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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2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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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28절-29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28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사람이 죽어서 이리 저리 흩어지고 흙이 되었는데 죽은 자가 어떻게 음성을 들을 수 있느냐? 인간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할 일이다. 사실 이것만 아니라 인간은 생겨날 때부터 영과 육으로 결합된 신비로운 존재인데 사람들은 이걸 전혀 모른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이걸 모르는 사람이 많고, 믿는 사람 속에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기독교인이 많고, 영과 육 중에 어느 것을 주격으로 하고 사는 게 진짜 자기인지를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도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서 볼 때 옳은 거다. 따라서 믿는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생업을 위해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하시는 일을 목적으로 놓고 일반적인 일을 해야 옳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성도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신 것은 믿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안 믿는 사람들과,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이걸 이상하게 본다. 왜냐? 눈에 보이는 가견적 현상적 비유적인 것만 알고 있기 때문이고, 자기 신체는 금방 늙고 쭈그러지고 얼마 안 있으면 흙에 묻힐 현상적인 자기인데도 이 자기를 참 자기로 알고 살기 때문이다.
자기의 몸은 자기에게 비유요, 믿는 사람의 몸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이 면에서 몸이 아주 귀중하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왜 사람의 몸 안에 거하는 거냐? 인간은 영이 있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이 영을 위해 인간의 몸을 전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듯이 자기의 일생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바로 만들어지고 놓여져 가는 구원의 삶이다. 쉽게 말하면 없어질 세상살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에 이용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은 눈에 보이지만 영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영적인 면에 둔감해서 무형적 영적 실상적으로 영원히 존귀영광과 능력이 될 수 있는 영에 관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다. 생명과를 먹으면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땅에 편만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건 눈으로 보이는 면의 복이고, 이 안에는 신적 능력과 지혜지식이 들어 있는데 영적인 면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속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껍데기만 붙잡고 산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로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메시아를 보내주겠다고 하신 내용을 잘 알면서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언행심사가 이상하게 보이는구나. 지금도 마지막 때의 많은 기독자들이 성경을 단순히 가견적 역사로만 생각을 하고,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에 하나의 종교로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통해 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을 시키신 거냐? 그 이유가 ‘너의 이력과 존귀영광을 애굽에 올려놓지 말고 천국에 올려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도 하다. ‘너의 이력과 존귀영광을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보는 참 나라, 영원히 살 곳에 올려라. 성품적으로 올려라. 존귀적으로 올려라. 영능적으로 올려라’ 하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면서 죽은 요셉의 해골을 앉고 올라갔는데, 이것은 마지막 부활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은 죽은 시체라도 애굽에 남기지 말아라’ 이 뜻이다. 마지막 부활 때 예수 믿은 사람들을 변화 부활시키는 것도 성도는 이 땅에 시체라도 남기지 않고 하늘나라로 다 데리고 올라가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거다. 믿는 우리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런 의사성을 안다면 불심판에 들어갈 자로 믿지 않을 거다. 그런데 주님의 이 의사를 알고 이 의사에 일치되게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간과 세상의 미래가 성경의 문자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사람은 성경의 문자대로 그 나라에서 영광자로 되기 위해서 현재에서 이룰구원을 중요시 여길 거다. 이러지 않고 지금의 현재를 무시하고 산다면 이 사람에게는 미래의 영광의 결과도 없는 거다. 현재는 반드시 원인에서 출발이 되어 있고, 출발을 해서 현재는 미래의 결과를 향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 모두 이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니 미래를 위해 현재에서 이룰구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창세 이후로 죽은 사람을 일으킨 자가 있느냐?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동시에 무덤에 있던 많은 사람을 일으켜서 이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이 때 살아난 그들은 언제 갔던 도로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보여주신 주님의 부활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들 속에서 그대로 역사가 되고 있다. 믿는 우리 속에는 지금도 영원한 영광의 자기로 만들어 가는 이룰구원을 위한 성령님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것이라서 믿는 사람들이 잘 못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듯이 지금도 내 속에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계신다.
믿는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본질로 동일화 되면 동일화된 이 자기는 안 죽는다. ‘죽어도 살겠고’가 된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 인간이 아무리 많이 깨닫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런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자기 속에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기가 살고 있으니 이 자기를 귀히 여겨라. 이 자기를 함부로 여겼다가는 네가 얻어맞는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것을 못 본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이 땅에서 부활의 몸으로 40일 동안 계시면서 당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주셨다. 제자들과 문도들은 다 보고 믿었다. 부활의 주님을 본 이들은 무덤에 갇혔던 사고방식을 깨뜨리신 주님을 보고 모두가 깜짝 놀랐을 거다. 지금의 우리는 이걸 현재로 끌고 와서 부활의 그 정신을 봐라. 주님께서 죽음에서 살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현재 너에게도 이 역사를 하시겠다는 거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띄워주신 것은 당신께서 사람들의 영의 눈을 띄워주겠다는 거다. 마지막 날에 가서 띠워줘 봤자 그 때는 이미 이룰구원을 다 놓쳐버렸다. 그러니까 영적인 면에서 부족하고 미달되고 자라지 못하는 것을 현재 띠워주겠다는 거다. 이걸 안 믿으면 믿음이 아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생명의 부활인지, 심판을 받은 부활인지 어떻게 아느냐? 그 기준이 누구냐? 이걸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을 알아야 한다. 틀린 답인지, 맞는 답인지는 맞는 답을 가지고 오면 틀린 답은 저절로 드러난다. 틀렸는지 맞았는지는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오면 알게 된다.
거짓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력과 공력과 일을 해 놓은 부피나 어떤 소유성이 많고 적은 거, 세상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등 절대 정확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것을 기준 삼아서 ‘믿음이 있네. 없네’ 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절대 정확한 저울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룰구원도 예수 그리스도로 되는 거다. 어쨌든 세상을 기준으로 가지고 와서 말을 하면 거짓인 줄 알아라. 세상기준을 가지고 와서 신앙의 성공률을 말하면 100% 거짓인 줄 알아라. 신앙이 세상이 기준이 되어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고 존귀영광을 얻어도 전부가 심판성이다. 세상 아래, 죄 아래다.
예수 그리스도의 33년간의 삶은 그 모든 언행심사가 죽은 것이 없고, 죽을 것이 없다. 모두는 영생이요, 생명이요, 능력으로 사셨다. 이렇게 사셨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주셨느냐? 당신의 부활로써 죽은 것, 죽은 것이 없고 전부는 산 것으로, 신령한 것으로 사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이 삶으로 생명의 부활과 사망의 부활이 판단이 나오는 거다.
인격자의 세계에서 선과 악, 의와 불의가 있듯이 부활에도 선한 일, 악한 일을 한 것에 따라 생명의 부활이나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그리고 한 번 정해진 것은 그대로 영원히 간다. 그러니 기독자들은 늘 생명의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겠는데 눈에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고 육의 감각을 따라서 이해타산과 소원 목적과 가치판단과 평가성을 늘 세상에 놓고 사니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가 없다. 이런 사람의 기도가 하늘나라에까지 올라가겠느냐?
그러면 선한 일이 무엇이냐?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하는 거냐? 선한 일을 하려면 먼저 무엇부터 찾아야 하겠느냐? 먼저 선의 기준을 찾아야 한다. 선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이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이 하나님의 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예수로 통해 가지게 되는데,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게 선이다.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신령세계에 들어갈 선의 사람으로 되었기 때문에, 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선한 일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 속에 참기름이 가득 차 있으면 병을 기울이기만 하면 참기름이 흘러나오듯이 이 사람의 언행심사는 다 선이 된다. 믿는 우리는 자기가 선의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도 선의 사람이 되도록 교훈이 나가야 한다. 이 선을 위해 교훈도 가고, 물질도 가야 한다.
믿는 사람은 정확한 신앙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선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선을 행한 자의 부활과, 악을 행한 자의 부활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100% 죽은 게 없는 하나님의 것으로만 되어 있다. 그래서 100% 생명의 부활을 하셨다.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을 통해 그 분의 의도성을 아는 게 중요하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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