022-03-12 112
1442 요한복음 나는 내가 증거한다 요8:12-18  허태수 목사  2022-03-12 88
1441 요한복음 나는 어떤 믿음인가? 요3:1-15  강승호 목사  2022-03-01 281
1440 요한복음 자비의 못 요5:1-8  강승호목사  2022-01-06 186
1439 요한복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성탄) 요1;29-30  전원준목사  2021-12-16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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