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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3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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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37절-40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시지 않으면 예수님께 안 오는 거다. ‘내게’란 ‘예수님께로’ 이 말이다. 예수님께로 가지 않는 자는, 다른 곳으로 가는 자는 아버지께서 보낸 게 아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 나온 자는 예수님께서 책임을 진다는 거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실 때는 ‘내가 보낼 테니 내어 쫓아라’ 이게 아니라 ‘네가 끝까지 책임을 져라’ 이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천국을 상속받을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영능의 능력자, 실력자가 되도록 양육을 하라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다. 이 생명의 떡을 먹으면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는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이 생명은 자연생명이 아니라 영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신령한 생명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과 육으로 결합된 인간으로 만들었는데, 육신의 생명은 물질의 음식을 먹고 살고,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
‘예수=구원’이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는 곧 구원의 주시요, 우리가 구원을 얻으면 성령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어진 거고, 이것을 기본구원이라고 한다.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입어나가는데, 이것을 이룰구원 성화구원이라고 한다. 이게 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자기의 참 실상이다.
예수 믿는 사람 속에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새사람을 길러야 한다. 이러려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이룰구원은 없이 세상 것만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 속이 무엇으로 채워지겠느냐? 옛사람이 주격으로 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떡을 원하는 자를, 즉 말씀을 바로 깨닫고자 하는 자를 성령의 인도로 누구를 통해서건 생명의 말씀의 교훈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한다. 주님의 참 종은 생명의 떡을 먹고자 하는 자를 예수님께 보낸다. 반면에 거짓 종은 ‘세상에서 부자 부자’ 라고 외치면서 사람을 마귀의 시험쪽으로 가게 만든다. 생명의 떡을 먹으면 예수님의 소원과 목적과 성품이 옮아오니 이 사람은 속성과 성품이, 마음과 정신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사단일이 되면 이 사람에게는 생명의 떡이 계속 공급이 되지만 예수를 믿어도 생명의 떡을 먹지 않는 자는 아버지와 의사단일의 인격적 결합이 안 된다. 이러면 예수님과 따로 놀게 된다. 이런 사람 속의 주격은 옛사람이다. 세상이 주격이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신령한 게 들어 있지 않다. 이런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으로 통해 영적이고 신령한 것을 공급받아서 여기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선악과 따먹은 지식으로 살면 이 사람은 세상을 좇아 살게 된다. 이것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을 취하는 지식이라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 안 믿는 세상사람들의 속은 다 이렇게 되어 있다.
믿는 사람이 생명의 떡을 먹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와 의사단일의 인격적 결합이 안 된다. 교단이나 교파에 소속이 된 게 문제가 아니라, 또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교훈적인 면에서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된다. 교회에 다니면서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 신령한 생명권 밖이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신령한 영적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들어가야 교회요, 이게 아가페 안이요, 하나님의 치리권 안인데 믿는 사람이 세상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이건 하나님의 애정권 치리권 밖에서 사는 거다. 수십 년을 믿었어도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권 밖이다. 계:에서 말하는 성전 밖에 거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것과 같은 거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을 떠나면 엄마의 보호를 못 받는 것처럼 믿는 사람이 주님의 치리권 밖에서 살면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의 입장에서는 양육적인 면에서 자신이 교인을 생명권 안에서 양육을 시키고 있는 건지, 밖에서 양육을 시키고 있는 건지 알아야 한다. 생명권 밖에서 양육을 시키고 있다면 영적으로 보면 구약의 산 아이를 태워서 몰렉에게 바친 것과 같은 거다.
성경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정확히 가르쳐 준다. 모든 세상사람들의 주장성은 성경 밖이다. 우리는 생명과를 먹는 거고, 세상 것은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성이지 목적성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게 해야지 목사가 왜 세상에서 제일이 되라고 하느냐? 이러면 하나님 앞에 심판감이다. 세상은 마약을 하고서라도 미친 듯이 날뛰면 더 알아준다.
38절-40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심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 인간이 원래는 천국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만 타락을 해서 지옥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랴부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계획해서 된 게 아니라 세상을 만들기 전서부터, 영원 전서부터,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이 된 거다. 그러니까 표현을 하자면 세상과 인간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의중에 우리 모두 자기가 들어 있었던 거다.
인간이 이 사실을 알면 인간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게 되어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 텐데 자살을 하는 사람은 이것을 몰라서 세상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을 해서 자살을 하는 거다. 우리는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고 깨닫지만 자살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아,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몰라서 자살을 했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죽는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가난 가운데서도 깨닫고, 부요에서도 깨닫고, 미운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고운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보고도 깨달아야 한다. 깨닫는 자가 복된 거다. 못 깨달으면 자꾸 대립이 되고 괴롭다. 괴로운 이것이 자기의 병이고 시험거리이니 문제가 문제를 낳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소원을 품고 이 일을 위해 자원적으로 기쁨으로 이 땅에 오셨다. 누가 오라고 해서 오신 게 아니라, 오기 싫은데 하나님께서 보내시니까 억지로 오신 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소원적 자원적으로 오셨다. 구체적으로는 이 소원성 속에 누구를 만나러 오신 거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냐? 바로 나를 위해 오신 거다. 주님의 이 마음만 알아도 마음이 성령으로 뜨거워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한다. 당신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소원적 자원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걸까? 이는 아들의 일보다 아버지의 일이 더 시급하다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구원과 관계된 일은 분초찰나 순간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라는 거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육신으로 오셔야 했고, 탄생 후에는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요구를 33년간 만족시켜야 했고, 죄로 인해 인간들에게 온 모든 고난과 환난과 핍박과 시험과 죽음을 이겨야 했고,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생명의 부활을 해야 했고, 당신의 삶이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똑같은 효력이 있어야 했다.
예수님의 이 33년의 삶은 흠과 티가 없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맞는 삶이었는데, 예수님께서 33동안 손끝 하나, 발끝 하나, 눈동자 굴림 하나마다 어떻게 죄를 한 번도 안 짓고 살 수 있었느냐? 주님의 마음 속에 바로 인간 나의 구원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나의 이 구원을 위해 그렇게 힘든 삶을 사신 거다.
주님의 33동안의 삶 속에는 죽을 게 없고, 죽은 게 없고, 죽어가는 것도 없다. 왜냐? 나를 살리시려고. 당신에게 흠과 티가 하나라도 박혔다면 주님도 무덤에서 못 살아나고, 그러면 나도 못 살아난다. 주님의 이런 큰 사랑을 받은 구원 얻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 맞는 인격과 성품을 가진 자가 몇 명이나 될까? 믿는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존재만 믿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면 믿는 효력이 없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주님의 33년의 삶은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 앞에 기쁨과 만족을 드린 걸음걸이이니 주님의 모든 발걸음이 보석이다. 귀하다는 말이다. 이 보석은 세상에 없는 보석이다. 주님의 정신과 소원 목적은 세상사람들에게는 없다. 우리는 세상에 없는 것을 알고 믿고 자체화 시키는 거다. 이게 믿음이다. 마귀도 세상도 이 믿음을 이길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교인을 하나라도 잃으면 안 된다. 왜냐? 그 하나라도 잃으면 인간창조의 목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두고 언약을 한 것이 깨지기 때문에 하나님도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하신 우리와의 약속이 깨지면 하나님도 없어져 버리고, 이러면 세상도 나도 다 없어진다. 우리의 구원이 그만큼 귀한 거다. 그런데 지금의 너는 이 귀함성, 이 엄함성, 이 중요성을 느끼면서 예수를 믿고 있느냐?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라도 잃지 않게 하려면 기본구원의 기초 위에 반석처럼 튼튼한 믿음이 되게 해야 한다. 신령천국에까지 효력이 있는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된 기초요, 터전이요, 기준이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 근원, 이 반석, 이 기초 위에 집을 짓듯이 그 분의 정신과 사상과 소원성과 목적성과 취미성과 간구성을 이룰구원으로 채워 올라가야 한다.
교회에서는 설교에서 이 구원의 이치가 나와야지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 라고 하는 설교는 인간이 반석 위에 세워지는 설계가 아니라 인간 조작배기 설교다. 이런 설교에는 예수 믿는 정신이 없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이 반석 위에 건설되고 쌓아지고 성장이 되어야 한다.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 것은 이런 면에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거다.
인간 조작배기 설교를 들으면 세상의 정신이 박히지만 진리이치의 설교를 들으면 예수를 믿어갈수록 예수의 정신이 진하게 들어가고, 인격적 속성적으로 예수님의 정신에 밀착이 된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 기본구원의 터 위에 이룰구원을 이룬 것은, 즉 하나님의 설계대로 이뤄진 것은, 주님의 성품대로 성장된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변화 부활이 되어서 올라간다. 이게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닦아야 할 영능의 실력이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이 아들을 보고 믿게 해서 영생을 얻게 하려는 거다. 이를 위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많은 구원의 뜻을 넣어놨으니 우리가 이것을 풀면 풀수록 보화가 나온다. (계속)
6장 37절-40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시지 않으면 예수님께 안 오는 거다. ‘내게’란 ‘예수님께로’ 이 말이다. 예수님께로 가지 않는 자는, 다른 곳으로 가는 자는 아버지께서 보낸 게 아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 나온 자는 예수님께서 책임을 진다는 거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실 때는 ‘내가 보낼 테니 내어 쫓아라’ 이게 아니라 ‘네가 끝까지 책임을 져라’ 이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천국을 상속받을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영능의 능력자, 실력자가 되도록 양육을 하라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다. 이 생명의 떡을 먹으면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는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이 생명은 자연생명이 아니라 영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신령한 생명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과 육으로 결합된 인간으로 만들었는데, 육신의 생명은 물질의 음식을 먹고 살고,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
‘예수=구원’이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는 곧 구원의 주시요, 우리가 구원을 얻으면 성령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어진 거고, 이것을 기본구원이라고 한다.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입어나가는데, 이것을 이룰구원 성화구원이라고 한다. 이게 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자기의 참 실상이다.
예수 믿는 사람 속에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새사람을 길러야 한다. 이러려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이룰구원은 없이 세상 것만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 속이 무엇으로 채워지겠느냐? 옛사람이 주격으로 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떡을 원하는 자를, 즉 말씀을 바로 깨닫고자 하는 자를 성령의 인도로 누구를 통해서건 생명의 말씀의 교훈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한다. 주님의 참 종은 생명의 떡을 먹고자 하는 자를 예수님께 보낸다. 반면에 거짓 종은 ‘세상에서 부자 부자’ 라고 외치면서 사람을 마귀의 시험쪽으로 가게 만든다. 생명의 떡을 먹으면 예수님의 소원과 목적과 성품이 옮아오니 이 사람은 속성과 성품이, 마음과 정신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사단일이 되면 이 사람에게는 생명의 떡이 계속 공급이 되지만 예수를 믿어도 생명의 떡을 먹지 않는 자는 아버지와 의사단일의 인격적 결합이 안 된다. 이러면 예수님과 따로 놀게 된다. 이런 사람 속의 주격은 옛사람이다. 세상이 주격이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신령한 게 들어 있지 않다. 이런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으로 통해 영적이고 신령한 것을 공급받아서 여기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선악과 따먹은 지식으로 살면 이 사람은 세상을 좇아 살게 된다. 이것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을 취하는 지식이라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 안 믿는 세상사람들의 속은 다 이렇게 되어 있다.
믿는 사람이 생명의 떡을 먹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와 의사단일의 인격적 결합이 안 된다. 교단이나 교파에 소속이 된 게 문제가 아니라, 또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교훈적인 면에서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된다. 교회에 다니면서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 신령한 생명권 밖이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신령한 영적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들어가야 교회요, 이게 아가페 안이요, 하나님의 치리권 안인데 믿는 사람이 세상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이건 하나님의 애정권 치리권 밖에서 사는 거다. 수십 년을 믿었어도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권 밖이다. 계:에서 말하는 성전 밖에 거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것과 같은 거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을 떠나면 엄마의 보호를 못 받는 것처럼 믿는 사람이 주님의 치리권 밖에서 살면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의 입장에서는 양육적인 면에서 자신이 교인을 생명권 안에서 양육을 시키고 있는 건지, 밖에서 양육을 시키고 있는 건지 알아야 한다. 생명권 밖에서 양육을 시키고 있다면 영적으로 보면 구약의 산 아이를 태워서 몰렉에게 바친 것과 같은 거다.
성경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정확히 가르쳐 준다. 모든 세상사람들의 주장성은 성경 밖이다. 우리는 생명과를 먹는 거고, 세상 것은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성이지 목적성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게 해야지 목사가 왜 세상에서 제일이 되라고 하느냐? 이러면 하나님 앞에 심판감이다. 세상은 마약을 하고서라도 미친 듯이 날뛰면 더 알아준다.
38절-40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심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 인간이 원래는 천국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만 타락을 해서 지옥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랴부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계획해서 된 게 아니라 세상을 만들기 전서부터, 영원 전서부터,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이 된 거다. 그러니까 표현을 하자면 세상과 인간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의중에 우리 모두 자기가 들어 있었던 거다.
인간이 이 사실을 알면 인간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게 되어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 텐데 자살을 하는 사람은 이것을 몰라서 세상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을 해서 자살을 하는 거다. 우리는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고 깨닫지만 자살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아,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몰라서 자살을 했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죽는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가난 가운데서도 깨닫고, 부요에서도 깨닫고, 미운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고운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보고도 깨달아야 한다. 깨닫는 자가 복된 거다. 못 깨달으면 자꾸 대립이 되고 괴롭다. 괴로운 이것이 자기의 병이고 시험거리이니 문제가 문제를 낳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소원을 품고 이 일을 위해 자원적으로 기쁨으로 이 땅에 오셨다. 누가 오라고 해서 오신 게 아니라, 오기 싫은데 하나님께서 보내시니까 억지로 오신 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소원적 자원적으로 오셨다. 구체적으로는 이 소원성 속에 누구를 만나러 오신 거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냐? 바로 나를 위해 오신 거다. 주님의 이 마음만 알아도 마음이 성령으로 뜨거워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한다. 당신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소원적 자원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걸까? 이는 아들의 일보다 아버지의 일이 더 시급하다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구원과 관계된 일은 분초찰나 순간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라는 거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육신으로 오셔야 했고, 탄생 후에는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요구를 33년간 만족시켜야 했고, 죄로 인해 인간들에게 온 모든 고난과 환난과 핍박과 시험과 죽음을 이겨야 했고,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생명의 부활을 해야 했고, 당신의 삶이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똑같은 효력이 있어야 했다.
예수님의 이 33년의 삶은 흠과 티가 없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맞는 삶이었는데, 예수님께서 33동안 손끝 하나, 발끝 하나, 눈동자 굴림 하나마다 어떻게 죄를 한 번도 안 짓고 살 수 있었느냐? 주님의 마음 속에 바로 인간 나의 구원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나의 이 구원을 위해 그렇게 힘든 삶을 사신 거다.
주님의 33동안의 삶 속에는 죽을 게 없고, 죽은 게 없고, 죽어가는 것도 없다. 왜냐? 나를 살리시려고. 당신에게 흠과 티가 하나라도 박혔다면 주님도 무덤에서 못 살아나고, 그러면 나도 못 살아난다. 주님의 이런 큰 사랑을 받은 구원 얻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 맞는 인격과 성품을 가진 자가 몇 명이나 될까? 믿는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존재만 믿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면 믿는 효력이 없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주님의 33년의 삶은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 앞에 기쁨과 만족을 드린 걸음걸이이니 주님의 모든 발걸음이 보석이다. 귀하다는 말이다. 이 보석은 세상에 없는 보석이다. 주님의 정신과 소원 목적은 세상사람들에게는 없다. 우리는 세상에 없는 것을 알고 믿고 자체화 시키는 거다. 이게 믿음이다. 마귀도 세상도 이 믿음을 이길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교인을 하나라도 잃으면 안 된다. 왜냐? 그 하나라도 잃으면 인간창조의 목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두고 언약을 한 것이 깨지기 때문에 하나님도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하신 우리와의 약속이 깨지면 하나님도 없어져 버리고, 이러면 세상도 나도 다 없어진다. 우리의 구원이 그만큼 귀한 거다. 그런데 지금의 너는 이 귀함성, 이 엄함성, 이 중요성을 느끼면서 예수를 믿고 있느냐?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라도 잃지 않게 하려면 기본구원의 기초 위에 반석처럼 튼튼한 믿음이 되게 해야 한다. 신령천국에까지 효력이 있는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된 기초요, 터전이요, 기준이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 근원, 이 반석, 이 기초 위에 집을 짓듯이 그 분의 정신과 사상과 소원성과 목적성과 취미성과 간구성을 이룰구원으로 채워 올라가야 한다.
교회에서는 설교에서 이 구원의 이치가 나와야지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 라고 하는 설교는 인간이 반석 위에 세워지는 설계가 아니라 인간 조작배기 설교다. 이런 설교에는 예수 믿는 정신이 없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이 반석 위에 건설되고 쌓아지고 성장이 되어야 한다.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 것은 이런 면에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거다.
인간 조작배기 설교를 들으면 세상의 정신이 박히지만 진리이치의 설교를 들으면 예수를 믿어갈수록 예수의 정신이 진하게 들어가고, 인격적 속성적으로 예수님의 정신에 밀착이 된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 기본구원의 터 위에 이룰구원을 이룬 것은, 즉 하나님의 설계대로 이뤄진 것은, 주님의 성품대로 성장된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변화 부활이 되어서 올라간다. 이게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닦아야 할 영능의 실력이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이 아들을 보고 믿게 해서 영생을 얻게 하려는 거다. 이를 위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많은 구원의 뜻을 넣어놨으니 우리가 이것을 풀면 풀수록 보화가 나온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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