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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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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이 사람들처럼
요2:1-11
2008.12.17
*내일 아침 저는 경남 거창의 샛별중학교로 신앙강좌를 하러 갑니다.
금요일 저녁에나 돌아오게 됩니다.
중보 기도를 부탁합니다.
아울러 이번 주에 나눌 설교문을 미리 올려 놓습니다.
깊은 은혜를 바라는 까닭입니다.
날로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성암교우들을 사랑합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등의 주변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흥겨운 혼인잔치자리가 시작됩니다. 현대적 용어를 빌리면 예수님의 삶은 신나는 파티와 함께 시작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 하필 결혼식 피로연입니까? 잔치 중에서도 혼인잔치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 잃어버린 갈비뼈를 되찾는 기쁨의 자리,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한 몸이 되는 즐거운 자리, 축하와 인사와 친교가 이루어지는 그 자리로 부터 예수님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입니까?
11절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게 내려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그러니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것도 또 거기서 기적을 행하신 것도 다 제자들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나에서의 하루를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혼인잔치에 초대 받아 가셨습니다. 그곳 아닌 다른 곳엘 가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잔칫집을 골라서 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자들 가운데는 한때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몇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를 통해 주님께 온 베드로도 있었고 빌립을 통해 주님께 온 나다나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가셔서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제 갓 주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많은 게 아닙니다. 야무지게 배운 것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또 한 제자는 주님이 머무는 곳에 가서 몇 시간 함께 있었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빌립이나 나다나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잔칫집에서 먹고 마시는 주님을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자기의 옛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 옛 스승은 결혼잔치 같은 자리에 가기는 커녕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 꿀로 요기를 하며 금욕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새 스승은 처음부터 먹자, 놀자판 입니다. 제자들은 금욕적이었던 옛 스승을 떠올리면서 새 스승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교적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근신하고, 금식도 하고, 경건을 추구하는 종교적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저들은 옛 스승으로부터 또 유대 전통으로부터 구도생활은 모름지기 엄격하고 근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자들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을 보십시오. 그는 무화과 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명상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제자가 된 후 주님이 자기들을 제자로 삼으신 후 어디론가 데려 가려고 했을 때, 나름대로 추측을 했을 것입니다. 제사가 이루어지는 성전으로 가는 것일까, 율법이 선포되는 회당으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옛 스승처럼 광야로 나가 금식하며 기도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그들의 추측과는 너무도 딴판인 혼인잔치 집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기치 못한 주님의 이러한 행동에 크게 놀랐을 겁니다. 저들은 통상 경건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순수한 즐거움 앞에서도 눈살을 찌푸리던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웃음 사절, 재미 사절, 흥겨움 사절'이란 표지판을 얼굴에 달고 다니면서 엄숙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여흥을 즐기는 자리에 초대 받아도 여지없이 거절하고 유머러스한 농담을 들으면서도 어금니를 깨물고 웃음을 참으려는 자들이었을 겁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묵직하게 무게를 실어 말하는 자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그들의 새 스승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심판을 선포했던 세례요한을 따라 다녔기 때문에 낮고 음울하고 음산한 단조의 목소리가 어울렸을지 모르나 이제부터는 복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이기를 결단한 그들에게는 그런 옛 모습은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천국의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삶에 지친 영혼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불어넣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은 '축하하고, 축하하고, 축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파티하고, 파티하고, 파티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의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하는 말이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고 했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자'라는 그 별명이 어떤 연고로 주님께 붙었겠습니까? 주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들을 보면 온통 잔치 이야기로 가득 합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다고 잔치, 잃었던 동전을 찾았다고 잔치,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고 잔치. 잔치, 잔치, 잔치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낯설고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저들이 예수께서 그 잔칫집에서 여섯 항아리 아귀까지 가득 채워진 물을 좋은 포도주로 바꾸어 흥을 지속시키는 것을 보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엄청난 변화를 수반해야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자신들의 신앙 스타일을 완전히 뒤집는 자기부인과 자기변혁의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저들의 옛 스승 세례요한에게서 배운 그대로 종교적 엄격함과 근신만을 고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저들이 옛날의 세례요한을 따라 다니면서 익혔던 수행법칙만을 고집하면서 계속해서 극기하고 금식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저들은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삶의 스타일은 180도 전혀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와 '지독하게 금욕하는 금욕자'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제 예수의 제자이지 세례요한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 된 저들은 주님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하고 그분의 사고방식을 좇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저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허물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 속에 비로소 예수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를 처음으로 따라간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탄’이었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에서 주님의 첫 제자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기회의 자리에 초청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잔칫집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 가치관을 깨부수고 발견한 예수님이 비로소 그들에게 ‘성탄’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에게서 나사렛 예수의 소개를 듣고서는 "나사렛 같은 촌동네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나고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당대 세상이 갖고 있던 메시야의 신원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도록 요구받습니다. 오늘 이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해서도 신앙생활은 모름지기 엄숙하고 금욕적 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버리도록 저들은 요구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도 예수님은 유다에서 갈릴리로 내려가면서 유대인들의 주통로인 요단강 동쪽 길을 택하지 않고 우정 돌아가는 사마리아길을 택함으로서 사마리아에 대한 선입견을 깨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여자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임으로서 저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십니다.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은 당시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와는 절대 말을 해선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유대 관습을 어기는 것이요 스승으로서의 품위에도 맞지 않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그런 고리타분한 선입견을 버리도록 요구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이러한 선입견들에 대해서 질문을 받아본 적도, 또 스스로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문화가 그랬고 모두가 그러한 선입견을 당연시 했습니다. 그 고정된 관습과 전통의 틀 속에서 갈등없이 살아왔습니다. 주님은 제자를 부르시어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실 때 무엇보다 먼저 저들 속에 있는 이러한 선입견과 고정관념들을 다 허물어뜨림으로서 새 일을 시작하고자 하셨던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나름대로의 굳어진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우리 식의 신앙생활을 도모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올바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이고 우리의 생각에 옳다고 할찌라도 주님의 가치관과 다르고 주님의 시선과 다르다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입견은 영적 진보의 큰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입견을 버리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을 상심케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선입견에 걸려서 스스로 상처를 입고 또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이 그 얼마며 더 나아가 선입견 때문에 우리들의 깊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회복되지 못하는 고통이 또 얼마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잔칫집에 갔던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선입견과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부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예수를 내 안에 모셔 들여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탄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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