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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8:2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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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22절-29절: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22절-25절: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무리들이 어제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바닷가에 있었던 것을 보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산으로 가신 예수님이 바닷가로 돌아오지 않자 자기들끼리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가버나움 쪽으로 가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래서 이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떡을 먹여주셨던 곳으로 가 보아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튿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겠지’ 하고서 가버나움으로 가서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면 이 무리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다닌 거냐? 그리고 오늘날 예수를 믿는 자기는 왜 그렇게 예수님을 애타게 찾는 거냐? 배고픈 사람에게 떡을 먹여주는 예수님으로 알고 이런 예수를 찾으면 절대로 예수님을 못 만난다. 즉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을 못 만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는 것은 세상 것이 아닌 바로 네 속이 만들어지는 것을 구하라는 거다. 이게 시간 속에, 사건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거다. 이게 내 속에 주님을 모시는 거다. 이렇게 살면 하루하루를 살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바른 판단이 나오게 되고, 이 판단을 따라 사는 게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거다. 이러면 자기가 먹고 마시고 손으로 움직이는 것에는 노력의 대가가 오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도 그렇고,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에도 그렇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 즉 믿음의 방편으로 일을 하다보면 일반적인 양식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어지고, 이렇게 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여러 가지로 구원역사를 하신다. 요셉이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니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으로 꿈을 꾸게 해서 요셉을 높이 올리셨다. 구약과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은 성도를 보면 어떤 환경이나 처소에 처해 있어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니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위해 배후에서 역사를 하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서 나무 뒤에 숨었다. 왜 숨은 거냐? 이들이 생명과를 따먹었다면 숨는 짓이 나오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살면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이들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입었지만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는 햇빛만 비취면 시들기 때문에 날마다 다시 해서 입어야 한다. 이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인생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자기의 죄와 수치를 가릴 수 없다는 거고, 가리려고 하면 할수록 너의 인격과 성품이 들통이 난다는 거다. 이런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서 가죽으로 옷을 해서 입혔는데, 이걸 계시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생명과를 먹으면서 살 때 행복하도록 지어졌다. 생명과를 먹으면서 일반과도 먹어야 하는데, 생명과를 먹은 데서 일반과를 먹으면 이 일반과가 생명과 쪽으로 연결이 된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일반과를 먹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다 죽음으로 연결이 된다.
26절-2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진실로 진실로’란 ‘아멘’이란 말인데, ‘참말로 그렇습니다’ 라는 뜻이다. ‘나도 동감입니다’ 라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이 참말로 그렇다는 거냐?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라고 했으니 예수님을 애타게 찾는 이 무리들이 썩는 양식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다는 거다. 세상 소원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찾고 믿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진실로 진실로’ 라고 하신 것은 ‘너희들이 세상 육적으로 믿는 것은 확실히 영생이 아니다’ 이 말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썩는 양식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세상 소원 목적을 위해 예수를 믿는다는 거다. 그래서 주님이 ‘세상 육적으로 믿는 믿음은 틀린 답입니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날 어떤 목사가 ‘세상을 구하면 다 망합니다. 썩는 양식입니다. 형벌을 받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 이 말을 듣는 교인들에게서 ‘아멘’ 소리가 나올 런지, 아니면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고 자자손손 잘 됩니다’ 라고 하면 ‘아멘’ 소리가 나올 런지?
오늘날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달라고 부르짖고 있느냐? 종교적인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은 썩는 양식이냐, 영생하는 양식이냐? 썩는 양식이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목적으로 살지 말라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 되기 위해 믿는 것은 영생하는 양식이 아닌 썩는 양식을 위해 믿는 거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있는 양식이 뭐냐? 자기가 현재 세상을 살면서 있는 양식이 뭐냐?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육신의 양식이 있다는 건데, 그러면 지금까지 뭐 하려고 육신의 양식을 먹고 있는 거냐? 영생을 위해 먹어야 한다. 이룰구원도 영생에 속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입는 게 영생에 속하는 거다. ‘영생’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영생하는 양식’이란 또한 너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가 있느냐? 있다면 이게 영생하는 양식이다. 기본구원은 영생할 수 있는 양식으로 바탕이 놓여진 거고,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말씀을 한 이치라도 깨달아서 이 말씀으로 신앙이 계속 성장하는 것도 영생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기의 주식이 무엇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들처럼 썩는 양식을 위해 산다면 자기의 인생도 썩는 거다.
믿는 우리가 새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말씀을 깨달으면서 영능의 실력이 자라가는 것은 영생에 속하는 거다. ‘내가 오늘 아침을 먹었으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지’ 라고 하며 자타의 구원을 위한 언행심사가 나간다면 이 사람은 영생을 위해 사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온전을 덧입는 것과 직결이다. 이게 아닌 삶은 전부가 헛된 거다.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하나님의 인 치신 자’란 인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님께 ‘인자’를 붙이는 게 좋다. 왜냐?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질적인 면에서 우리 인간의 기준이요, 표준이요, 절대 정확한 하나님의 의와 선을 인간들에게 제시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교훈을 할 때도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야 인 치신 교훈이 나온다. 세상 소원 목적적인 말을 잔뜩 해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한다고 해서 인 치신 교훈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 친 말이 나와야지 세상 말, 귀신같은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예수님을 찾아서 가버나움까지 온 무리들이 예수님을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 알고 있느냐, 육적인 문제, 세상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 알고 있느냐? 예수님을 어느 쪽으로 인 치신 자로 여기고 있느냐? 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육적으로 인 치신 자로 알고 이를 위해 예수를 찾는 거다. 그러면 이 말세 시대에 거짓과 이단자들의 믿음이 육적이냐, 영적이냐? 어느 쪽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 알고 예수님을 믿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어느 쪽 문제를 해결하라고 보낸 거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육적으로 인 치신 자로 보낸 게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를 믿는 너는 예수님을 어느 쪽에 인 친 분으로 믿고 있느냐? 즉 예수를 육적으로 믿느냐, 영적으로 믿느냐?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뜻이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붙여서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된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 치신 말씀이 아니다.
28절-29절: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무리들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떤 게 하나님의 일인 줄을 몰라서 한 말일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신비로운 일을 많이 하시니 자기들도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일까?
오늘날 교회 안에 능력만 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자들이 많다. 이건 무슨 마음이 담긴 거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라고 하는 말씀을 앞세우며 이런 말을 한다면 이게 무슨 뜻이냐? 말씀을 껍데기만 알게 되면 이 사람은 행동 활동위주의 신앙이 된다. 이런 사람은 성경의 표면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이치와 도리가 들어 있는 건데 이 면을 모르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위주, 껍데기 위주로 나가지 속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에는 눈이 멀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어떤 대화를 해도 전부가 껍데기에 관한 말뿐이다. 속사람이 주님과 연결되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지막 시대에 교훈적인 차원에서 주님께서 인을 치듯이 하나님의 인 친 종들이 꼭 필요하다. 종교적인 활동은 돈만 있으면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존귀 영광자로 인침이 되는 것은 돈을 가지고는 할 수 없고 말씀으로 되는 거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머리 되신 하나님을 잘라놓고 세상을 자기의 머리로 삼고 사는 자가 많다.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되면 종교적 활동위주로 나가게 된다. 주님께서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듯이 교회 전체적으로 세상을 위해 믿는다면 조만간 세상과 교회가 불쏘시개가 될 거다. 내 느낌으로는 이렇게 될 날이 멀지 않다. 목사건 교인이건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이 된 신앙은 안 된다. 이건 교회가 아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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