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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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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10절-1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0절-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님께서 오천 명이 푸른 잔디 위에서 식사를 잘 할 수 있도록 열을 맞춰서 앉게 했다.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축사된 떡을 5천 명에게 나눠주려니 이렇게 하게 한 거다. 이게 축사된 떡을 받을 수 있는 자세다. 제각기 앉아 있으면 나눠줄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니 줄을 맞춰서 앉는 것은 얻어먹는 자로서의 기본자세다. 교회 같으면 신령한 만나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마음과 정신의 자세를 말해주는 거다. 자기 마음 속에 죄 된 생각이 들어 있거나 회개도 안 하고 있다면 축사된 떡을 못 먹는다.
어른이던 아이던 자기가 하나님의 축사된 떡을 먹기 싫으면 하나님의 축복의 식사의 대열에 앉지 말고 열 밖으로 나가야지 어떤 형태로건 축복의 떡을 먹는 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자세가 있듯이 예배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있는 거다. 설교를 들을 때 말이 아무리 유창할지라도 구별 분별을 잘 해서 인본주의 세상주의의 설교는 듣지 말아라. 사약이다. 생전 못 듣던 설교라면 ‘무슨 사상에서 저런 말이 나오느냐?’ 라고 하며 말씀의 이치로 구별 분별을 한 후에 ‘이단이니, 아니니’ 해야 한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교회에서는 축복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다른 것은 따라온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하신다. 고기도 역시 이렇게 하신다. 감사기도를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저희의 원대로 주라고 하신다. 주님은 당신 앞에 온 사람들이 얼마나 배가 고픈지를 잘 아신다.
12절: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축사된 떡과 고기를 원대로 먹고 남은 조각을 버리지 말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자기에게 가지고 와서 보면 진리말씀을 귀담아 듣고서 자기 마음 속에서 버리는 게 있으면 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골라서 먹는다? 네가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아무리 조각이라고 해도 축사를 한 떡과 고기는 다 너에게 양분이 된다.
13절: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볼 때 배가 고프면서 자기도 먹지 않고 주님께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 눈에 선하다. 자기가 현 세상에서 좋은 것을 보고 느낄 때 이것을 축소시켜서도 보고, 천국에까지 죽 늘어뜨려서도 생각을 해 봐라. 눈으로 보이는 것을 축소시켜서 보는 것은 사진이나 그림이나 영화 등이 있다.
어린아이가 주님께 드린 오병이어를 장정만 해도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이 먹었는데, 이들이 훗날에 어린아이가 내어놓은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먹은 것을 생각하면 이 아이에게 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나올 거다. 그러면 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그 때 괜히 오병이어를 바쳤다’ 라고 후회를 할까, 아니면 ‘그 때 일은 내가 참 잘 했다’ 라고 할까?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해 나오면서 이런 게 있는 거다.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후에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자기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갔다. 참 잘 했다.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라고 했다. 사도바울은 천국 점령자다. 이 점령 속에는 실력이 들어 있다. ‘너도 사도바울처럼 대신관계 대인관계를 바로 하고 살아봐라. 그러면 네가 밟는 땅을 다 너에게 주겠다’ 라고 하는 약속이 되어 있다. 사도바울을 보면 이걸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너는 어떻게 살래?’ 하는 것을 상기시키는 거다. 지금의 우리 속에서도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것처럼 성령의 감화성이 역사를 하면 우리도 천국 점령자가 된다. 점령을 하는 것은 다 자기 거다. 하나님의 허락이다.
빌립과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먹고 배가 부른 뒤에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라고 한 자기의 말을 생각하면 혼자 있어도 스스로 부끄럽다. 자기 옆에서 자기가 한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을 보기에도 부끄럽다. 주님의 얼굴을 뵐 때마다 부끄럽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그까짓 거’ 라고 하면서 시시하게 여긴 자들, 그리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남의 몫까지 먹어치운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의 축사의 떡을 먹고 난 뒤에 부끄러운 마음이 돌고 있었을 거다. 이런 걸 신앙 믿음의 정신으로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거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지나고 난 후에 ‘잘못했구나’ 라고 할지라도 실천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지났고, 실천할 사건도 없어서 후회막심인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축사된 떡을 먹고 남은 조각이 세상 끝 날까지 있는 것이니 이 조각을 먹고 다시 힘을 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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