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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3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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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33절-36절: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33절-34절: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요한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를 했는데 예수님은 사람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이 세례요한이 진리에 대해 증거를 했지만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증거한 그 분이 아니라는 말이냐?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느냐?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로서 하늘로부터 온 분인데 세례요한이 이 예수님을 증거할 때 예수님의 속에 든 것을 100% 나타내겠느냐? 불가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저 분이 주님이시다. 메시아시다’ 이건 될 수 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 속에 든 것은 주님 당신이 언행심사로 표현을 해야 다 표현을 할 수가 있다. 세례요한은 ‘저 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저 분이 메시아다. 메시아는 무슨 일을 하신다’ 하는 걸 나타내고, 예수님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고, 고쳐주고, 온전케 하는 일을 하신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기를 자꾸 드러내주길 바란다. 세상사람들 속에는 세상이 들어 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주님을 증거하는 것은 그 내용이 세상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유명하다고 증거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교회의 목사님들도 교계가 알아주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에 관심이 있지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인격과 성품과 소원 목적적으로 주님께 밀착이 되게 하고, 마음과 정신과 소원 목적과 취미가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목사가 많다. 교회의 목사라면 죽어가는 성도들의 믿음을 살려내는 일을 해야 하겠는데 교계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목사가 많다.
구약에 에스겔 선지자가 공동묘지에 가서 일어나라고 하니까 죽은 송장들의 뼈들이 자기가 붙어야 할 곳에 찾아가서 척척 붙었다. 남의 머리나 남의 팔다리에 가서 붙은 게 아니다. 아무리 많은 뼈들이 널려 있지만 머리가 기준이 되어서 몸의 다른 뼈들이 자기 자리에 가서 붙었을 거다. 이렇게 된 것은 선지자로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인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 하는 말씀은 신앙이 죽은 자의 신앙이 살아나는 것은 그 이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야 된다는 거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냥 지식적으로 말을 하는 게 있고, 자기의 전 인격, 전 삶을 두고 말을 하는 게 있다. 자기의 전폭을 기울여서 하는 말에는 자기의 인격과 도덕성, 모든 희로애락의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말을 하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역사도 하시고 감화 감동도 하신다.
세례요한이 ‘저 분이다’ 하고 예수님을 가리키면 이 소리를 듣는 자는 세례요한의 손끝을 볼 게 아니라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서 보면 거기에 주님이 계시니 이 주님을 보고 따라가야 하고, 이 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증거를 받아들이면 사람이 온전케 되는 참 역사가 일어난다. 사람이 사람을 온전케 할 수는 없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속성과 성품적으로 인격적으로 온전케 하는 것은 신의 역사다. 성령님의 역사다. 말을 잘 하는 목사의 입으로 되는 게 아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도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해서 걷게 되었다. 이것은 세상 땅에 붙은 소원 목적을 말씀으로 땅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건데 이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도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처럼 자기도 육신의 앉은뱅이를 예수이름으로 일으키겠다고 한다. 이건 성경을 잘못 깨달은 거다.
사람이 두 발로 잘 걸어 다녀도 자기의 소원 목적이 땅에 붙은 앉은뱅이가 많다. 앉은뱅이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돈 바구니를 놓고 있으면 수입이 많다.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부가 돈 바구니를 가지고 돈을 채우기 위해 산다. 지금은 은행통장에 채우는데 이것도 돈 바구니다. 돈을 채우는 목적이 세상이라면 이 사람은 앉은뱅이다.
이렇게 보면 목사도 앉은뱅이가 있다. 소원 목적이 천국이라면 이 목사는 위로 벌떡 일어난 거지만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소원 목적이 세상 땅에 붙어 있으면 영적 앉은뱅이다. 여기에서 고침을 받으려면 바라는 소원 목적이, 이해타산이 땅 쪽이 아닌 천국 쪽으로 향해야 한다. 목사가 앉은뱅이 신앙이라면 절대로 교인들을 바로 세울 수 없다. 바로 선 사람이라야 앉은뱅이를 세울 수 있는 거다.
우리는 영적 정신 사상 면의 앉은뱅이를 알아야 한다. 앉은뱅이는 자유도 없고, 환경에 따라 움직이고,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남의 손에 움직인다. 창:에서 생명과를 따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환경을 지배하라는 거다. 이게 참 인간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다. 사람이 환경에 지배를 받게 되면 환경에 코가 꿰여서 자유가 없이 살게 된다.
앉은뱅이가 성전 미문 옆에 앉아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간다. 앉은뱅이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헌금을 하려던 돈을 앉은뱅이에게 준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앉은뱅이가 성전에 올라가는 길옆에 자리를 잡고 성전을 항한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으로 도둑질하는 장면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앉은뱅이가 많다. 세상 소원 목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을 세상으로 도둑질하는 거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다.
이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났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나사렛’을 붙이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무시하는 말인데,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이름을 붙여서 기도를 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난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우리를 구원하는 분인데, 이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성품, 성령님의 성품의 속성이 들어 있으니 사람은 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무조건 예수이름으로 하면 사람이 그리스도성으로 일어나지는 게 아니다.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는 것은 땅의 소원 목적을 가졌던 정신이 하늘의 소원 목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소원 목적이 하늘 쪽으로 일어난 사람이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드는 거지 두 발로 아무리 잘 걸어 다닐지라도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진 자는 주님의 일을 못 거든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되고, 소원 목적이 천국의 것으로 바뀐다고 해서 빌어먹느냐?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을 자기의 육신에 유익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믿는 자들이 많다. 나는 예수님의 일을 걱정하고 나의 세상살이는 주님이 걱정하도록 해야 되겠는데 내가 나의 세상살이를 걱정을 하고 있다면 마음이 편하겠느냐? 주기도문은 한 마디로 내 속에 주님의 일이 이뤄지게 해 달라는 기도다. 주님의 일을 걱정하는 게 나의 일이다. 이러면 주님의 그 일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에게서 하시는 주님의 일은 나를 주님처럼 만드는 거다. 이게 나의 일이요 또한 주님의 일이다. 앉은뱅이가 예수이름으로 걷는 것은 신의 역사요, 하나님의 역사다.
35절-36절: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세례요한이라는 등불은 임시인데, 이 불을 누가 켠 거냐? 주님이다.
주님이 세례요한을 당신보다 6개월 앞서서 이 땅에 보냈다. 주님은 당신이 재림하시기 전에도 우리들에게 당신의 신실한 종을 앞서서 보낸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직전이 되면 세상이 영적으로 온통 어두워지고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때가 되면 옳은 성도를 만나기가 금싸라기를 보는 것보다 힘이 들게 되니 이럴 때일수록 해가 막 뜨려고 할 때 새벽별인 금성의 빛이 가장 밝듯이 진리성도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의 빛을 더욱 더 밝게 비춰야 한다.
말세가 되면 거짓 종이 많이 나온다고 했으니 거짓 종, 거짓 신앙자들이 98% 이상 이 되지 않을 런지? 자기가 이런 때 산다면 반드시 ‘거짓 신앙에 속한 건지, 참 신앙에 속한 건지?’ 하는 시험이 있게 된다. 자기는 이 시험에 통과할 가능성이 있겠느냐?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세례요한이 일시 켠 등불을 누가 켠 거냐? 세상 이방인들이 아니라 주님이 켠 거다. 마지막 때에도 주님이 신실한 종들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의 불을 붙이신다. 그러니 교회를 선택할 때 ‘어느 교회가 큰가, 어느 목사가 능력이 많은가?’ 하는 걸 보지 말고 신앙의 원칙을 놓고 ‘참 빛이 어디에 있나?’를 보고 선택을 하라.
신앙의 원칙을 모르면 이 사람은 무리들을 따라다니게 된다. 그래놓고서는 뭔가 잘못 되면 ‘네가 가라고 해서 이렇게 되었다’ 라고 하며 남 핑계를 댄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거기에 등 떠밀려서 가지 말고 하나님의 본질을 기준한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하나님의 의사단일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옳은 신앙이 된다. 교회 인도자는 교인들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저울을 줘야 한다.
세상인간들이 세례요한에게 불을 붙였다면 세례요한은 세상을 자랑하고 소개할 거고, 주님이 불을 붙였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할 거다. 우리가 교회 인도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으면 목사의 말을 듣고 ‘아, 이 분은 누가 보낸 종이로구나’ 하고 알게 된다. ‘마귀가 보낸 종이냐, 주님이 보낸 종이냐?’를 판단하게 된다. 이 판단을 할 줄 모르면 아무 교회나 가서 이용을 당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영원한 것과 임시성,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게 해 주어야 한다. 교인들은 ‘목사가 나에게 어느 것을 가지라는 건지? 불에 타질 것을 가지라는 건지, 안 타질 것을 가지라는 건지, 속사람의 인격을 변하게 하는 건지?’ 판단이 나와야 한다.
거짓 종들은 성경을 들고 종교적인 세상을 말하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성경은 사람을 바로 세우는 건데 신앙을 일에 붙이게 되면 죽도록 일을 해도 자기 만들어지는 것은 없고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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