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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2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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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25절-27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고, 문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하는 게 무슨 뜻일까? 죽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 일반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은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음성이라고 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건데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니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만능의 능력자임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신체가 분산이 되어서 귀도 흙이 되고, 이빨도 흙이 되고, 몸도 손톱도 뼈도 머리카락도 전부가 썩고 흙이 되어서 흩어져 버리는데 이런 상태로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신다.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으면 새우나 갈치가 다 뜯어먹고, 어부는 사람을 뜯어먹은 이 물고기들을 잡아서 여러 사람들이 먹고 뼈는 개들이 먹어서 이리 저리로 흩어지는데 어떻게 이 사람의 시체를 찾느냐? 또한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폭발을 해서 이 비행기에 탄 사람이 재가 되어 흩어지면 이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 모든 기능과 지능과 감각성과 생명이나 신체가 이리 저리 흩어지고 불에 타서 없어지고 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만물을 무에서 유로 만든 분이다. 그래서 인간이 이리 저리 흩어져서 흔적이 없다고 해도 당신의 의중과 기억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들어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헛된 인간이 없다. 그래서 만능의 능력자시요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이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는 것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만사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적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절대 정확히 아신다. 우리 인간을 영과 육으로, 신령한 것과 물질로 결합시켜 만든 분이 무엇인들 못하시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를 있게 할 수도 있고 없게 할 수도 있는 분이니 얼마든지 죽은 자를 살리실 수도 있다. 성경에서 이런 예를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려서 소망이 있게 하셨고,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고,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살리셨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도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이 죽은 것을 살리는 게 힘이 드실까, 영이 죽은 것을 살려내는 게 힘이 드실까? 눈에 보이는 것을 살리는 게 힘이 들까, 안 보이는 것을 살리는 게 힘이 들까? 하나님에게는 둘 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항상 물질적인 개념으로 생각을 해서 ‘어렵다. 안 된다’ 라고 한다. 우리는 자기가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다 하신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지 ‘하나님도 우리 인간들처럼 못 하신다’ 라고 하면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거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라고 했으니 곧 지금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라는 건데, 그렇다면 ‘이 때’가 예수님 당시의 지금이냐, 지금의 우리들의 지금이냐, 아니면 그 때의 지금이나 지금의 지금이나 다 해당이 되는 거냐? 이룰구원 면으로 보면 어느 시대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하는데, 마지막 시대에는 거짓 종이 많다고 했으니 분별을 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지금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난다는 것이니 자기가 지금 듣는 것이 진리생명의 천국복음의 말씀의 이치인지, 진리본질로 적중이 된 것을 듣는 것인지 생각을 해야 한다. 왜냐?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라고 했으니 어느 때고 지금 진리생명의 말씀을 못 들으면 못 살아나기 때문이다.
‘지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라고 했으니까 말씀을 안 듣는 자는 살아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이 말씀을 못 들을까? 귀가 있는 사람은 듣고, 귀가 없는 사람은 못 듣는다. 그리고 못 듣는 사람은 살아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은 다 귀가 달려 있지만 말씀을 듣는 귀가 있고, 못 듣는 귀가 있다.
그러면 말씀을 못 듣는 귀는 세상 말도 못 듣느냐? 세상 말은 누구보다 잘 듣는다. 사람은 자기가 즐겨 듣는 쪽으로 따라가지 자기가 즐겨 듣지 않는 쪽으로는 안 따라간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주님의 말씀을 안 듣는 사람은 세상의 말을 따라간다. 이 사람은 영적인 면이, 신앙 믿음이, 깨달음이 살아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생활을 할 때 살아날 것을 듣는 것에 이해타산이 빨라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가 지금까지 믿어오면서 죽을 것을 들었는지, 살아날 것을 들었는지?
들을 때는 항상 살아날 것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 살아난다. 물론 말씀을 주는 자도 죽을 것을 주면 안 된다. 세상 소원 목적성을 주면 이 말을 받는 자는 세상의 독이 올라서 신앙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진리이치에 예민해지고, 이치가 깨달아지고, 옳은 지식이 들어가니 신앙 믿음이 자라게 된다.
마귀의 유혹의 말을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그 쪽으로 흐른다. 자기가 세상에 속한 말, 세상에 속한 소원 목적을 들으면 마음이 자동적으로 세상으로 흐른다. 이건 마음이 죽는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다. 살아날 수 있을 것을 들어야 살아난다.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지식을 듣고 하나님의 지혜를 들어야 자기 속에 살아나는 게 있게 된다.
예수 믿으면서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살아갈수록 믿어갈수록 죽는 것뿐이다. 사는 건 없다. 자기의 마음과 정신이 죽어 들어가면 물질도 죽는 곳으로 써버리게 된다. 이러면 사람이 건설이 안 된다. 사회적으로도 몹쓸 사람이 된다.
우리는 모든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이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나야 한다. 이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고 사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된다. 자기가 몹쓸 전염병에 걸려서 예수 믿는 자기 집에서부터 이 전염병이 사회로 퍼져나간다면 무슨 덕이 되겠느냐? 전도문도 막힌다. 우리는 살리는 감염을 가져야지 죽이는 감염을 가지면 안 된다.
‘이 때’ 라고 하는 것은 사는 ‘기회’를 말함인데, 자기의 전 일생은 신앙 믿음이 사는 기회다. 인도자는 이런 것을 깊이 느끼고 언제 어느 때고 사람이 사는 말씀을 전해야지 죽는 말을 하면 안 된다.
26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생명이다 우리의 양자의 생명은 주님(아들)으로부터 받은 생명이다. 그러나 생명의 질은 똑같다. 요6:57에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라고 했는데, 주님의 교훈을, 그 정신을 먹으면 산다는 거다. 그리고 요1:4에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는데, 생명의 빛은 하나님의 생명인지, 아니면 다른 생명인지를 분별을 할 수 있다. 네가 지금 어느 생명을 주격으로 살고 있는지 이 생명을 분별한다.
안 믿는 사람은 육의 생명을 자기의 주격적 생명으로 하고 살면서 이 생명이 죽을까봐 벌벌 떨다가 이래저래 죽는다. 예수를 믿어도 육의 생명을 주격으로 하고 사는 사람도 항상 육의 생명이 죽을까 두려워서 모든 삶의 소원 목적이 육신 쪽으로 쏠려져 있다. 이러면 영의 생명은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것도 한 번 두 번 빼먹다가 나중에는 아예 안 나오면서도 덤덤하다. 이건 믿음이 죽은 거다.
우리는 영의 생명을 주격으로 하고 살아야 한다. 성경을 읽어놓고 세상의 말을 하면 이 말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생업을 하다보면 목사님들처럼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없는 거지만 사는 소원 목적만은 바로 가지고 최소한 주일예배만큼은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세상 것을 준다면 이런 설교는 안 들어도 되고, 이런 교회는 안 나가도 된다. 우리는 교회에 나가되 사는 말씀을 주는 곳으로 나가야 하고, 아무 곳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안 주면 천상 주님 오실 때까지 집에서 기름준비를 해야 한다. 진리말씀을 찾아도 없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끝이 가깝다는 징조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했는데, 이 빛은 모든 장광, 색깔, 높이, 깊이를 분별 구별한다. 이 빛은 이룰구원에 있어서 만능인데, 우리가 이 빛을 가지면 이 면에서 구별을 하고 저 면에서 구별을 하고 다 구별 분별할 수 있다. 사람이 어느 생명을 주격으로 사는 건지 구별 분별해 낸다. 마음과 생각이 죽은 것과, 죽어가는 것과, 사는 것을 구별 분별해 낸다. 이렇게 구별 분별을 하는 게 영의 일이다.
믿는 우리는 미혹과 유혹이 많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자칫하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생업을 해야 하는데, 우리에게 생업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전도의 매개물이다. 그러니 믿음의 목적을 가지고 생업을 하되 믿는 일을 본업으로 하면서 이 본업을 위해 부업인 생업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은 마치 항구를 떠난 배와 같다. 무슨 말이냐? 물과 바람을 잘 이용하면 배가 잘 가게 되지만 배 안에 바닷물이 들어올 때가 있는데 이 때 물을 안 퍼내고 가만 두어야 하느냐, 계속 퍼내야 하느냐? 계속 퍼내야 한다. 물이 조금씩 들어오면 별 게 아닌 것 같으나 이것을 그냥 두면 나중에는 물을 퍼내기도 힘들고, 결국은 배가 가라앉게 된다. 이러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물고기의 밥이 된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세상을 떠날 수는 없는 거고, 살다보면 세상이 자기 마음 속에 들어올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런 세상 것에 빠지는 게 아니라 믿음생활에 이용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밤에 출발을 하는 배는 별자리를 보면서 목적지를 찾아간다. 믿음에 큰 깨달음을 준다. 진리의 종은 성도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그 길로 인도를 한다. 동방박사에서 이걸 볼 수 있다. 우리는 구별이 안 되는 것을 먹으면 안 된다. 순전히 하나님의 것을 먹어야 한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구별 분별이 된다.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정신 사상이 구별 분별이 안 되면 마귀에게 100% 속는다.
27절: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인자’란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인성을 말하는 거라고 하는데,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한다. 이걸 우리의 이룰구원 면으로 보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니 우리에게도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거다.
그런데 주님께 주어진 심판권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26절에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라고 하셨듯이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생명으로 사셔서 그 속에 아버지의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에 심판을 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33년간 100%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면서 죽은 게 없고, 죽을 게 없고, 죄가 없고, 전부는 살리는 삶을 사셔서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진 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사람 되어 오셨고, 오셔서 창세 이후로 세상사람들이 겪는 모든 것을 다 겪고 마셨다. 다 겪을 때마다 이겼고 승리를 하고 나왔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죄를 지은 것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시는 거다. 세상의 모든 유혹과 미혹과 죄와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심판하는 권세를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자기 속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나게 되니 이렇게 되면 세상을 구별하고 분별하고 비판하고 판단해서 죽은 것, 죽을 것을 구별하고 분별할 수 있고, 모든 유혹과 미혹을 이기는 권세가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면을 보면 주님이 인간되어 오심은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어 주시려고 오신 거다.
예수님께서 왜 구유에서 나셨을까? 마리아가 마구간에서 아기예수를 낳고 그 밤에 핏덩이 아기예수를 안고 애굽으로 도망을 갔는데 마리아의 몸이 얼마나 아팠을까? 인간적인 면으로 보면 너무나도 큰 고생이다. 요즘 여자들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원망불평이 많을 텐데 마리아도 원망불평을 했을까?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생각할 게 많다. 방에서 편하게 자고,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아도 전기밥솥이 밥을 다 해 주는데도 늘 사는 게 힘이 든다고 원망불평이 많다. 이런 우리로 자신을 돌아보라고 예수님께서 그런 곳에서 태어나셨는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시험에서 100점을 맞으면 다른 사람의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점수를 매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세상을 살면서 죄에 넘어가지 않고 다 이기면 실력자가 되고 능력자가 되어서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거다. 세상이 생긴 이후로 세상의 모든 유혹과 미혹을 이기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산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 어떤 이방종교에도 이런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는 거다.
아들이 보는 기준과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보는 기준이 다르다. 아들은 세상을 이기셨고,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의 눈을 가지셨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것의 절대 기준이다. 이걸 부활로서 보여주는 거다. 부활 속에는 안 죽는 거, 영원한 존귀 능력 권세가 다 들어 있다. 유대인들은 이런 권세는 없고 모양만 내려고 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현재에서 부활성의 신앙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영능의 실력이 있어야 권세도 있다. 참 실력은 주님 것, 하나님의 것으로 된다. 인간의 것은 참이 아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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