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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3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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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38절-40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원어로 보면 ‘말씀’은 ‘로고스’, 즉 인격 그 자체, 존재를 말한다. 그러니 한국어로 ‘말씀’이라고 한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쓰여진 글씨로만 알면 안 된다.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라고 하는 것은 말씀과 예수님을 연관을 지어서 생각을 해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 연관을 짓지 못하니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거다.
구약은 신약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라서 구약은 구약대로 끊고 신약은 신약대로 끊어서 보면 안 된다. 구약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오신다’ 이니 이 분이 오셨다는 것을 신약에서 증거해 내야 한다. 구약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 것을 믿는 신앙이 없으면 신약에서 그 분이 오셨는지를 모른다.
인간이 볼 때는 지구의 나이가 몇 십억 년이니 몇 억 만 년이라고 하고, 성경으로 연대를 따지는 사람들은 지구의 나이가 몇 천 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원 무궁히 자존하시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아무리 긴 기간이라고 해도 한 눈에 다 보신다. 그래서 인간들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만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인간들은 어제, 작년, 올해, 미래를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면서 계획을 세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한 순으로 보신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세계를 말해주는 성경을 깨달으려면 성경을 시간과 장소에 넣어서 깨달으려고 하면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된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볼 때도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고 보게 되면 그 다음 것을 못 깨닫는다. 그래서 창: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니라’ 라고 시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니, 안 계시니’ 하는 것을 논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나를 어떻게 하시려고 세상에 만들어 놨는지를 알라는 거다.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로 하고 보면 이게 보이게 되어 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말을 하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을 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구약성경을 보면서 오실 예수님의 정신을 알아야 하고, 신약성경을 보면서는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순서만이 아니라 신앙이 들어가는 정신의 순서도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안 본다면 이런 걸 어떻게 알겠느냐?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말씀을 듣고 보아야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성경은 일반 윤리 도덕적인 개념으로는 해석을 못한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았다는 것을 시인을 해야 예수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선악과 따먹은 차원의 일반 이성적 양심을 가지고 도덕성을 말을 하지만 예수님의 도덕성은 세상사람들의 도덕성과는 질과 근원이 다르다. 주님의 것은 영생계, 생명계, 영원 무궁계인 하늘로부터 온 거라서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고, 땅에서 난 것은 땅의 질이라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갈 자가 없다’는 것은 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면 이상한 곳에 가서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하고, 빼앗기기기도 하고, 자기가 좋아서 가져다주기도 한다.
성경대로 한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대로 한다는 게 아니라 문자 속에 들어 있는 영적인 뜻을 따라 하는 것을 말하는 거다. 영적인 뜻을 아는 게 알맹이를 아는 거다. 성경의 역사나 성경에 있는 인간의 활동은 껍데기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람들의 활동을 보면서 ‘어떤 소원을 품고 무슨 마음과 무슨 뜻으로 그렇게 했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영원한 인격의 실상의 존재를 말하는 거다. 그래서 신앙 믿음이란 신앙 믿음의 원료뭉치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거다. 이게 있어야 언행심사가 믿음으로 나가게 된다.
하나님은 실상적인 존재요 우리는 현상적인 존재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한 분이지만 우리 인간의 몸은 시간 속에서 쭈그러지고, 죽고, 영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실상적 존재는 영이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훈련을 받고 성장하고 자라서 예수님을 닮은 영능의 실력, 믿음의 실력이 우리의 실상이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믿는 우리를 변화 부활을 입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아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영능의 실력을 닦은 실력대로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함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로 온전히 드린 사도바울과, 평생 사람을 죽이고 강도짓을 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간 사람이 천국을 누리는 게 똑같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없어진다. 성경에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 열 고을 스무 고을을 다스린다’ 라는 비유가 있듯이 믿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건 환경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는 것에 따라 그 나라에서의 영광이 달라진다.
성경에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하늘나라에서 실행될 것을 세상 것을 들어서 깨닫게 하는 건데, 믿는 사람이 이런 비유 속에 들어 있는 하늘의 이치를 보지 못하고 글자대로만 알면 어떻게 되겠느냐? 한 마디로 성경은, 예수님은 천국의 실상의 것을, 영원히 효력을 낼 것을 말씀하시는데 거짓과 이단자들은 이걸 땅의 것으로 바꿔서 말을 하니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을 한 속성과 같은 거다.
자기 속에 물이 없으면 귀신들의 오만 잡된 정신이 들락날락 하게 된다. 교회에서 참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배우느냐?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우리는 육신이 말씀이 되어야 한다. 말씀의 사람으로 되어야 한다. 이게 성령의 열매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헛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듯이 ‘예수를 믿어도 헛 믿었구나’ 하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성도들의 신앙실력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건의 바람이 불게 하시는데 이 바람을 통해 신앙실력이 커지기는커녕 그냥 날아가 버리는 교인도 있다.
하나님께서 실상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인간을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 주시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처럼 만들어져야 한다. 예수 믿는 게 이게 없다면 예수님께서 인간 되어 오실 필요가 없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처럼 만들어지는 게 없이 맨날 충성봉사나 하고 헌금이나 한다면 믿는 유익이 뭐냐? 이렇게 믿다가 천국에 가면 믿은 효력이 뭐가 있겠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원형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인간창조의 근본목적이 나를 예수님처럼 만드시려는 거다. 그러니 자기의 원형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모형으로 인격자로 만들어서 왜 시간과 환경 가운데 두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를 주님처럼 만들기 위해 이 땅에 두신 거다.
39절-40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 준 율법과 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이방민족에게는 이게 없다. 성전도 예루살렘에 하나뿐이다. 이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뜻이 뭐냐? 예배를 드리는 건물은 성전이 아닌 예배당이다. 예배당은 물질이요 세상에 속한 거라서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 물질은 그 어떤 것이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질은 사람이 주님을 닮는 일에 투자를 해야지 불타질 것에 투자를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했느냐? 성경은 영생을 얻으려고 상고하는 거고, 이 성경은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 통해 성령의 감화를 입혀서 기록하게 했는데,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해 증거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통해 할례를 받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데 왜 영생의 실상적 존재되신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왜 이 그리스도 예수를 못 알아보고 배척을 하고 죽이기까지 했을까? 자기들을 살리려고 선지자도 보냈고, 사건도 보냈는데 왜 그들도 죽이고 예수도 죽였을까?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앞에 놓고 한참 말씀을 하신 후에 ‘내가 말한 것은 영이니라’ 라고 하니까 이 말을 들은 무리들이 다 도망을 갔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면에 깨달음이 되라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으로서 영능의 실력이 커지라고 말씀을 하신 건데 이 말씀을 눈에 보이는 세상적 물질적 육적 감각적으로 말씀을 받던 자들은 ‘내가 말한 것은 영이니라’ 라고 하시니까 다 도망을 가버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육적 세상적으로 믿는 자들은 영의 말씀을 하면 다 도망을 가버린다.
성경을 역사적 표면적으로 보면 대부분 이미 지나간 사건이지만 이 속을 파서 보면 그 속에 내가 들어 있고, 남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인다. 거짓 종도, 이단자들도, 여호와의 증인도 성경을 글자적 표면적으로만 본다. 이것은 마귀의 꾀임에 빠진 거다. 성경을 영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예수님을 발견을 못 한다. 성경을 영적인 면에 수입을 잡으려고 보지 않으면 한 이치도 못 깨닫는다.
하나님은, 천국은 실상이다. 이 세상은 불타고 없어지지만 천국은 없어지지 않는다. 실상은 없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은 시간과 함께 변질이 되고 언젠가는 이 땅에서 없어질 현상적인 존재다. 그러나 믿는 사람 속에는 실상적 사람, 거듭난 새사람이 들어 있다. 이 새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을 입어 가는데 이게 너의 참 사람이다. 너의 참 실상이다. 이 실상의 새사람이 자라가는 게 없이 껍데기만 자랐다면 예수를 믿어도 별 볼일이 없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본 이유는 성경을 암송하려고만 했지, 문자적으로 지키려고만 했지 문자가 요구하는 참 인격의 사람이 되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인격화 성품화 시킬 줄 몰랐으니 이것은 부모의 말을 들으면서도 부모의 중심을 모르는 자식과 같은 거다. 사람이 진리의 옳은 이치를 들으면 자기의 신앙의 질이 양심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 때 잘못된 것이 발견이 되면 고쳐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의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고 글자적 문자적으로만 지키면 영생이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예수님께 왔던 부자청년도 그랬다.
인간 자기의 출생목적이 뭐냐? 인간 자기가 나그네로 사는 재세기간 동안에 무엇을 하라는 거냐?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것을 정확히 알고 이 목적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데 이런 것을 모른 채 살게 되면 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다. 천국이 현재의 세상살이보다 더 중요하게 와 닿지를 않는다.
사람은 몸이 더 중요하냐, 정신이 더 중요하냐? 정신이다. 발이 중요하냐, 머리가 중요하냐? 머리다. 그래서 머리를 다치면 안 된다. 자기의 머릿속을 영화배우나 가수가 밟고 지나가면 그 머리통은 쓸모가 없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다. 그러니 자기의 머릿속에 주님이 계셔야 한다. 삼손이 머리카락이 잘리니, 즉 하나님이 잘리니 그 다음에는 눈이 뽑힌다. 믿는 사람이 세상주의로 나가면 이 사람에게는 머리인 하나님이 잘린 거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사건 환경 속에서 자기의 눈알이 다 빼인다. 즉 영적으로 구별 분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 자기의 눈알을 빼는지, 무엇이 자기의 머리를 밀어버리는지, 하나님 자리에 무엇이 앉아 있는지를 모른다. 계:에 보면 버가모 교회에 마귀가 버티고 앉아 있다. 그러면 이 교회의 목사가 뭘 가르쳤다는 게 나오는 거다. 성경을 가지고 세상을 가르친 거다.
성경을 외우는 것과, 성경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화로 되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말을 하면 이 말을 그대로 믿는데 ‘네 속에 가룟유다의 성질이 들었구나’ 라고 하면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믿는 사람이 예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성질이 들어 있어서 예수님을 세상과 바꿔먹은 적이 몇 번이냐? 이게 바로 가룟유다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 속의 성질을 모르면 가룟유다와 친구가 될 수 있고, 가룟유다의 영이 자기 속에 들어 있어서 얼마든지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 있다.
현실의 사건과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데 고통스럽고 어려운 현실을 해결해 달라고 현실도피의 기도를 한다면 언제 영생의 사람으로 성품이 만들어질까? 이건 현실의 사건을 대하는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과 대립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거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대립이 될 때 자기의 마음에서 무엇이 먼저 나가는지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게 없이 상대를 잡고 싸운다면 이 역시 그 사건을 주신 주님의 마음과 대립이 되어 있는 거다.
성경을 보고 말씀을 배우면서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없다면 무슨 이유냐? 현실에서 편하기만 바라니 영생의 정신의 사람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성경을 암송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찾기 위한 되새김질이 필요하다. 천국이 그렇게 좋다면 예수 믿으면 이 사람을 그 즉시로 그 좋은 천국에 데려가야 할 텐데 왜 이 땅에 살게 하면서 이런 저런 사건 환경을 주시는 건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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