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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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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주훈 목사 |
참고 : | 중앙루터교회 20230326 |
(교회력설교)
20230326 사순절 다섯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요11:1-53
나사로를 살리신 그리스도
요한복음을 10장까지 빠르게 읽어보면 예수님은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무언가를 주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선 유대인 관리 니고데모를 만나 영생을, 4장에선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4, 5장으로 가면 국가 관리와 오랜 병을 가진 사람에게 생명의 회복을, 6장에선 굶주린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을, 7장에선 예루살렘에서 만난 어떤 사람에겐 생수의 강을, 8장 9장에선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빛을(8:12, 9:35-38), 10장에선 그분을 따르는 양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11장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 모든 만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장이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오늘 복음서 말씀인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님이 소개되는데, 죽은 자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사건은 이것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마 9:18-26; 막 5:41-42; 눅 8:40-56)을 살린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나오고, 누가복음 7장엔 홀로된 여인의 아들(눅 7:11-17)을 살리는 일도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주목해 볼 만합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나이와 성별, 그리고 사회적 배경을 떠올려 보세요. 나이와 사회적 배경을 보면, 예수님이 구원하고 건져내려고 하는 대상과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드러납니다.
야이로의 딸은 열두 살 소녀,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갓 입학한 외동딸입니다. 한창 사랑받고 해맑게 웃어야 할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홀로된 여인의 아들, 요한복음 11장 나사로는 두 누이의 오빠입니다. 이들은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남은 가족끼리 세상의 마지막 남은 버팀목처럼 서로를 지탱하며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을 다시 볼 수 없는 길로 떠나보냅니다.
갑자기 죽게 된 것도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가족의 죽음으로 절망한 남은 이들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곁에 있는 사람까지 무너지게 만드는 마성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들어가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데, 여기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건, 단지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뜻만 있는 건 아닙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주님의 능력은 절망에 빠진 모든 이들을 구해내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연민
특별히 오늘 복음서 말씀인 나사로 이야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고통받고 슬퍼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입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강조되는 복음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인데, 그렇게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나사로의 이야기처럼 구절구절 이 끈끈한 사랑의 감정이 묻어나는 곳은 없어 보입니다.
함께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마리아 마르다 자매가 사람 편에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봐 달라’는 표현이지요. 5절 말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여기서도 예수님과 이 가족의 끈끈한 관계가 두드러집니다. 11절에선 예수님이 나사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19절과 31절엔 예수님이 이들을 ‘위로’하러 왔고, 33절엔 이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심령에 비통해 여기시고 불쌍히 여겼다”라고 묘사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장례식에서 이렇게 누군가 찾아와 함께 슬퍼하는 일은 그리 낯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상여가 나가지도 않은 자리에 찾아와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라면 단순한 조문객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함께 아파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설령 우리 믿음과 이해가 부족하다고 책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슬퍼하는 사람 속에 들어가 우리의 감정을 공유하십니다. 함께 울고 위로하며 돌보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끝내 슬픔과 절망, 공포와 죽음을 생명과 평화 희망과 환희로 바꾸신다는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요한복음의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직면하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슬픔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주님의 약속이 우리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저와 여러분을 지킬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본문을 조금 더 봅시다. 오늘 이 말씀을 천천히 따라가면, 예수님의 반응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3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 오빠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알린 건 빨리 와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 정도 되면 눈치있게 후다닥 달려가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틀이나 뜸을 들입니다. 게다가 하시는 말씀이 4절에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렇게 뜸 들이다가 결국, 나사로는 죽고 맙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자매에게 도착했을 땐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3일이나 지났으니, 이 자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오라고 할 때 빨리 오지 그러면 임종이라도 봤을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잠자고 있는 사람 깨우듯 일으켜 세웁니다.
이 본문은 다양한 종류의 실의에 빠진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될 만한 복음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키에르케고르라는 덴마크 철학자 이야기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이라는 책을 내놓았는데, 첫머리가 요한복음 11장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만 죽지 않는다. 그러나 절망은 분명히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글을 시작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나사로의 죽음에서 절망을 읽어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 모두에게 절망이었다는 점을 끄집어냅니다. 자매들의 죽을 것 같은 절망, 그리고 나사로의 실제 죽음(나사로)까지도 요한복음 11장에 모두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에서 꺼내줄 구원자가 없다면, 절망은 실제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입니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에 이르는 병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됩니다. 문제는 이 병에 걸린 사람에게 내려지는 진단이 심상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나 성경의 진단대로 하자면, 이 병을 치료할 해법이 우리 자신에겐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더욱 심각한 건, 죽을병에 걸렸는데도 병에 걸린 사실조차 모른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알콜 중독자 같아서 술에 취해야만 말짱한 것으로 착각하고, 술이 깨면 오히려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렇게 매 순간 허망한 것으로 배를 채우면서 죽음으로 달려갑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다 보니, 절망은 계속 절망을 부르고 헤어날 수 없는 나락에 빠져듭니다. 이 절망의 반복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런 절망이 오늘 곳곳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일입니다.
그리스도만으로
그럼 해결책은 없을까요? 절망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지만, 절망의 증상은 언제나 관계가 어긋나고 깨질 때 생깁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주일학교 헌신예배 대표기도를 맡았는데, 기도문을 아빠에게 부탁했어요. 그래도 명색이 아빠가 목사인데, 믿고 ‘아빠 기도도 좀 써 줘요.’ 그랬더니 ‘야 임마, 네 기도를 내가 왜 써주냐?’ 믿었던 관계가 깨지는 순간, 절망했죠. 마치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보았던 마른 뼈처럼 굳어버렸지요.
절망이란 그렇게 기댈 곳이 사라지거나 깨질 때 시작됩니다. 이 말을 우리가 교회에서 잘 쓰는 말로 바꾸면, ‘절망은 곧 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우리의 현실, 그래서 이 절망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우리 현실을 성경은 죄의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이 죄의 상태, 절망의 상황은 우리 밖에서 우리를 건져낼 구원자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경이 바로 그 구원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다만, 의사 앞에 증상을 숨김없이 드러낸 후라야 온전한 치료가 가능하듯, 우리의 절망이 그리스도 앞에 투명하게 드러날 때 비로소 온전한 회복도 시작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 앞에 투명하게 서는 것, 투명하게 기도하는 것, 투명하게 외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분 앞에서 참으로 절망하는 사람이라야 치료받을 수 있게 됩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로마서 5:20 말씀이 여기에 꼭 들어맞습니다.
우리의 절망을 그리스도 앞에 가져와야 합니다. 기도의 삶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면, 돈과 음식에 뿌리내리고 사는 “땅의 존재”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주어진 절망의 해독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에 대한 성가심이야말로 죄와 죽음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치료제가 됩니다.
유디카
한 말씀만 덧붙이겠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이번 주일엔 ‘유디카’(Judika) 주일이라는 별칭이 붙습니다. 서방교회 전통에서 이날 사용하는 예배 시편이 통상 시편 43편인데, 라틴어 성경 첫 단어가 공의로운 심판을 뜻하는 유디카로 시작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주여 나를 판단하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주님, 나에게 당신의 정의를 주소서.”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고통스러운 현실 한가운데 있는 신앙인이 하나님의 동행과 도움을 갈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시편 43편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교독한 시편 130편도 같은 맥락입니다.
유디카 주일이 되면 어떤 교회는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거나 숨겨놓으면서 성도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절망적이지만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 곁을 지킵니다. 그러니 주님께 우리의 필요와 염려를 거침없이 탄원하며 기도하자’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는 밝은 빛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곳곳에 암울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회 전반에, 그리고 우리의 관계 곳곳에, 나사로의 죽음에 통곡하며 절망하던 사람들의 흔적이 보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친구이신 우리의 그리스도는 당신과 친구 된 모든 이에게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십니다. 바라기는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께서 부활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을 생명 빛으로 인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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