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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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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43절: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예수님이 누구의 이름으로 왔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말은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으니 예수님이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치명적이 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 인간구원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 당신의 존재마저 불신이 되고 인간창조의 목적마저 없어져 버리니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중차대성을 생각해 봐라. 이 말씀을 통해 오늘날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인도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고, 아울러 성도들은 반드시 진리의 종으로부터 진리본질의 말씀을 받아야 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는데 어떻게 인간구원을 위해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떠난 일을 하겠느냐? 예수님은 일구월심 불철주야 순간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다. 예수님의 이 삶은 인간으로 말을 하면 매일 매일 하루하루마다의 삶이 인간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폭을 드리는 삶이다. ‘내가 몇 년까지만 이 일을 한다’ 하고 여유를 남기는 게 아니라 33년의 전 삶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삶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삶처럼 자기 일생 전폭이 구원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 ‘조금 남겨놓고 내일 하자’ 이런 정신은 안 된다. 오늘 하루는 시간 속에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끝나는 거다. 음식은 남겼다가 내일 먹어도 되지만 구원은 그게 아니다. 매 시마다 자기의 현실에서 구원을 이루고 가야 한다.
규모가 큰 교회에는 장사를 할 목적으로 장사꾼도, 곗놀이꾼도, 다단계도 판매업자도, 보험 아줌마도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계:에 보면 큰 성 음녀 바벨론이 무너지자 이 안에서 각종 장사를 해서 먹고 살던 사람들이 바벨론 성 밖에서 무너지고 불타는 바벨론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장사를 다 해 먹었다’ 라고 하며 울고 있는데, 이게 말세의 교회 안에서 되어질 모습을 보여주는 거다. 그러니까 말세가 되면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게 아니라 육신적 물질적 유익을 얻으려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거다.
믿는 사람은 말세가 될수록 옳은 진리이치를 듣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서 혼자만 믿을 게 아니라 자기의 생활터전에서 다른 사람도 주님을 믿게 해야 하는데, 실력이 있으면 많은 사람을 믿게 하라. 한 사람을 본질로 예수를 믿게 했는데 이 사람이 열 사람에게도 본질로 전도를 했다면 한 사람에게 전도를 한 것과, 열 사람에게 전도를 한 실력이 같으냐, 다르냐? 같다. 한 사람에게 전할 때 최선을 다하고, 그 자리에 열 사람이 있으면 열 배로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 그 본질 그 실력으로 똑같이 전하는 거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내가 그 어떤 고난과 환난과 핍박을 받고, 수모를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지언정 아버지의 얼굴을 수치스럽게 만들면 안 되지’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아버지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주려고 오신 구원의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구나.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귀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인격적으로 중심으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를 귀로 듣고 지식적으로 믿는 사람이 있고,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이성으로 판단을 해서 주님과 인격적으로 결합이 되어서 믿는 사람이 있다. 인격적으로 결합이 되어서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삶 전부를, 자기의 가치판단 전부를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주님을 이렇게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이게 무슨 뜻일까? 말하자면 예수님이 아닌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종교적으로 이름이 난 사람이나, 이런 사람의 하수인이 오면 얼른 맞아줄 거라는 거다. 이 말씀을 오늘날 교회에 붙여서 말을 하면 ‘나는 국가의 중직을 맡고 있는 누구입니다. 나는 종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누구입니다. 나는 어떤 분의 능력 있는 안수를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고 자기를 소개하면 교인들이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라고 하면서 이 사람을 받들어 모신다는 거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이게 믿는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라는 뜻이냐? 고난주간이나 부활주간 때 나무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면 이 사람이 예수가 되는 거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심정이 느껴지는 거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밤낮 잠도 못 자며 일을 하는 부모의 심정만도 못한 거다. 그럼에도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내세우면 믿는 사람들이 이 사람을 알아준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보냈다고 표현하는 것은 ‘목사 너는 누가 보내서 왔느냐?’ 하고 묻는 거다.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은 누가 자기를 보내서 온 것으로 아는 건지? 자기는 누구의 이름으로 온 건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라면 예수님과 똑같은 천국복음을 외친다. 그런데 이게 아닌 종교적 사업적 이력을 내세운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낸 종이라고 할 수 없다.
‘신앙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 사상을 보고 판단하는 거다. 사람의 정신 사상은 세상적 이성적 지식이나 학을 가지고 아는 게 아니라 성령의 눈이라야 알 수 있다. 이방세상의 철학은 바닥이 없다. 반석이 없다. 구원이 없다. 말이 아무리 듣기에 좋아도 사람이 앉고 서고 보전이 될 수 있는 바닥이 없다. 이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을 하려고 해도 불가능이다. 논할 차원이 못 된다. 세상철학은 땅의 거고, 예수님의 것은 천국의 거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철학자요, 종교적 도덕성이 높은 자들이요, 원어학자들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가지고 ‘외식자들이여, 너희들의 속이 어떻다. 어떻다’ 하고 이들의 잘못을 지적을 했다. 주님이 보는 눈은 사람의 안팎을 다 보시는 성령님의 눈이다. 사람들의 언행심사를 보는 눈이다. 인간이 이 분을 알면 알수록 ‘나는 어떤 존재로구나’ 하면서 고개가 숙여지고, 엎드려지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교회의 인도자들은 자가가 누구의 이름으로 온 거냐? 교인들은 누가 보내서 온 거냐?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전할 거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쓸 거고, 세상이 보냈다면 물질 축복받고, 부자 되고, 병 낫는다는 말을 들으려고 할 거다. 교회라고 할 때는 주님 앞이다. 세상이 보내서 교회가 생긴 게 아니다. 교인 하나하나도 아버지께서 보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 못 간다.
세상과 종교계가 자기를 알아준다면 이 사람이 누구의 이름으로 온 것 같으냐? 세상에 붙들려서 온 거다. 자기 속의 이런 정신을 구별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마음이 늘 어지럽다. 우리가 ‘이거냐, 저거냐?’ 할 때 딱 구별이 되려면 영원히 가는 진짜를 붙잡아야 한다. 교회 인도자가 물질선과 인정선과 생명선을 초월하지 못하고 교회를 인도한다면 이 사람이 주님께서 보내신 참 인도자로 느껴지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믿는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이래야 참 자식으로 기를 수 있다’ 하고 자식을 기르는 정신도 보여주셨다. 아브라함은 물질선과 인정선과 생명선을 초월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출발하면서부터 이 정신으로 고향을 떠났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사상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자녀를 길렀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선물로 받았다. 마:의 천국의 호적에 올려졌다.
믿는 사람이 물질선과 인정선과 생명선에 매이면 사는 게 참 힘들다. 물질을 바로 사용하려면 물질선을 초월해야 한다. 자기가 오래 살고 싶으면 육의 생명선을 초월하라. 그러면 죽을 것 같으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세상을 누구에게 주려고 만든 거냐? 인간에게 생명과를 따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라고 했다. 이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하면 생명선도 초월하게 된다. 그런데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기준, 세상기준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인도자가 물질선과 인정선과 생명선을 초월하지 못하면 인도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세가 안 된 거다. 이걸 초월한 사람은 세상이 무섭지 않다. 세상이 이 사람을 감당을 못한다. 세상이 이 사람의 정신을 뺏어가지 못한다. 교회 인도자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지 못하면 어떻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하늘나라를 말씀하시더라’ 라고 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처럼 이것을 전할 수 있을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를 증거하라고, 아버지의 속뜻을 증거하라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냈다. 이게 우리의 구원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것을 다 가르쳐 주고 가셨다. 교회는 이것을 전해야 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걸 아는 축복, 통치할 수 있는 축복, 지키고 다스릴 수 있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이걸 깨닫지 못한다면, 받지 못한다면 자기가 받아 가질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 생명의 씨가 길가 밭에 떨어지니 새가 와서 주워 먹었다. 이것은 ‘네 마음이 세상정신에 짓밟혀서 딱딱하게 굳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으니 너에게는 말씀이 필요가 없다’ 이 뜻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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